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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ctor Berlioz(1803∼1869 )베를리오즈
-연가곡 "여름 밤(Les nuits d'ete)-
Op. 7-I Villanelle 牧歌-Sop.Eleanor Steber and Dame Janet Baker(Mezzo-sop.) |
Berlioz and Paganini
Eleanot Steber, Soprano.....2' 50"
Columbia Symphony Orchestra
Con. by Dimitri Mitropoulos..... January 21, 1954
The Historical, Best Recor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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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곡 Villanelle 목가(19행의 전원시)
Hector Berlioz(1803∼1869 )-베를리오즈/연가곡 "여름 밤(Nuits d'ete) Op. 7-I Villanelle 牧歌-
Quand viendra la saison nouvelle, 새로운 계절이 돌아왔을 때 Quand auront disparu les froids, 추위가 사라져갔을 때 Tous les deux nous irons, ma belle, 우리 단둘이서 가자꾸나 나의 아름다운 이여, Pour cueillir le muguet aux bois. 숲의 은방울꽃을 따기 위해 Sous nos pieds egrenant les perles, 우리의 발 밑에선 진주를 채취한다 Que l'on voit au matin trembler. 아침에 전율하는 진주를 Nous irons ecouter les merles, 우리는 티티새를 들으러 가자꾸나, Nous irons ecouter les merles, sifler; 우리 지저귀는 티티새를 들으러 가자꾸나 Le printemps est venu, ma belle; 봄이 왔소 나의 아름다운 이여 C'est le mois des amants benis; 축복받은 연인들의 달이 왔소 Et l'oiseau satinant son aile, 그리고 새틴같은 날개를 가진 새는 Dit des vers au rebord du nid. 자신의 시를 둥지 가장자리에서 읊는다 Oh! Viens donc sur ce banc de mousse 오 오려므나 이끼낀 이 벤치로 Pour parler de nos beaux amours, 우리의 아름다운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 Et dis-moi de ta voix si douce, 리고 내게 말해주렴 매우 달콤한 너의 목소리로 Toujours! 언제까지나! Loin, bien loin, egarant nos courses, 먼 아주 먼 곳에서 우리의 먹을 것을 찾아 헤맬때 Faisons fuir le lapin cache, 숨었던 토끼는 도망갈 것이며 Et le daim, au miroir des sources, 그리고 사슴은 거울같은 샘물가에서 Admirant son grand bois penche; 자신의 커다란 굽은 뿔을 감탄할 것이며; Puis chez nous, tout heureux, tout aises, 그리고 우리의 보금자리로 매우 행복하고 매우 넉넉하게 En paniers, enlacant nos doigts, 바구니 속에, 우리의 손을 꼭잡고 Revenons, rapportant des fraises des bois. 산딸기를 담아 돌아 오자꾸나
<제1곡 목가> 전원시의 운율과 향기를 담은 곡으로 봄이 찾아온 기쁨을 연인과 함께 노래하는 사랑의 찬가이다. 즐겁고 가벼운 느낌을 섬세한 오케스트레이션 속에서 표현한다.
( Web-site, 다음 카페에서 모셔온 글임)
Hector Berlioz의 6곡으로된 연가곡 Les Nuit d'ete(여름 밤) 에 대하여
Hector Berlioz(1803-1869) 는 약 50 여 곡의 프랑스 가곡을 작곡하였는데
프랑스의 예술가곡( French Melodie)을 이룩하는데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작곡가로 평가한다.
당시 유행하던 Romance Style의 작곡 기법으로 부터 탈피하여, 유절가곡 형식을 지양하며 가사와 멜로디의 긴밀한 통합을 꾀하려r고 하였다. 다양한 화성을 사용하여 음악에 색채감을 불어 넣었다. 반주가 로망스에서 처럼 멜로디의 오직 수종자로서가 아니라, 멜로디를 주고 받기도 하고 묘사적인 표현도 하면서 멜로디와 반주와 관계를 예술 가곡의 이상으로 까지 향상 발전 시켰다.그리고 시를 음악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서 깊은 감각적인 표현을 통하여 환상의 세계를 펼쳐보였다.
