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는 우리 시대 최고의 첼리스트 중 한 명이다. 20세기의 거장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는 미샤 마이스키에 대해 “젊은 첼리스트 중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 시적인 감성과 폭풍 같은 격정, 눈부신 기교가 조화를 이루는 연주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실제로 마이스키는 모스크바에서 수학하며 로스트로포비치를 사사했고, 1974년 미국 카네기홀에서의 첫 데뷔 이후에는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Gregor Piatigorsky)를 사사하면서 이 시대 최고의 두 거장에게 모두 가르침을 받은 유일한 첼리스트가 되었다.
‘미래의 로스트로포비치’라는 별명 미샤 마이스키는 발트 3국의 하나인 라트비아 공화국의 수도 리가에서 1948년 1월 10일 태어났다. 형제들이 모두 음악을 공부하고 있었기에 어머니는 마이스키만이라도 평범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마이스키는 음악공부보다는 뛰어놀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잠시도 한자리에 앉아있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첼로를 연주하고 싶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 모두가 놀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마이스키는 어린이 음악학교를 거쳐 1962년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진학했다. 1965년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와 함께 협연하며 데뷔한 이후 ‘미래의 로스트로포비치’라는 별명을 얻었다. 1년 후인 1966년에는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모스크바가 미샤 마이스키에게 콩쿠르 입상이나 로스트로포비치와의 만남과 같은 달콤함만을 선사한 것은 아니다. 마이스키는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반체제 운동에 관련되었을 것으로 의심을 받으면서 1970년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갇혔다. 연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마저 빼앗기고 18개월간 옥중 생활을 견뎌야 했던 그는 이때의 경험으로 이후 정신병원의 도움을 받기까지 하였다. 다행히 1972년 풀려난 마이스키는 시민권이 있는 이스라엘로 이주하면서 다시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첼로의 음유시인 루돌프 제르킨(Rudolf Serkin)으로부터 제안 받았던 말보로 음악제 초청 연주를 시작으로, 피츠버그 교향악단,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이스라엘 필하모닉 등과 협연하며 마이스키의 음악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지나치게 극대화된 비브라토 사용과 같이 지나치게 감성이나 기교에 치우친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지만, 일부는 마이스키의 음색에서 다른 어떤 연주자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낭만이 담겨있다고 극찬하기도 한다. 현재 40여장이 넘는 음반을 발매하였는데, 단연 눈에 띄는 음반은 아마도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일 것이다. 이전과 다른 연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 음반은 결국 “바흐의 서정성을 가장 효율적으로 표현한 연주”,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 음반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연주”라는 평을 받으며 바흐 모음곡의 명반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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