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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음악가 모차르트, 신앙인 아마데우스 (1) 잘츠부르크 시대

P a o l o 2012. 2. 2. 10:59

음악가 모차르트, 신앙인 아마데우스 (1) 잘츠부르크 시대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1756-1791)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Salzburg)에서 태어나 생의 절반을 보낸 후 빈(Wien)에서 후반기의 삶을 보냈다. 그의 작곡 활동 또한 두 도시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잘츠부르크는 알프스 산록에 위치한 유서깊은 지방도시이다. 수도인 '빈'에서 서쪽으로 300킬로미터 떨어 독일 접경지역에 놓여진 이 도시는 '빈'지역과는 별도의 문화권을 형성하며 18세기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도시와 교류하며 발전하였다.

 

 잘츠부르크의 역사는 루페르토(Ruperto) 성인이 이룩한 8세기의 도시 재건으로 시작된다. 당시 바바리아(Bavaria)지방의 통치자였던 테오도르(Theodor)국왕은 루페르토를 대주교(Archbishop)에 위촉하였는데, 대주교는 로마의 옛 도시 유바붐(Juvavum)의 강변 터에 그의 예배당(Basilica)를 짓고 취락을 크게 일으켜 잘츠부르크라 명명하였다. "소금의 성(Salt Castle)"이라는 뜻의 이 도시는 잘차흐(Salzach) 강을 통해 소금을 채굴해 수송하던 내력을 담고 있다. 이 도시는 명목상으로 바바리아 공국에 속해 있었지만 14세기에 도시 일대 25 평방 마일을 로마 교황청이 직할한 이후로 대주교의 독자적 통치권에 속하였는데, 오늘날에도 잘츠부르크 대교구(Salisburgensis)는 오스트리아 대교구와는 별도로 교황청의 직접 관할을 받고 있다. 현재 대교구직을 맡은 이는 살레지오 수도원장인 알로이스 코트가세르(Alois Kothgasser)로 2002년에 착좌(着座)하였다.

 

 18세기경 '잘츠부르크'의 위치와 도시풍경(목판화)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 시의 게트라이데(Getreide)거리에서 태어나 이튿날 성 루페르토 대성당(St.Ruperto Kathedrale)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세례명은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테오필루스(Joannes Chrysostomus Theophilus)였다. 

 

모차르트의 생가

                                                요한 금구 성인

                                    

               잘츠부르크 시가지 전경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초대교회에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를 지냈던 성직자인데, 속칭 '요한 금구(金口)'라고 하여 대중 앞에서 강연을 능숙하게 잘 한 성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모차르트의 또 다른 세례명은 Theophilus(테오필루스)인데, 이는 루카(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 서문에 등장하는 인물(또는 상징)으로, 희랍어로 "신이 사랑하는 이", 혹은 "신의 사랑", "신의 사랑을 위하여"라는 뜻이며 이를 라틴어로 바꾸면 Amadeus(아마데우스), 독일어로는 Gottlieb(고트리프)가 된다. 기독교의 추상적인 신앙 덕목을 뜻하는 이 세례명은 모차르트의 대부이자 후견인인 부유한 상인 테오필루스 페르그마이어(Joannes Theophilus Pergmayr)의 이름을 딴 것이다.

 

 후일 모차르트는 테오필루스라는 말보다 아마데우스라는 말을 자신의 이름에 즐겨 사용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모차르트의 풀네임(full name)은 "Wolfgang Amadeus Mozart". 혹은 "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로 불리어진다. 세례명 아마데우스의 의미대로, 그는 당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가장 사랑받는 음악가요, '음악 그 자체'로 칭송받고 있다.

 

 

모차르트의 세례증명서, 왼쪽에서 두 번째 칸에 그의 세례명이 씌여 있다.

 

 모차르트의 부모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고 그들의 자녀를 종교에로 귀의하게 하였다. 미사참례도 규칙적으로 하고 고해도 자주 바쳤다.