그의 대표 가곡 작품이기도 하며 프랑스 예술 가곡의 효시라고 일컫는 6곡으로된 연가곡 Les Nuit d'ete(여름 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1841년에 작곡 되고 출판된 이 노래들은 원래 피아노 반주로 작곡되었고 각 곡 간의 특별한 연결의 의미는 없다. 1856년 오케스트라로 재 편곡하면서 각 곡에 적합한 목소리 타잎을 설정하였다. 즉 No. 1 4, 6 : 소프라노, No.2: Mezzo-Soprarano or Alto, No.3;Baritone, No.5; Tenor 음성에 맞게 재 편성하였다. 소리의 색채감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현재는 주로 Soprano와 Mezzo-Soprano들이 즐겨 부르고 있다.
항상 진정한 예술 가곡이란 문제가 대두되면 슈베르트가곡과 비교하곤 한다. 프랑스 예술가곡도 진정한 좁은 의미의 슈베르트의 가곡과 견줄만한 French Melodie는 Gabriel Faure의 가곡을 말한다.
그러나 슈베르트 이전의 모짜르트나 베토벤의 중요한 몇 개의 가곡들처럼 이 베를리오즈의 연가곡 '여름밤'이야말로 프랑스 예술가곡을 탄생시킨 산파로서 귀중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넓은 의미의 프랑스 예술 가곡은 베를리오즈에서 플랭까지)
그리고 덧붙여 프랑스 예술가곡을 감상하고 공부함에있어서 포레의 가곡 부터 공부하면 너무 어렵다.
물론 제 2-3 외국어인들에게 프랑스어 자체가 어렵다.또한 프랑스의 고전주의, 자연주의 자매예술의 이해없이 곧 바로 인상주의 음악과 예술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갭이 크고 어렵다. 다소 예술성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Berlioz와 거의 동 시대 Romance 작곡가들, 이를 테면 Gounod, Bizet, Frank 등의 주요 작품을 섭렵한 후에 포레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이런 면에서도 이 ' Les Nuits d'ete'는 프랑스 초기 가곡의 맛과 멋을 파악하며 만끽하기에 충분하리라 믿는다. 아마도 그 이상이리라.
2007년 3월 13일
Only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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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를 구합니다. 프랑스어는 악센트 표시를 정확히 해야하는데
아직 마스터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글 부터는 꼭 마스터해서 올려 보겠습니다.
시인,고티에[Theophile Gautier]에 관하여
고티에[Theophile Gautier]
본문
별칭은 착한 테오(Le Bon Théo).
1811. 8. 31 프랑스 타르브~1872. 10. 23 뇌이쉬르센.
프랑스의 시인·소설가·비평가·저널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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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티에, Jean-Baptiste Clesinger가 검은 크레용으로 그린 초상화(1853), Musee ... | 프랑스 문학의 감수성이 초기 낭만주의 시대에서 19세기말의 탐미주의와 자연주의로 바뀌던 시절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파리에서 주로 살았고 샤를마뉴 중학에서 제라르 드 네르발을 만나 평생 우정을 맺었다. 원래는 그림을 공부했지만, 얼마 후 자신의 참된 소망은 시를 쓰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낭만주의 운동에 공감하여, 빅토르 위고의 희곡 〈에르나니 Hernani〉가 1830년에 파리에서 처음 공연된 뒤에 일어난 문화적 투쟁에 가담했다. 〈낭만주의의 역사 Histoire du romantisme〉(1874)와 〈당대의 초상화들 Portraits contemporains〉(1874)이라는 책에서 이 시대를 익살스럽게 회상하였는데, 특히 〈당대의 초상화들〉에서는 친구인 오노레드 발자크를 잘 묘사했다. 〈청년 프랑스 Les Jeunes-France〉(1833)에서는 자신을 비롯한 낭만주의자들의 지나친 행동을 풍자했다. 〈괴짜들 Les Grotesques〉(1834~36)은 낭만주의 작가들보다 먼저 개인주의를 제창한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에 대한 책이다.
