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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파데레프스키 / 미뉴엣 G 장조 ( Menuet in G major)

P a o l o 2019. 2. 26. 21:12
Ignacy Jan Paderewski, 1860 ~ 1941 Ignacy Jan Paderewski, 1860 ~ 1941
파데레프스키 / 미뉴엣G 장조
Menuet in G major
를 감상하겠습니다.

폴란드 음악가·정치가. 포드리아주 출생. 바르샤바음악원을 졸업하고 1884∼87년 빈에 유학한 뒤 유럽 각지에서 연주활동을 시작, 개성적인 피아니스트로 인기를 차지하였다. 1913년 미국으로 건너가 폴란드 독립운동에 종사, 제 1 차세계대전 중에는 조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자선음악회를 열어 미국 여론에 영향을 주었다. 그 뒤 프랑스에 머물다가 18년 독립 후 귀국해 여러 당파의 조정역할을 하였다. 19년 1월 초대 총리에 취임했지만 파리평화회의에서 동갈리치아(우크라이나인 거주지역)가 폴란드령으로 인정받지 못하자 총리직을 사임하였다. 음악가로서는 F.F. 쇼팽의 연구가로 알려졌으며 오페라 《망르(1901)》, 교향곡 B단조, 피아노곡 《미누에트 G장조》 등을 작곡하였다.

파데레프스키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피아노를 즐겨 듣는 사람이라면 그의 자그마한 미뉴에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피아니스트이자 정치가, 작곡가. 이런 명칭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무었보다도 그는 20세기의 전반에 가장 화려한 명성을 누렸던 피아노의 절대군주였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은 그가 최고가 이니라고 믿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수의 청중들은 그가 진정한 피아노의 화신이라고 믿었다. 젊은 시절의 이 폴란드 출신의 피아니스트를 만난 자리에서 위대한 스승 레세티츠키는 '지금까지 연습해 온 것의 대부분이 틀려있음'을 지적한다. 천부적인 재능과 거리가 멀었던 파데레프스키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에 몰두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1887년 빈에서의 데뷔를 필두로 1891년 드디어 야심에 찬 미국 데뷔 연주회가 이루어졌다. 스타인웨이 피아노사가 후원한 이 콘서트의 첫날은 냉냉한 청중들의 반응만을 남기고 막을 내렸다.

그날 밤 파데레프스키가 남긴 일화는 아직까지도 유명하다. 호텔에서의 늦은밤 연습은 곤란하다는 말을 듣고, 그는 단숨에 스타인웨이 피아노 공장으로 내달았다. 차가운 밤공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새변 내내 건반을 두드려댔다. 아침 10시로 잡혀 있던 리허설까지 파데레프스키가 쉬었던 시간은 불과 몇 시간 뿐이었다고 한다.

광기 어린 연습에 대한 보답은 생각보다 빨리 주어졌다. 다음 연주회에 몰려든 청중들은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를 에워싸고 아우성을 쳤다. 엄청난, 그야말로 엄청난 부와 영예가 31살의 파데레프스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그는 생애동안 약 1000만 달러를 (혹은 그 이상을) 벌어들였다. 그 수입원의 대부분이 여성 청중들의 입장료 수입에서 나온 것을 안다면 그에 대한 인기가 주로 무었에 근거하고 있었는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니까 리스트를 연상시키는 위엄있는 풍모, 무었인가 사람을 흔들리게 만드는 터치, 이런 것들이 파데레프스키의 연주를 열광으로 이끄는 요소였던 것이다.

숱한 미스터치를 범하고도 결코 부끄러워 하지 않았던 파데레프스키의 종말은 비교적 빨리 찾아왔다.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던 그에 대한 비난은 1915년을 전후해서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청중들은 그가 연주를 가졌던 마지막 날까지 열렬히 그를 성원했다. 그것은 진정 놀라운 일이었다. - http://www.kkw64.com에서 인용

Menuet in G major



Menuet in G major



Menuet in G major
Ignacy Jan Paderewski, 1860 ~ 1941



출처 : 아트힐
글쓴이 : 김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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