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연주되는 장소 역시 교회와 대성당을 넘어서 궁정이나 귀족의 자택 등으로 분화되었다.
르네상스 작곡가 3인방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 그림이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처럼 지금까지도 널리 향유되고 있는 르네상스 음악가를 찾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중 가장 높이 평가 받는 작곡가로는 위에 언급한 조스캥 데 프레를 꼽을 수 있다. 플랑드르 지방에서 태어나 밀라노에서 합창단원으로 활약했고 추기경 밑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고 로마 교황청 예배당에 들어가 성가를 지휘했다. 동시대 음악인들로부터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며 존경을 받았고 16세기 음악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도 “다른 작곡가들은 음에 지배당하지만 조스캥만은 음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동시대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조스캥 데 프레도 돌림노래 같은 모방 양식을 많이 사용했지만, 하나의 멜로디가 한 마디 혹은 두 마디 정도 늦게 다른 멜로디에서 나오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기법을 통해 노래가 시작하는 부분의 가사 내용을 듣는 사람들이 보다 더 잘 알아들을 수 있게 했다. 즉, 음악 자체가 명확성을 갖게 된 것이다. 조스캥에 의해서 베이스 선율과 하모니가 보다 발전하기도 했다. 수퍼리우스, 알투스, 테너, 베이서스 등 합창단의 배치는 오늘날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와 유사하며, 오늘날까지 합창단의 기본적인 구분으로 통용되고 있다. 조스캥 데프레는 밀라노에서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 밑에서 일할 때 [돈이 없는 것은]이란 샹송을 작곡했다. 또 그의 미사곡인 [라솔파레미]는 ‘밀린 급료를 달라(Lascia fare a me)'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어찌 보면 베트남 전쟁 때 밥 딜런과 조운 바에즈가 불렀던 반전 포크음악을 연상케 한다. 1501년에 프랑스 궁정에서 작곡한 [왕을 위한 노래]는 조스캥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루이 12세의 요청에 의해 만든 곡인데, 왕이 노래하는 테너 성부는 움직임이 거의 없는 멜로디로 썼다. 왕의 노래 솜씨가 그저 그랬다는 걸 요즘도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조스캥 데 프레에 이어서 알아두어야 할 르네상스 작곡가로는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팔레스트리나(1525~1594)가 있다. 팔레스트리나는 태어난 지명이고, 본명이 피에를루이지라 한다. 어릴 적부터 목소리가 아름다웠던 팔레스트리나는 12세 때 성가대에서 노래를 하다가 교황 율리우스 3세에게 발탁돼 산피에트로 대성당 줄리아 예배당의 악장으로 임명됐다. 1555년 30세때 팔레스트리나는 영예로운 교황 예배당 가수가 됐다. 그러나 2개월 뒤 율리우스 3세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서 교황이 된 마르체르스 2세도 즉위 3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은 교황 파울루스 4세는 그를 해고했는데, 이유는 성직자가 결혼을 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후 여러 교회의 악장과 음악교사를 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에 들어간 팔레스트리나는 1571년 교회 예배당으로 복귀했다. 빈의 황제를 포함한 수많은 궁정의 요청을 다 거절하고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23년간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떠나지 않았다 한다. 유유히 흐르는 듯한 멜로디와 안정된 울림을 가진 교회음악은 ‘팔레스트리나 양식’이라고 해서 이상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팔레스트리나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곡을 썼고 현재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을 그레고리오 성가에 버금가는 모범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작곡가들 가운데 카를로 제수알도(1566~1613)의 삶은 가장 드라마틱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널리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제수알도는 명문 귀족 출신이었다. 제수알도 지방의 15대 영주이며 베노사 공국의 대공이기도 했다. 그의 숙부는 카를로 보로메오 추기경이었고 어머니는 교황 비오 4세의 조카였다
이른바 교회 권력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었다. 제수알도는 차남이었기에 성직자의 길을 걸어야 했지만, 형이 사고로 급사하고 아버지도 돌아가시자 18세에 베노사 공국의 후계자가 되었다. 명문가의 혈통을 잇기 위해 20세 안팎에 결혼을 하게 됐는데, 신부는 사촌누이인 마리아 다발로스였다. 여섯 살 연상, 두 번 결혼에 자식도 있었지만 나폴리 제일의 미인이었다고 전해진다. 둘 사이에 문제는 없어 보였지만, 음악을 좋아하고 조용한 성격의 제수알도와 나폴리 궁정에서 분방하게 성장한 마리아의 성격은 사뭇 달랐다. 결혼 2년 만에 마리아는 파브리지오 카라파와 몰래 사귀기 시작했다. 1590년 10월 제수알도는 사냥을 가는 척하고 집을 나섰다가 산세베로 궁전에서 밀회를 나누는 둘을 붙잡아 죽이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시신을 궁에다가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평생 죄의식을 가지고 살았던 제수알도는 자신의 마드리갈에 격한 감정과 죄책감을 실었다. 반음계적인 급격한 화성을 지닌 느린 부분과 온음계적인 빠른 부분이 교차하는 그의 스타일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대담한 것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한 성악곡 마드리갈 마드리갈은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한 성악곡의 양식으로 다성의 세속 가곡이다. 모테트의 세속적인 측면이라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마드리갈은 라틴어로만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들로 씌어졌다. 모테트에 비해 표현의 자유도 늘어나 감상주의적인, 때로는 관능적인 것들을 주제로 다루기도 했다. 마드리갈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학자들이나 예술가들의 모임에서 연주되었고, 대중적인 음악이었으며, 현재까지 전해지는 곡의 숫자도 매우 많다. 마드리갈은 류트나 하프시코드 반주가 붙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마드리갈 양식은 루카 마렌치오같은 대표적인 작곡가들을 낳았다. 16세기 중반에 다른 나라로 퍼져나가 이 무렵에야 비로소 영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영국의 마드리갈은 멜로디가 부르기 쉽고 가사가 심각하지 않고 즐거운 면이 강조된 특성으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영국 최초의 마드리갈 작곡가 토마스 몰리의 작품 등이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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