고티에의 최초의 시들은 1830년에 발표되었고, 마법사의 손아귀에 들어간 젊은 화가를 이야기체로 묘사한 장시(長詩) 〈알베르튀스 Albertus〉는 1832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낭만주의의 신조에 등을 돌리고 예술을 위한 예술(예술지상주의)의 옹호자가 되었다. 〈알베르튀스〉에 붙인 서문과 소설 〈모팽 양 Mademoiselle de Maupin〉(1835)은 그의 견해를 표현하고 있는데, 전통윤리를 무시하고 아름다운 것만이 최고라고 주장해 문단에 상당한 물의를 일으켰다.
1840년 고티에는 5개월 동안 스페인을 방문했는데, 여행중에 그 지방과 사람들에게 받은 인상을 시집 〈스페인 España〉(1845)에 실린 그의 가장 훌륭한 시 몇 편과 〈스페인 여행 Voyage en España〉(1845)이라는 산문에 썼다. 자신과 2명의 정부(情婦) 및 3명의 자식, 2명의 누이까지 부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언론계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스페인 여행이 끝난 뒤 그는 여행이 직장의 끊임없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고마운 탈출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1836~55년 〈프레스 La Presse〉지와 〈모니퇴르 위니베르셀 Le Moniteur Universel〉지에 1주일에 1번씩 기고했고, 1851년에는 〈르뷔 드 파리 Revue de Paris〉의 편집장이었으며, 1856년에는 〈아르티스트 L’Artiste〉지의 편집장으로 일했다. 그밖에도 여러 정기간행물과 신문에 많은 글을 기고했다. 고티에는 자신의 생활형편을 자주 한탄하곤 했는데, 언론활동 때문에 시를 위한 창조적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행, 특히 그리스 여행은 고전시대의 예술형태를 숭배하는 그의 예술론을 더욱 강화해주었다. 그는 예술이 비개인적이어야 하며 도덕적 교훈을 가르치는 의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예술가는 오로지 형태의 완성을 달성하는 것에만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티에는 시에서 스스로 '치환예술'(transposition art)이라고 부른 기법을 개발하여, 그림이나 다른 예술 작품에서 느낀 정확한 인상을 기록했다. 〈에나멜과 카메오 Émaux et camées〉(1852)라는 책에 발표된 이 시들은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에 속한다. 이 책은 테오도르 드 방빌과 르콩트 드 릴처럼 심미안을 가진 다른 작가들에게 하나의 출발점이 되었다. 샤를 보들레르는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의 헌사를 고티에에게 바침으로써 경의를 표했다.
고티에의 시적이고 환상적인 상상력은 고대 폼페이나 이집트를 환기시키는 초자연적 이야기인 〈죽은 연인 아바타르 La Mort amoureuse, Avatar〉(1857)라는 소설에서도 돋보인다. 그는 수많은 글을 썼지만 미술 평론과 연극 비평만이 그의 평판을 지켜주었는데, 이것의 일부는 〈유럽의 미술 Les Beaux-Arts en Europe〉(1855)과 6권으로 된 〈프랑스 연극 25년간의 역사 Histoire de l’art dramatique en France depuis vingt-cinq ans〉(1858~59)에 재수록되었다. 발레 비평가로서는 지금도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는 희곡에도 손을 댔고, 베르누아 드 생조르주와 함께 인기있는 발레 〈지젤 Giselle〉도 썼다.
동시대를 살았고 그에 못지않게 유명한 문인 플로베르, 생트 뵈브, 공쿠르 형제, 방빌, 보들레르 등의 존경을 받았다. 만년에 마틸드 공작부인의 친구가 되었는데, 공작부인은 그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도서관 사서라는 한가로운 직책을 주었다.(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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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필 고티에
테오필 고티에Theophile Gautier(1811-1872)는 소위 '예술을 위한 예술'의 주창자로 유명하다. 시인으로서는 처음에 낭만파의 색채가 농후했으나 차츰 감정의 시가에서 벗어나 지적이며 냉철한 파르나스파의 시가 넘어가는 과도기를 이룬다.
