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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티의 연인.......Suzanne Valadon (수잔 발라동)...

P a o l o 2007. 6. 1. 10:48

 

 

Suzanne Valadon

[French Post-Impressionist Painter, 1865-1938]

 

 

 

 

 

 

 

 

 

 

Self-Portrait,1909

 

 

 

 

 

Auguste Renoir
Suzanne Valadon, c. 1885

르노와르가 그린 발라동

 

 

 

 

뚤루쥬 로트렉이 그린 발라동

 

 

 

 

 

La blanchisseuse, 1889, Toile, 93 x 75 cm

로트렉이 그린 발라동

 

 

 

 

 

The Morning After (Gueule de bois),

 Indian ink and blue chalk,

1889, 47.1 x 55.5 cm

 

 

 

 

Gueule de bois /Suzanne Valadon 1887 /

 Musée Toulouse Lautrec Albi Bildnis.

 

 

 

 

 

Image:SatiebyValadon.jpg

 

 

 

 

발라동이 그린 에릭 사티의 초상

 

 

 

 

 Portrait of Utrillo

 1925

발라동이 그린 아들 위트릴로

 

 

 

 

1865 - 프랑스의 화가 발라동

(Valadon, Suzanne, 1865~1938)

 

 

 

 

발라동의 그림 우표

 

                    

 

 

Flowers Art Print by Suzanne Valadon

Flowers by Suzanne Valadon

 

 

 

Gladioli 1927 Art Print by Suzanne Valadon

Gladioli 1927 by Suzanne Valadon

 

 

 

Bouquet of Flowers Art Print by Suzanne Valadon

Bouquet of Flowers by Suzanne Valadon

 

 

 

 

Bouquet de Roses Art Print by Suzanne Valadon

Bouquet de Roses by Suzanne Valadon

 

 

 

 

Suzanne Valadon, <i>Vase de fleurs sur une table</i>

Vase de fleurs sur une table

1929

 

 

 

 

 

Suzanne Valadon, La Ferme du Montcorin ?Irigny

La Ferme du Montcorin ?Iri

1918

 

 

 

 

 

The Blue Room. (1923).

Suzanne Valadon

 

 

 

 

 

Image:ValadonSuzanne TheBath.jpg

The Bath. (1908).

 Suzanne Valadon.

Pastel. 60x49 cm. Grenoble:

Musée des Beaux Arts

 

 

 

Bather Seated

 

1929

 

 

 

 

Suzanne Valadon, Grandmere et Enfant

Grandmere et Enfant

 

 

 

 

 

Suzanne Valadon, Toilette des Enfants dan le Jardin 

Toilette des Enfants dan le Jardin

 

 

 

 

 

 

Suzanne Valadon (1865 - 1938),

Nude to the scratched cover

 

 

 

 

 

 프랑스의 화가 발라동(Valadon, Suzanne, 1865~1938)

 

1890년경 에드가 드가는  그녀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었고 , 

그후 그녀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여

작품을 직접 구입하기도 했으며

친구처럼 지내곤 했다.

강렬하고 힘찬 인물묘사와 대담한 색채로 된 작품으로 유명하며 

1892년경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1894년경 이후에는 판화도 제작했다고 한다

 

 







로트레크<화장분> 1887~88년경, 캔버스에 유채, 56x46cm,
암스테르담,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그림 속의 여인이 되고 싶을 때 - 쉬잔 발라동


 

세상은 불공평합니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날 때부터 목구멍에 거미줄을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 생기고 건강할 뿐 아니라 온갖 재능을 다 지닌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본의 아니게 장애를 입어 사회활동 자체가 힘겨운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보람은 그 사람이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에서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에 있다고 하지요. 주어진 환경이 아무리 열악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딛고 나름의 성취를 이룬 사람을 우리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그것이 다른 어떤 이의 눈에는 미미하게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쉬잔 발라동(1865-1938)은 그녀 스스로 한 사람의 화가였지만, 화가로서보다는 몽마르트르의 여신으로서 오래 기억되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기억된 것은 출신 배경과 삶이 모두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에 싸여 있었기 때문이지요. 설령 ‘악의 꽃’처럼 여겨졌다 하더라도, 쉬잔은 쓰레기 더미 위에 핀 아름다운 꽃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술의 이름으로 자신의 자존과 영혼을 꿋꿋이 지켜낸 위대한 인간이었습니다.


본 이름이 마리 클레망틴인 쉬잔은 리모주 근방의 한 마을에서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헤어나기 어려운 빈곤 속에서 쉬잔은 10살, 11살 무렵부터 밥벌이를 위해 상점 점원 보조에서부터 공장 노동자, 그네 곡예사 따위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런 일만으로는 생계 유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이 계층의 일부 젊은 여성들이 그랬듯 쉬잔도 모델 일에 나섰습니다. 모델 수입 또한 그리 변변한 것은 못 됐으나 그래도 이런 부수입을 얻는다는 것은 가난한 젊은 여성들에게 적지 않은 행운이었습니다. 쉬잔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 가운데서도 화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모델의 한 사람으로 떠올랐습니다.