 그의 아버지 레오폴드(Leopold Mozart:1719-1787)는 아들에게 종교 계율을 엄하게 지킬 것을 당부하였다. 연주 여행이 잦던 1777년, 그는 그의 아내와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기기도 하였다.

 

 "볼프강이 고해성사를 거르지 않는지 나에게 알려주길 바라오. 신(神)이야말로 첫 번째가 되어야 하오! 신의 손으로부터 우리는 잠시동안의 행복을 받은 것일 뿐이며, 우리는 동시에 영원한 구원을 생각해야만 하오, 젊은이들은 이러한 것들을 잘 생각하지 않는다고 나는 알고 있소, 왜냐하면 나 또한 한 때 젊은이였기 때문이오. 나는 젊은 시절 어리석은 잘못을 저질렀으나, 신의 도움으로 인해, 나는 항상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소. 나는 원죄의 상황에서 죽음을 맞는 모든 위험들을 경계하였고, 나의 명예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소."

 

  로마 여행 시절인 1770년 4월 11일, 어린 모차르트는 교황청을 방문하게 되었다. 교황청 본관인 시스티나 대성당(Cappella Sistina)을 찾았을 때 성가대에서 울려퍼진 알레그리(Gregorio Allegri:1582-1652)의 <참회시편:Confessore>을 듣고 나서 단번에 그 복잡한 다성음악의 악보를 베꼈던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당시 <참회시편>은 아침기도 때에 속죄를 위해 바치는 시편송으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Miserere mei Deus)"라는 다윗의 참회시편(시편 50)을 두 그룹의 합창단이 네 개의 성부(聲部)로 교창(交唱)하는 성가곡이었다. 알레그리는 이 시편악보를 177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드(Leopold) 1세에게 헌정하였고, 그 이후 어느 누구도 그 악보를 구하지 못하여 신비로운 악곡으로 남겨 졌었다. 오직 신도들이 성주간 기간에 시스티나 대성당을 방문하여야 들을 수 있도록 '엄격하게(de rigeur)' 관리되었던 이 악곡을 불과 14살이었던 모차르트가 성(聖) 수요일(수난주간 수요일) 아침에 이 대성당을 찾아가 감상한 후 오직 기억력에 의존해 악보로 복원해 낸 것이었다.

 

     알레그리의 초상

                                                                1777년 당시 모차르트의 초상화 

                              

 

    모차르트는 이 해 7월 4일, 교황 클레멘트(Clement) 14세로부터 기사 명예기사의 형태인 '황금 박차(拍車) 훈장'을 수여 받았다. 당시 교황은 그를 치하하면서 모차르트가 이전에 저질렀던 원죄와 파문(破門)에 해당하는 과오를 말끔히 탕감하는 특사(特赦)를 베풀어 주었다. 물론 순수한 영혼이었던 그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볼로나(Bologna)의 모차르트'로 알려진 1777년의 그의 초상에 그가 받은 훈장이 가슴에 걸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동(神童) 대우를 받으며 해외 연주여행을 다녔던 초년시절을 지낸 후 청년 모차르트는 17세 때인 1773년 3월 3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잘츠부르크 대주교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Hieronymus Colloredo:1732-1812) 추기경의 궁정악장이 되었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슈라텐바흐(Schlatenbach) 대주교의 후임으로 1772년 3월 14일 잘츠부르크에 와 있었다.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드(Leopold Mozart:1719-1787)가 잘츠부르크 대주교 관현악단의 악장(Kapellmeister)였으며 작곡가였기 때문에 그 직책을 계승할 수 있었다.