그는 프랑스 서쪽 국경 지대, 피레네 지방의 타르브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와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루이 르 그랑 중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후에 샤를마뉴 중고등학교로 옮겼는데 여기서 제라르 드 네르발을 만나 친교를 맺는다. 젊은 시절, 빨간 조끼의 시인 고티에는 동창생 네르발과 젊은 화가, 시인들을 규합하여 전투적인 낭만파를 조직, 빅토르 위고의 깃발 아래 고전파 공격에 앞장섰다. 1830년 위고의 연극 <에르나니> 상연 첫날 밤에는 빨간 공단 조끼에 녹색 바지를 받쳐 입고 긴 머리에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위고 편에 서서 소위 <에르나니>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일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 일은 당시의 고전파 인사들과 귀현신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데 충분했다.
이때부터 그는 그림을 버리고 문학, 특히 시에 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신문사에 들어가 예술과 연극 비평가로 기사, 잡문, 논설, 신문 단편 소설 등을 썼는데 여가를 내어 시도 썼다. 1830년에 발표한 첫 시집 <포에지>를 비롯하여 <알베르튀스>, <죽음의 희극>, <스페인>, 그리고 그의 대표 시집으로 <칠보와 옥성> 등이 있다. 형태와 색채를 즐기는 그는 또한 여행을 좋아하여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러시아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이를 주제로 한 많은 풍물기와 시들을 썼다. 특히 이베리아 반도의 거칠고 햇빛으로 가득 찬 풍경과 스페인 화가들의 그림을 주제로 한 시들은 아름다운 소품들이다.
그는 원래 화가가 되려다 문학으로 옮긴만큼 시에서 시각을 중요시한 이미지스트이며 자연미보다 인공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시인의 본질이라고 생각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시를 이루는 말과 형태를 깎고 다듬어 완성된 조형미를 만들어내는 데 전력을 다했다. 자기의 역작이며 중심 작품의 이름을 <칠보와 옥석>이라고 붙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마치 금은 보석의 세공사와도 같이 작은 형상을 아름답게 갈고 다듬어 완전한 형태를 만드는 데 그의 노력을 바쳤다. 따라서 문학사에 있어 그의 공적은 낭만파의 조잡한 자연 묘사느 무절제한 감정 토로에서 벗어나 시가의 미에 인공적 미를 가하고 아름다운 형태미를 창조하는 역할을 한 데 있다.
또한 그는 문학에서 예술 이외의 모든 것 즉 사상이나 정치, 도덕, 철학, 그밖의 모든 유용성을 배격한 예술을 위한 예술의 주창자로 나섰다. "아무것에도 쓰일 수 없는 것만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유익한 모든 것은 추하다"라고 선언했다. 이 주장의 정당성은 차치하고라도 그의 이론과 실천은 의외로 많은 예술가와 문인의 호응을 받았고 또 보들레르, 방빌, 플로베르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보다 10살 아래인 보들레르는 이 이론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보들레르가 그의 유일한 시집 <악의 꽃>을 고티에 선생에게 바치고 그 헌사에서 그를 '완전 무결하 ㄴ시인', '프랑스 문학의 마술사'라고 부른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나폴레옹 3세 제정시 고티에는 관보의 편집 책임자로 임명되고 생활도 나아졌으나 1870년 보불 전쟁과 뒤이은 파리 코뮌의 충격으로 1872년 파리 근교에서 급서했다. ( Laian님이 쓴 글)
Hector Berlioz(1803∼1869 )-베를리오즈/연가곡 "여름 밤(Nuits d'ete) Op. 7-I Villanelle 牧歌-
CD-Available-Dame Janet Baker(Mezzo).....2' 15"
New Philharmonia Orcherstra
Sir Jhon Barbirolli
Lond don Abbey Road Studio No.1 in 1967
EMI Studio CDM 76954 2
-Dame Janet Baker(Mezzo)-
Video in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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