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 때때로 멜로드라마 세리오라 부른다) 오페라 부파와 대립되는 말이며, 정가극(正歌劇)이라 번역되기도 한다. 제재를 신화나 영웅의 전설에서 구한 서정적 비극이며, 음악적으로는 중창이나 합창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아리아에 중점을 두고 그것을 드라마틱한 레치타티보로 접속해 간다는 방법이 취해진다.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우선 소리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려는 생각을 조성하여 벨 칸토 창법이라든가 다 카포 아리아를 낳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주역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적 성격을 확립하게 된다. 그 뒤 몇 번의 변천을 거듭하였지만, 오페라 세리아는 마침내 오페라 역사의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오페라 세리아가 그 독자의 명칭과 양식을 확립한 것은 18세기 나폴리파의 오페라 작곡가들의 노력에 의한다. 그들은 그 때까지의 번잡한 오페라를 정리하여 서정비극의 성격을 철저히 하려고 이 오페라 세리아를 가져온 것이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틴어: Gaius Iulius Caesar, 영어: Gaius Julius Caesar 가이어스 줄리어스 시저 기원전 100년 7월 12일 ~ 기원전 44년 3월 15일) 고대 로마의 정치가, 장군, 작가이다. 그는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치적으로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노선에 섰다. 기원전 60년대 말에서 5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소위 제1차 삼두 정치라는 초법적 정치 연대를 이루어 수년간 로마 정계를 장악하였다. 이들 파벌은 자신들끼리 권력을 분점하고자 하여, 원로원 내에서 마르쿠스 포르키우스카토(小 카토),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등 벌족파의 반대를 받았으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이에 가세하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기원전 58~52년)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북해까지 넓혔으며, 기원전 55년에는 로마인 처음으로 브리타니아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공훈 덕분에 카이사르는 강력한 세력가로 입지를 굳혀 폼페이우스를 위협하게 되었으며, 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의 두 정치가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이렇듯 로마 정계가 재편되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대치하게 되었으며,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대의를 내세웠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으로 하여금 루비콘 강을 건너게 하는 결단을 내려 기원전 49년에 내전이 일어났으며, 파르살루스 전투, 탑수스 전투 등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로마 세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등극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뒤 그는 로마의 사회와 정치에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는 공화정의 귀족 정치를 고도로 중앙집권화 하였으며, 급기야 자신을 종신독재관으로 선언하였다. 기원전 44년 3월의 열닷새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 일군의 원로원 의원들이 공화정을 복고하고자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났으며, 결국 카이사르의 양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영속적인 전제정을 성립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은 지 기원전 42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로마의 신으로 축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후 그의 공식명칭은 신격 카이사르가 되었다(Divus Caesar). 또한 그 이후부터 로마 황제가 죽었을 경우 후임자가 그를 신격화시키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카이사르의 삶은 본인이 쓴 전쟁 기록(갈리아 전기, 내란기)을 통해 상당 부분 알려져 있으며, 정적임과 동시에 오랜 친구였던 키케로와의 서신과 그의 연설, 살루스티우스의 기록, 카툴루스의 시 등 당대의 다른 사료도 남아 있다. 또 아피아노스, 수에토니우스, 플루타르코스, 카시우스 디오, 스트라본 등 여러 후대 역사가들의 기록도 그의 삶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자료출처; 다음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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