 

콜로레도 추기경의 초상

 

 콜로레도 추기경은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였던 요세프(Joseph) 2세와 더불어 로마 카톨릭을 프로테스탄트의 성향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한 개혁적 인물이었다. 각종 성지순례와 미신행위가 금지되었으며, 성체행렬 행사도 폐지되었고, 교회 건물을 장식하는 것도 제한하였다. 또한 전례음악에 있어서 미사곡의 분량을 줄였고 독일 찬송가를 긍정적으로 도입하였다. 이런 조치들은 격렬한 저항으로 이어져, 당시 대중들은 그를 일컬어 '루터교파 비밀당원'이라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1801년 12월에 나폴레옹(Napoleon)의 군대가 잘츠부르크에 진입했을 때 대주교는 피신하여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비록 1812년 사망할 때까지 대주교의 지위를 지켰으나 그가 시도한 교회 개혁책은 무위로 돌아갔다. 의욕적이고 다소 교조적이었던 대주교와 자유분방한 성향의 모차르트와 불화를 빚게 되었음은 이미 예고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1777년까지는 순탄하게 잘츠부르크에 머물면서 미사곡과 사교적인 작품을 많이 작곡하였으나 차차 그 고정된 직무에 불만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1777년 가을부터 1779년 여름까지 어머니와 함께 만하임(Mannheim)과 파리(Paris) 등지를 여행하면서 다른 궁정에 취직할 자리를 알아보았다.

 

 콜로레도대주교는 모차르트의 돌출적인 행동과 잦은 해외연주에 매우 못마땅하였고, 그가 창작한 미사곡 역시 그의 전례관(典禮觀)에 맞지 않았다. 대주교는 모차르트와 숱한 논쟁을 벌였으며, 1780년 말 뮌헨(M nchen) 궁정으로부터 의뢰받은 오페라 <이도메네오:Idomeneo>의 상연을 위해 잘츠부르크를 떠난 것이 계기가 되어 결국 그 천재 작곡가를 해임시켰다. 모차르트로서는 얼마 안 되는 급료를 받고 대주교에 귀속되느니 스스로 의뢰를 받아 작곡을 하여 인정을 받는 생활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대주교는 모차르트를 단순한 하인의 신분으로 다루었을 뿐이었다. 그뿐 아니라 빈의 마리아 툰(Maria Wilhelmine Thun-Hohenstein:1744-1800) 백작부인이 의뢰한 황제 앞에서의 연주는 그의 일년 치 급료의 반이나 되었는데 이를 추기경이 가로막는 사건이 터졌다. 결국 모차르트는 빈의 자유로운 연주와 작곡생활을 위해 단호하게 추기경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추기경이 모차르트를 내치며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Mai er verlassen, ich brauche ihn nicht!(그를 놓아주리라, 나는 그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아버지 레오폴드는 계속 잘츠부르크에 남아 있으면서 아들이 악장의 지위를 그만 둔 것에 대해 서운하게 생각하였다. 아버지는 모차르트가 계속 고향에 남아 있기를 원하였으나 그는 빈에서 살기로 결심하고 1781년 겨울에 잘츠부르크를 떠났다. 당시 음악가 솔로몬(Solomon)은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의 안정된 직책을 팽개치고 빈으로 떠난 것은 매우 "혁명적인 행보"였으며 그의 향후 인생여정을 크게 변화시켰다고 평하였다.

 

    '마리아 프레인 순례성당'의 왕관을 쓴 성모상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 시대 때에 작곡한 교회음악 목록은 다음과 같다.

 

 

 

 

 

 

 

                                 

 모차르트는 전 생애의 반을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에서 음악가로 봉직하였기 때문에, 교회 작품을 작곡할 기회가 많았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하는 임무는 잘츠부르크 성당과 베드로 성당에서 거행되는 미사의 음악적 행사를 위한 작품을 작곡하는 것이었다. 회중들이 미사 의식으로부터 관심을 돌리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 미사곡들은 짧고 소박해야만 했으며, 또한 텍스트도 이해하기 쉬워야만 했다. 실제로 그가 볼로냐(Bologna)에 있는 마르티니(Martini) 선생에게 보낸 1776년 9월 4일자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쓰여져 있다.

