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Shostakovich / Symphony No.5 in D minor Op.47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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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stakovich, Symphony No.5 in D minor Op.47
쇼스타코비치 / 교향곡 5번 '혁명'
Dmitrii Shostakovich 1906-1975
교향곡 5번 ‘혁명’은 쇼스타코비치가 31세 때인 1937년에 완성한 곡으로 그의 교향곡 15곡 중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며, 가장 많이 연주되는 레퍼토리 중 하나이다. 어떤 작곡가든 교향곡에서만큼은 5번이라는 숫자의 배경과 의미를 떠나 베토벤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마련인 모양이다. 이 곡도 예외가 아니어서 쇼스타코비치의 ‘운명 교향곡’이라고도 불린다.
쇼스타코비치의 회상록 <증언>에서
1937년 11월 21일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운명에서 분수령이 된 날이라 할 수 있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홀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소비에트 사회의 최상층 인사들 즉 음악가, 작가, 배우, 화가, 그 밖의 온갖 유명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명예가 손상된 이 작곡가의 교향곡 5번 초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작곡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하는 가운데 가십과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어떤 센세이션과 스캔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음표가 울리고 나자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후에 있었던 주요 쇼스타코비치 작품들의 소비에트 초연이 거의 항상 그랬듯이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은 거대한 도덕적 압력 아래에서 중대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한 정직하고 사려 깊은 예술가가 행한 노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곡은 신경을 극도로 곤두세우는 박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작곡가는 열에 들떠서 미궁에서 나가는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마지막 악장에 이르자 그는 결국 어떤 소비에트 작곡가의 표현처럼 자기가 ‘이념의 가스실’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었다.
*<증언>(Testimony : the memoirs of Dmitri Shostakovich)은 음악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솔로몬 볼코프(Solomon Volkov)가 쇼스타코비치의 구술을 토대로 1979년 미국에서 출간한 작곡가의 회상록입니다. 국내에는 2001년 <드미트리히 쇼스타코비치 회상록>(이론과실천)이란 책명으로 소개되었습니다.
Valery Gergiev, conductor
BBC Symphony Orchestra
작품 이해를 위한 시대적 배경
1930년대의 소련은 스탈린 1인 숭배 체제 아래에서 3천만 명이 숙청당하는 공포정치의 시대였다. 어떤 음악을 써야 할지 작곡가보다 당이 더 잘 알던 시대였다. 문화예술은 암흑 속에서 낙관주의를 설파해야 했다. 당의 지침에 순응하지 않는 예술가에게는 어김없이 ‘형식주의’ ‘타락한 자본주의’ 등의 불온 딱지와 함께 생명의 위협이 가해졌다. 이념과 체제의 잣대로 음악을 재단하던 시대였다. 촉망받던 젊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1936년 1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음악이 아니라 횡설수설하는 음표 더미들”이라는 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비판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는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쇼스타코비치는 그 해에 완성한 교향곡 4번의 초연을 포기해야만 했다. 짙은 고독과 염세적인 분위기에 싸인 이 곡은 ‘타락한 부르주아 음악’으로 평가될 게 예상됐고, 그것은 곧 작곡가의 신변을 위협할 게 분명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1937년 11월에 발표한 교향곡 5번은 스탈린의 압제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대답이었다.
1악장과 3악장의 비극적인 분위기를 일소하는 4악장의 당당한 화음과 강력한 타악기의 향연은 아무리 혹독한 억압에도 꺼지지 않는 민중의 승리를 표현했다고 해도 좋고, 운명을 대하는 개인의 낭만적인 의지를 그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스탈린 체제의 ‘전진과 승리’를 찬양하는 것은 작곡가의 의도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관변 비평가들은 “낙관적 비극의 전형을 그렸다” “더 밝은 미래의 비전을 들려주었다” 등의 찬사와 함께 쇼스타코비치를 복권시켰다. 이 곡은 초연 당시 1시간이 넘도록 박수를 받았다. 연주시간 45분보다 더 긴 시간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회상록 <증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곡의 피날레에서 나는 생기에 찬 낙관적인 비전을 보여주고자 했다. 앞의 세 악장에서 드러난 비극적인 느낌들에 대한 해결책을 추구한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모호한 표현으로 체제와 그럭저럭 타협하며 살아간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훗날 제자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는 모두 음악의 전사들일세. 어떠한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인간을 옹호해야 하는 전사들….”
전쟁이 끝난 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9번을 발표했다. 스탈린은 이 곡이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기리는 기념비적 작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베토벤의 9번이 그러했듯 쇼스타코비치의 최대 걸작이 나올 걸로 은근히 기대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기대를 비웃기나 하듯 단순하고 귀엽고 유머가 넘치는 교향곡을 내놓았다. 스탈린은 격분했고 1948년 주다노프의 비판이 이어졌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죽은 1953년까지 스탈린 1인 숭배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저열한 선전영화의 음악을 만들어야만 했다.
음악은 인간의 마음과 의지 그 자체를 표현하는 가장 추상적인 예술이다. 문학은 언어로, 미술은 구체적인 회화나 조형물로 말하기 때문에 체제를 옹호했느냐 비판했느냐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그러나 음악, 특히 가사 없는 교향곡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한 개인이나 집단이 판단하려고 할 경우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음악이란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무한히 다양한 뉘앙스와 표현의 섬세함, 바로 그 점이 음악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곡가보다 당이 음악을 더 잘 알던’ 스탈린 시대에는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났다. 공포정치 속에서도 살아 있는 인간의 의지를 묘사한―적어도 쇼스타코비치의 회상록 <증언>에 의하면―교향곡 5번을 소련 공산당이 찬양한 것은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이 시대를 웃으며 살아가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다. 지휘자 게르기예프는 이렇게 말한다.