쉬잔은 그리 키가 크지 않았습니다. 1m54cm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크고 푸른 눈, 뚜렷한 눈썹 등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얼굴과 그의 누드가 지닌 뛰어난 아름다움은 화가들이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장점이었습니다. 게다가 쉬잔은 화가들의 다양한 요구에 적절히 부응할 줄 아는 모델로서의 타고난 재능이 있었습니다. 흔히 모델은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으면 되는 줄 알지만, 고정된 포즈를 통해 나름의 연기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연기력과 표현력이 요구되는 직업입니다. 쉬잔은 그런 능력이 탁월했고, 그에 따라 보수적인 아카데미 미술가들뿐 아니라 퓌비 드 샤반, 르누아르, 로트레크 같은 당시의 전위예술가 모두가 그녀를 찾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퓌비 드 샤반의 정부가 되는 등 여러 화가들과 숱한 염문을 뿌린 것은 불가피한 운명의 행로였다 하겠습니다.


‘몽마르트르의 연인’ 쉬잔의 애정 전선에 가장 심각한 먹구름이 끼었던 때는 로트레크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을 때였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로트레크와 결혼하고 싶었으나 로트레크는 결혼에 전혀 뜻이 없었지요. 좌절감을 느낀 쉬잔은 거짓 자살 소동을 벌여 그를 압박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환멸을 느낀 로트레크는 쉬잔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쉬잔이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을 얻은 것은 1896년 부유한 은행가 폴 모리스와 결혼하면서부터입니다. 1883년부터 화가들 어깨 너머로 배워 그리던 그림도 결혼 이후 다소 멀리 할 만큼 쉬잔은 한동안 일상의 행복에 푹 빠졌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도 1909년에 깨지게 되는데, 그 파국은 쉬잔의 예술을 위해서는 오히려 다행인 점도 있었습니다. 작품 제작에 몰입할 환경을 조성해 주었기 때문이지요. 특히 아들인 화가 모리스 위트릴로의 친구 앙드레 위테와의 동거는 쉬잔에게 창작의 열정을 뜨겁게 불살라 주었습니다. 위테는 그보다 무려 21살 아래였으므로 쉬잔의 행실은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을 수 없었지요. 사생아이자 알코올 중독자인 아들 위트릴로와 싸잡아 세 사람을 세인들은 ‘저주받은 삼위일체’라고 불렀습니다.


예술가로서 쉬잔의 탁월성은 모델 경험을 통해 회화 예술에 있어 누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소재보다 누드에 관심을 갖고 누드화를 많이 제작했습니다. 위테와는 서로 모델을 서주며 예술적 도움과 영감을 주고받았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널리 알려져 있듯 서양미술사에서 누드화는 성차별적인 이분법의 역사를 유지해왔습니다. ‘화가=남자=옷 입은 사람=사용자’라는 한 축과 ‘모델=여자=옷 벗은 사람=피고용인’이라는 다른 한 축이 비대칭의 이분법적 관계를 형성해온 것이지요. 모델인 쉬잔이 화가인 위테를 벌거벗겨놓고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이 관계의 역전을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쉬잔이 서양 누드화 분야의 주요 화가 가운데 최초의 여성화가로 평가받는 것은 이런 시대적 한계를 초월한 그의 성취 덕분입니다. 미술사적으로뿐 아니라 페미니즘 운동 차원에서도 중요한 선구적 발자취를 남긴 것이지요.


한때의 연인이었던 로트레크가 쉬잔을 모델로 그린 <화장분>은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인 화상 테오가 개인적인 컬렉션으로 구입해 현재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나 얼굴에 그늘이 져 있지만, 예술가다운 강인한 의지와 내적 확신 같은 것이 엿보입니다.


그림을 보면, 쉬잔은 화장을 하는 중이었던 듯합니다. 뭔가 데카당한 인상이 강하게 풍겨 나옵니다. 로트레크와 쉬잔의 근거지였던 몽마르트르는 당시 파리 밤 생활의 중심이었지요. 보헤미안들과 멋쟁이들, 화류계 사람들이 다 이곳으로 집결했습니다. 주말이면 파리의 중산층들이 몽마르트르의 카페를 찾아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렇게 몽마르트르는 성매매와 마약, 알코올 남용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사생아를 낳은(은행가 폴 모리스와 결혼하기 전에 쉬잔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들 위트릴로를 낳았습니다. 위트릴로라는 이름은 스페인 출신의 화가이자 비평가인 미구엘 위트릴로가 쉬잔의 요청에 동의해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쉬잔으로부터 로트레크가 몽마르트르의 이 어두운 그림자를 진하게 보았던 것 같습니다. 더불어 어떤 환경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꿋꿋한 영혼을 함께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일차 대전 직후 한동안 화가로서 널리 인정을 받은 쉬잔은 1938년 빈곤과 세인들의 망각 속에 뇌졸중으로 사망했습니다.


이주헌

에릭 사티 그노시엔느

Eric Satie 1866-1925, 프랑스

1. Lent - 2. Avec etonnement  - 3. Lent

 

 


07.06.01.goan....

 

 

 

 

 

 

 

 

 

 

 

 

 

 

 

 

 

출처 : 아트힐
글쓴이 : goanfl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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