 

                                                                    잘츠부르크 주교좌 대성당 내부

 

 "우리(잘츠부르크)의 교회 음악은 이탈리아와 매우 다릅니다. 키리에(Kyrie), 글로리아(Gloria), 크레도(Credo), 교회 소나타(Sonata da Chiesa), 봉헌송(Offertory) 혹은 모테트(Motet), 상투스(Sanctus), 아뉴스 데이(Agnus Dei)를 포함하여 45분을 넘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작곡 환경 때문에 그의 잘츠부르크 시절 작곡한 열 다섯 곡의 미사곡 중 반 이상이 <미사 브레비스:Missa Brevis>이며, 대체로 대주교가 선호했던 다장조의 조성을 택하고 있다. 그의 <Missa Brevis>는 간소하고 분량이 짧은 미사곡이며, 주로 평범한 주일에 사용하도록 만들어졌다. 합창 위주로 작곡되었고 기악 반주는 최소화되었으며, 때로는 기악을 오르간이 대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박한 양식의 미사곡이라고 하여 그 가치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며, 역동적인 주제를 사용하여 유명해진 <참새 미사>는 걸작 목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며, 그가 겨우 열 두 살 때 작곡한 <고아원 미사> 또한 매우 우수한 미사곡이다.


 그의 <장엄 미사:Missa Solemnis>는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전례를 위해 작곡된 것이며, 구성과 양식이 보다 확대되고 관현악 반주가 다양하게 추가되고 있으나, 당시 실제로 미사전례에 사용되지는 않았다.

 

 <대관식 미사:Kroenungmesse, K.317>(1779)는 만하임(Mannheim)과 파리를 여행하고 잘츠부르크에 돌아온 후 작곡되었으며, 잘츠부르크에 있는 마리아 프라인(Maria Plain) 순례 성당 성모 마리아 상(像)의 대관(戴冠)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되었다. 이 작품은 오페라적인 세속 요소가 많아서 그 이전의 작품과 달리 규모가 커 종교적 경건함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으나 예술성이 뛰어나 자주 연주되고 있다.

 

 1985년 6월, 바티칸에서는 의미 있는 두 대가(大家)의 만남이 있었는데, 바로 카라얀(Herbert von Karajan:1908-1989)이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빈 소년합창단을 이끌고 <대관식 미사곡>을 연주한 것이다. 철저히 미사 전례에 입각해 연출된 이 공개미사에서 요한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II:1920-2005)는 다장조로 시작되는 글로리아의 첫 소절을 멜리스메틱(Mellismatic)하게 낭송하였다.

 

 교황 베네딕토 16세(Pope Benedict XVI)는 독일 바바리아(Bavaria)출신 성직자로, 모차르트가 활동하던 때의 잘츠부르크는 이 바바리아 공국에 속하였다. 그런 이유로 베네딕토 교황은 모차르트의 미사곡을 공식 전례곡으로 즐겨 채택하고 있다. 베네딕토 16세는 매일 두어 시간씩 모차르트의 곡들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모차르트 광(狂)이기도 하다.

 

 모차르트 미사곡의 전체적인 음악 구성은 고전시대의 호모포니(Homophony:화성음악)를 기초로 하나, 부분적으로는 바로크 시대의 대위법 양식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전체적인 구조를 보면 관현악 반주가 붙은 합창과 독창이 자유스럽게 교체되고 있다. 이 시대의 주된 흐름은 오페라의 음악적 어법과 형식을 오케스트라의 반주와 다 카포(Da capo) 아리아, 그리고 기악 반주가 붙은 레치타티보와 함께 교회 음악에 도입하는 데 있었다. 모차르트 미사곡에서는 선율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위해 단일 주제의 반복적 사용, 모방 선율 등이 의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모차르트 <대관식 미사> 악보 표지

 

