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로로 길쭉한 그림, 그 안에 소녀와 기사, 그리고 두 명의 젊은이가 그려져 있다. 구석구석 꼼꼼하고 정밀하게 묘사돼 꽤 공들여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경직돼 보이지 않고 화사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주어 보는 이의 망막을 충만한 시각적 즐거움으로 물들인다.
그림의 내용은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의 민요를 토대로 한 것인데, 그 주제는 사랑의 힘이 바꿔 놓은 인간의 운명정도가 되겠다. 옛날 아프리카에 코페투아라는 왕이 있었다. 그는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어서 주변의 걱정을 샀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운명의 순간은 있는 법, 어느 날 왕은 거리를 지나가던 어여쁜 거지 소녀를 보게 됐다. 순수한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코페투아, 마침내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조용한 궁궐에는 엄청난 평지풍파가 일어났다. 왕이 거지 소녀와 연을 맺는다니...
결국 코페투아는 사랑을 택할것이냐, 권력과 부를 택할것이냐 양자택일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코페투아는 거지소녀를 택했다. 젊은 시절부터 이 주제에 매료되었던 번 존스는 그 사랑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예술가로서의 모든 재능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과도하리만치 공들여 그려진 이 그림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청순한 소녀의 모습이다. 그 위치가 화면 중앙이어서이기도 하거니와 그녀만의 투명한 살빛이 다른 부분들과 명료히 대비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맑은 얼굴과 영롱한 눈빛,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입술은 그만큼 낭만적으로 다가오고, 빛이 떨어지는 하얀 어깨와 발등은 흰 눈처럼 빛난다. 상반신과 하반 신을 살짝 비튼 포즈도 그렇고, 그로 인해 리드미컬하게 돌아간 발가락은 지금 소녀의 마음이 얼마나 섬세하게 떨리고 있는지 잘 전해준다.
그런 그녀를 명상하듯 바라보는 코페투아 왕은 반대로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무사의 갑옷이 자아내는 권위와 무게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짙은 얼굴과 그 얼굴에 담긴 고뇌가 그를 어둠으로 몰아간다. 지금 그가 왕관을 벗어 손에 들고 있다는 것은 소녀에 대한 경의의 표시임과 더불어, 그가 버릴 부와 영광의 상징이다. 벗겨진 왕관은 소녀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아네모네 꽃과 대비되는데, 아네모네는 '거부된 사랑'을 뜻한다. 이제 코페투아가 왕관은 버리면 지금껏 사람들로부터 거부되어 온 소녀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한 남자에게 영원히 받아들여질 것이다.
왕의 고뇌도 끝나고 두 사람은 밝은 빛 아래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누릴 것이다. 이 순수한 사랑과 행복이 부러워셔였을까. 화가는 거지 소녀에게 자신의 아내 조지아나의 모습을 입히고 코페투아 왕에게는 다소 변형되기는 했으나 자신의 모습을 입혔다. 은근히 개인적인 사랑의 희구를, 사랑의 세레나데를 읊은 그림이다.
번 존스가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까지 순수한 사춘기적 감상을 담은 그림을 선호한 데는 무엇보다 그의 성장기 환경이 큰 영향을 미쳤다. 둘째로 태어났지만 먼저 태어난 누나가 일찍 사망한 데다 어머니마저 그를 낳은지 6일 만에 세상을 떠나 그는 외롭게 성장했다. 아버지는 늘 비애감에 차있는 사람이어서 아들의 외로움을 달래줄 여유가 없었다. 자연히 내향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 그는 일찍부터 독서와 그림에 빠져들었고, 특히 중세의 낭만적 문학에 깊이 심취했다. 이로 인해 그의 그림에서는 한결같이 짙은 문학적 향기가 피어오른다. 그 대표적인 사례인 이 작품은 문학과 회화가 온전한 결합을 이룬 작품으로, 바로 그것에 기대 빅토리아 시대 미술의 전형적인 특징의 하나로 생생히 드러낸다. 그것은 문학적 호화이다. 번 존스가 대표하듯 빅토리아 시대의 회화는 안료로 그린 문학, 그것도 매우 낭만적인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이주헌의 <명화는 이렇게 속삭인다>
그대 음성에 내 마음은 열리고
♬ Mon coeur s'ouvre a ta voix - Samson et Dalila (Saint-Saens)
- Olga Borodina (with Jose Cura)
The King and the Beggar-maid
Oil on canvas
출처 : 아트힐
글쓴이 : 프레지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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