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영원에서 들려오는 고독이 담겨있다. 빗방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고독이며 우울이다. 침묵하는 영혼의 고요… 음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빗방울… 영혼의 진실이 아닐까?
빗방울 하면 떠오르는 음악이 아마 맹인 가수 호세 펠리치아노가 부른 ‘Rain’일 것이다.
쏟아지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여 봐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소리를 들어봐요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에 내 사랑은 더욱 강렬해져요 비는 밤새 내려도 좋을 것 같아요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이 강해지니까요 우리가 함께 있는 한 날씨야 아무려면 어때요 Listen to the pouring rain, Listes to it pour And with every drop of rain You know I love you more Let it rain all night long, Let my love for you go strong As long as we're together Who cares about the weather?
추억의 여인과 함께 끝없이 빗속을 걷고 싶게 만드는 ‘Rain’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클래식 곡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빗속의 음악이 바로 쇼팽의‘빗방울 전주곡’일 것이다. 이 곡은 쇼팽이 조르쥬 상드와의 이별을 얼마 앞두고 작곡한 곡인데, 상드가 어느날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비바람 속에서 쇼팽이 피아노를 치고 있더라는것이었다.
단조로운 음(Ab)의 연속때문에 붙여진 ‘빗방울 전주곡’은 음울한 정서가 흐르는 곡으로, 상드를 우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늘 좋은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오는 날, 궂은 날이 더 많다. 그러기에 인생을 고해요, 안개라고 했던가. 청춘은 잠깐이요, 스쳐가는 바람인 것을… 모든 것 사라지고, 지나간 것은 그리움 되나니….
비가오고, 우울한 날에는 문득 무드 음악이 듣고 싶어 지곤 한다. 마치 커피 한 잔에 띄워보는 쇼팽의 음악같은 것이라고나할까. 한없이 우울하면서도 시적인 낭만이 가득한 쇼팽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청춘의 감성… 우울 속에서도 멜랑콜릭한 차 한잔의 미학으로 위로받기도 한다.
쇼팽의 음악은 우울하면서도 도시적이다. 카페 음악으로 불리울만큼, 실내악적이며 우아하면서도 시적인 미학이 풍부하다. 피아노에 관한한 그의 음악만큼 아름다운 음악을 쓴 작곡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이야말로 광시곡처럼 분출하는, 도시인들의 외로운 감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작곡가라 하겠다.
쇼팽은 사생활에서부터 예술적 업적에 이르기까지 가장 풍부한 에피소드를 남긴 작곡가였다. 짧고도 불나비처럼 살아갔던 천재가 바로 쇼팽이었다. 특히 비극적으로 매듭지은 조르쥬 상드와의 동거(9년)는 음악사에서도 너무도 유명하다.
26세의 쇼팽은 리스트와 함께 아구 백작이라는 집에서 당시 유명한 여류 소설가 조르쥬 상드를 만났는데 남성적이었던 상드와 여성적이었던 쇼팽은 서로 한 눈에 반해 버렸다. 동거에 들어간 쇼팽은 상드와 함께 폐병치료를 위해 지중해의 마죠르카라는 섬으로 떠나고, 그곳 농가에서 작은 거처를 하나 마련하게 된다.
‘바람의 집’이라고 할만큼 바람이 거센 이 집에서 쇼팽은 그만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남국의 태양을 기대하고 왔지만 곧 장마철이 시작되었고 매일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다. 드디어 쇼팽은 악성 기관지염으로 각혈까지 하게 되어 근처 수도원으로 옮겨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마침 수도원에는 상드가 쇼핑을 나가고 없었고. 혼자 의자에 앉아 창가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던 쇼팽은 즉흥적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불세출의 피아노 작곡가였던 쇼팽은 오로지 피아노 한 악기에만 집했는 데 너무 소극적이었다고나할까, 어리석을 만큼 피아노에만 매달려 피아노의 순수성을 지켜나갔다. 슈만의 천재라는 평론에도 시큰둥했던 쇼팽은 그저 자신의 수줍은 내면 세계를 그려나가면 그만이었다. 빗방울이 한 두 방울 떨어지는 날 카페에 앉아 연인을 추억하기에 알맞는 음악… 한마디로 카페 음악으로 적격인데, 가을이면 코스모스, 봄이면 꽃향기에 젖어 인생의 시정을 노래하는 데 쇼팽만큼 알맞는 음악도 없다.
상드는 여성적이었던 쇼팽과의 성격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반했고, 커다란 예술적 자극을 안겨주었다. 상드와의 마지막 여행 중에 남긴 '빗방울 전주'곡은 음울한 단조의 연탄음이 마치 빗방울 소리를 듣는 듯 하다고 하여 상드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시인이자 작가였던 상드는 쇼팽, 뮈세 등의 애인으로도 유명하다. 10대에 결혼해서 두 아이를 두었지만 남편에게서 도망, 파리에 나와 남장을 하고 담배를 피고, 소설을 쓰며 뭇 남성들과 염문을 뿌린 자유연애주의의 상징같은 존재였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결혼, 이런 것들로 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던 페미니스트 상드는 타고난 재능, 불같은 열정으로 뭇 사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특히 쇼팽과 뮈세 등과 사귀며 이들을 유명하게 만든 장본이기도 했다.
-‘마침 비는 멎어서 처마 끝의 빗방울이 단조로운 소리를 내고 있었고…’
상드는 '빗방울 전주곡'을 처음 들었던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는 데, 왠지 울고 싶어지는 피아노의 연탄음이 어쩐지 쇼팽의 최후를 연상시키고 있다. 빗방울 전주곡을 끝으로 상드는 이후 쇼팽과 헤어진 뒤 다시는 –장례식에 조차-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마치 빗방울 전주곡이 운명의 이별곡이 되고 만 것 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