“스탈린은 절대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요 폭군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억누를수록 쇼스타코비치는 더욱, 더더욱 강해졌다. 스탈린의 압제는 이런 의미에서 쇼스타코비치의 모든 음악에 흔적을 남긴 것이다.”
아들 막심의 아버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작품 설명
아래 각 악장에 붙인 연주는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Gennaddy Rozhdestvensky) 지휘, 소련 문화성 교향악단(USSR Ministry of Culture Symphony Orchestra)의 연주입니다.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1931~ )는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와 거의 동시대에 활동했으며 므라빈스키의 사후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1928–2002),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1932~ )와 함께 러시아 3대 지휘자로 손꼽혔습니다. 2012년 2월 29일 내한하여 예술의 전당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8번을 공연하였습니다.
제1악장:모데라토 - 알레그로 논 트로포
매우 느리게 전개되는 서두 부분에서는 청중이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멜로디의 악상이 등장한다. 주제부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 정치적 공포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급하지 않게 진행된다. 갑자기 등장하는 폭풍과도 같은 알레그로가 개입되면서 사악한 무리들의 겁탈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음악은 다시 온화하고 다정한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청중에게 묻는다. 우리는 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는가? 다시 등장하는 악마의 무리들이 공격을 시작하고 그 폭력성은 절정에 이른다. 우리의 영웅은 갈가리 찢겨져서 없어지고, 그가 만일 사악한 무리들이 없는 세상에서 살았다면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았을까를 말해주는 진혼곡의 소리가 들려오게 된다.
제2악장: 알레그레토
당대의 평론가들은 이 악장이 말러 풍의 왈츠와 유사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말러는 그의 음악적 전통에 충실한 렌틀러였겠지만 아버지의 음악은 절대로 왈츠가 아니다. 그렇다면 2악장은 영혼이 없는 사악한 무리들의 강한 폭력이고 파괴를 일삼는 기계적 인간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바이올린 솔로의 등장은 이러한 무리의 군화에 짓밟혀 신음하는 어린아이들의 절규이다. 플루트가 바이올린 솔로의 패시지를 다시 연주하면서 그 절박함은 다시금 강조된다. 사악한 무리들의 행진이 다시금 시작되면서 악장은 결국 악한 무리들의 승리를 암시하며 끝나게 된다.
제3악장: 라르고
5번 교향곡의 3악장은 실로 아버지의 모든 교향곡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수려한 멜로디의 작품이다. 아버지는 여러 목소리를 한꺼번에 표현하려는 의도로 바이올린을 3개의 파트로 나누기도 했다. 주인공은 집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내일이면 강제 노동수용소로 끌려갈 한 남자일 수도 있고 내일이면 처형당할 불쌍한 영혼일 수도 있다. 마지막 밤을 집에서 보내는 남자 곁에는 아이의 숨소리가 들리고 아내의 따뜻함도 느껴진다. 그러나 그는 울지 않는다. 대신 그 남자는 깊은 원망을 갖는다. 왜 내가 희생을 당해야만 하는가! 아버지는 절대로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등장하는 첼로 독주는 청중의 가슴을 적시고 악장의 클라이맥스를 지나서 영웅의 격한 감정은 조용히 사라진다.
제4악장:알레그로 논 트로포
폭풍의 기세 속에 영웅은 승리한다. 이러한 기세등등함은 3악장과 유사한 느린 악절의 등장으로 이어지는데 조용함이라기보다는 뒤를 잇는 그 무엇에 대한 전조일 뿐이다. 전쟁을 예견하며 드럼과 저음 호른의 연주가 뒤를 잇는다. 만일 전쟁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버지를 위협하는 사악한 무리들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말한다. “너희들 마음대로 나에게 아무 것도 할 수는 없다.” 행복도 아니고 승리도 아니다. 단지 강한 인간의 의지인 것이다.
시대를 넘어 불행한 작곡가 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는 참으로 불행한 작곡가이다. 쇼스타코비치가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살았던 생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불행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쩌면 쇼스타코비치는 살아생전보다 오히려 죽고 나서 더 불행한 작곡가인지도 모르겠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들은 어떤 이데올로기와 연관을 짓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표제가 붙어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처음과 마지막 교향곡인 1번과 15번이 비교적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울 뿐, 하나같이 ‘혁명’ ‘전쟁’ 등과 같은 주제들이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소련 공산정권의 불길과 맞서 싸우는 소방관으로 희화화된 쇼스타코비치.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쇼스타코비치의 곡이라고 한다면 단연 그가 작곡한 <재즈 모음곡> 2번의 6번째 곡 ‘왈츠’일 것이다. 이 곡은 <번지 점프를 하다>와 같은 우리나라 영화뿐 아니라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작인 <아이즈 와이드 샷>에도 삽입되었고, 최근에는 국악기인 해금 연주로 편곡되기도 한 곡이다. 약간 우울한 정서를 포함하고 있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그의 간략한 전기를 담은 글들을 읽다보면 어느새 그 곡은 고뇌하고 있는 한 예술가의 슬픔이 묻어 있는 곡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한 작곡가에게 이토록 어떤 확정된 이미지가 입혀진 작곡가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것도 어떤 이념으로 말미암아 치장된 작곡가는 그것이 어떤 이념이든 간에 그의 음악이 다양하게 해석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없기에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쇼스타코비치에게만큼은 이런 현상이 더욱 심화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쇼스타코비치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작곡가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불행한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미지올로기’로 향해 가는 이 시대에서 어찌 쇼스타코비치가 불행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쇼스타코비치의 아들 막심은 한 인터뷰에서 이제 아버지의 음악이 좀 더 자유롭게 순수음악적으로 해석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쇼스타코비치가 남긴 음악에서 좀 더 다채로운 즐거움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