 축일 부속가는 교회력에 따라 특정 축일을 기념하는 미사 성제(聖祭)가 거행될 때 그에 맞추어 부르는 시편 화답송이나 찬미가들을 말한다. 또한 미사 전례곡은 공식적인 다섯 곡의 미사곡 외에 미사 전례에서 필수적으로 불려지는 찬미가와 응송(應頌)을 말하는데, <교송>과 <층계송>은 독서 낭송 이후에, <봉헌송>은 예물 봉헌 이후에 성가대와 회중(會衆)이 서로 교창(交唱)하여 부르는 성가들이다. 모차르트가 남긴 부속가들은 단순하고 평이하여 대주교의 전례 정신에 부합되었다.

 

 모테트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를 전성기로 하여 많은 음악가들에 의해 작곡되었던 교회음악의 한 장르로서, 바로크 시대 이후 급격히 쇠퇴하였지만 고전시대 음악가 모차르트가 옛 양식을 계승하여 세 곡의 모테트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그가 작곡한 모테트들은 무반주 합창곡이 아닌, 관현악 반주가 딸린 합창곡들로서, 고전시대의 소나타와 협주곡 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여기에 이탈리아 풍의 밝고 화려한 오페라 적인 요소와 독일의 깊고 엄숙한 요소가 접목되어 있다. <God is our Refuge(주님은 나의 피난처)>는 모차르트가 지은 최초의 종교음악으로,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런던에 여행 중 작곡하여 아버지가 대필(代筆)한 곡이다. 또한 <Exsultate, Jubilate(기뻐하고,용약하라)>는 이탈리아 여행시 밀라노(Milano)에서 카스트라토 가수 베난치오 라우찌니(Vennanzio Rauzzini:1746-1810)를 위하여 작곡되어 그 곳 수도참사회교회에서 초연된 곡이다.

 

  연도(煉禱)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답창 형태의 단선율 성가로 불리어진 간구의 노래이다. 라틴어 명칭 리타니(Litany)는 그리스어 리타네이아(Litaneia:간절한 소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상장(喪葬)예절 때 망자(亡者)의 영혼 구원을 위해 주도자가 선창하고 신도들이 따라 매기는 긴 노래로, 보통 <성모 호칭기도>나 <성인 호칭기도>의 형태로 불리어진다. 모차르트는 모두 네 곡의 연도를 지었는데, 그 중에서 1776년에 작곡한 쾨헬 243번 곡은 아주 뛰어난 작품이다.

 

 성무일도(聖務日禱)는 성직자와 수도자, 혹은 신실한 평신도(平信徒)가 아침, 낮, 저녁, 밤의 매일 네 번씩 바치는 일과(日課) 기도로, 시편송을 노래하며 앞뒤에 성모찬가가 덧붙여진다. 성무일도는 주요 축일이나 성인 기념일에 보다 장엄하게 불리어지는데, 특히 저녁기도(Vesperae) 양식이 가장 번화(繁華)하다.

 

 잘츠부르크 시절 모차르트는 두 곡의 베스페레를 지었는데, 그 중에서 쾨헬 339의 <증거자 축일 장엄 저녁기도>가 특히 유명하다.


 오르간 독주를 위한 <교회 소나타>는 모차르트의 창작물 중 몇 안되는 바로크적인 유산이다. 보통 미사 전례시 층계송을 노래하는데, 이것이 17세기 이후 독일에서 간소화되어 오르간 독주의 형태로 바뀐 것이다. 후기 바로크에 이 악곡들은 장중하고 약간 느린 기악곡의 한 양식으로 변화되었는데, 모차르트의 작품들은 원래의 전례에 합당한 구도와 정신을 가지고 있다. 열 일곱 개의 곡 모두 아름답고 완성도가 높다. (계속)

 

 

첨부파일 음악가 모차르트, 신앙인 아마데우스 1.hwp


출처 : 전례음악
글쓴이 : 매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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