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휘 [conduct]

[스크랩] 폰 카라얀 지휘자의 음악세계

P a o l o 2019. 2. 26. 21:17


폰 카라얀 지휘자의 음악세

< Ich bin ich. Herbert von Karajan ! >


Herbert von Karajan

- 1908년 4월 5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 1989년 7월 16일, 오스트리아 Anif


Herbert von Karajan (1908.4.5.- 1989.7.16.)

어릴 적 본명은 헤리베르트 리터 폰 카라얀(Heribert Ritter von Karajan)은 오스트리아의 지휘자이다. 그는 배를린 필하모닉에서 35년 동안 상임지휘자였다.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35년 동안 상임지휘자였다. 그는 20세기 전후 시기에 가장 유명한 지휘자 중의

명이며, 세계에서 가장 음반 녹음을 많이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1929년 울름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해 막스 라인하르트가 주최한 의음악을 지휘했다. 그 뒤 나치시절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에 가입하여 프랑스 정복, 오스트리아 합병 등 여러 행진곡을 지휘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월터 레그에 의해 복직하여, 1955년부터 1989년까지 베를린 필하모닉의 종신 지휘자로 지냈다. 1967년부터 1989년까지 잘츠부르크 음악제 음악 감독을 지내다가 1980년대 베를린 필하모닉과 사이가 좋지 않아 빈 필하모닉과 협연을 했다. 1989년 심장마비로 쓰러져 잘츠부르크에 묻혔다.



Herbert von Karajan (1908.4.5.- 1989.7.16.)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그리스계의 중상류 잘츠부르크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인 게오르크 요하네스 카라야니스(Γεώργιος Ιωάννης Καραγιάννης)는 코자니(Κοζάνη)에서 태어나서 1767년 빈으로 이주하여, 최종적으로 작센 주의 켐니츠(Chemnitz)에 정착하였다.

그와 그의 형제는 작센의 의류 사업 설립에 뛰어들었고, 둘은 공로로 1792년 6월 1일 작센 선제후국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선제후(훗날 작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국왕이 됨)에 의해 귀족이 되었다. 카라야니스라는 성은 카라얀이 되었고, 성에 귀족을 뜻하는 ‘폰(von)’이 붙게 되었다.

1933년 4월 8일에 잘츠부르크에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가입하면서 입회금을 납부하였다.(당원 번호 1.607.525) 그러나, 이 회원 자격은 1939년까지 공식적으로 유효기간이 남아있지만, 1933년 6월 이후, 오스트리아의 나치당이 적용한 금지령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1939년 뮌헨의 나치당 본부에서 오스트리아의 입회에 관한 재검토 과정에서 그 신분은 공식적으로 무효가 선언되었지만, 1933년 5월 1일에 울름에서 입회 날짜까지 소급하여 그의 현재 회원 번호는 3.430.914였다. 두 번의 당 입회 기록은 1993년 스웨덴계 독일 역사학자인 기젤라 탐센의 조사에 따르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Herbert von Karajan (1908.4.5.- 1989.7.16.)

20세기 중반을 이끈 세계적인 음악가이다.

어려서 피아노의 신동으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서 공부했고, 이후 1927년 독일 울름에서 지휘자로 데뷔했다.

1927~41년 울름과 아헨에서 지휘했고,

1938~45년 베를린 국립 오페라단을 이끌었으며,

1955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나치당원(1933~42)이었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방재판소로부터 면책받았으나, 1955년의 미국 데뷔 공연은 대중의 거부반응을 불러일으켰다.

1950년 후반부터 빈 국립 오페라(1956~64, 감독), 잘츠부르크 페스티벌(1956~60, 예술감독), 런던 필하모닉에서 활동했으며 또한 라 스칼라와 밀라노 극장의 상임지휘자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객원지휘자로도 활동했다.

1976년에는 잘츠부르크 이스터 페스티벌을 창설했고 파리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으며(1969~70), 1977년 빈 국립 오페라로 복귀했다.

그가 활동한 여러 음악 단체들 가운데서도 특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활동의 중심이 되었지만, 1983년 이후의 잦은 음악적 분쟁으로 단원들로부터 멀어졌다.

카라얀의 음악 해석은 정확성과 객관성으로 정평이 나 있으나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보다 개인적인 성향을 나타냈다.

1986년 로저 본이 저술한 전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rebert von Karajan〉이 출판되었다.




GuillaumeTell Overture

Andante - Allegro - Andantino - Allegro vivace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Ottomar Borwitzky [Cello], Berliner Philharmoniker



Dvořák: Symphony No. 9 "From the New World" / Karajan · Berliner Philharmoniker

Recorded at the Berlin Philharmonie, January 1966.




Herbert von Karajan - Dies Irae & Tuba Mirum (Verdi)



Ludwig van Beethoven: Symphony No. 9 (rehearsal) /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 Chor der Deutschen Oper Berlin · Walter Hagen-Groll, chorus master / Recorded at the Berlin Philharmonie, December 1977 / Excerpt from the documentary "Karajan - Or beauty as I see it"
The Berliner Philharmoniker's Digital Concert Hall:




Herbert von Karajan rehearsing Schumann's 4th with the Wiener Symphoniker




Sumi Jo, Cecilia Bartol and Herbert von Karajan. 1987.







Eliette Mouret (1958년–1989년),

Anna Maria Sauest (1942년–1958년),

Elmy Holgeroef (1938년–1942년)


Herbert et Eliette VON KARAJAN / Savoie- octobre 1958


Herbert von Karajan and his wife Eliette Mouret, 1970



















































“아무리 음향효과가 좋은 홀이라 할지라도, 자리마다 그 조건은 달라진다. 그 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2,000~3,000명 정도 들어가는 홀이라면, 좋은 음향효과를 만끽할 수 있는 자리의 수는 대략 200~300석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경계를 넘어가면 음질은 현격하게 떨어진다. 그러나 음반은 음악을 최고의 조건에서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음반은 한 명 한 명 모든 청중에게 지휘자가 머릿속에 그린 바로 그 음악을 들려준다.”


<불꽃의 지휘자 카라얀>, 455P. 페터 윌링(Peter Uehling), 김희상 옮김 / 21세기북스 (2009.7.7)



 

            

            

출처 : 아트힐
글쓴이 : 아목동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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