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orea Fantasy 안익태 / 한국환상곡 안익태(安益泰) (1905-1962)
Ahn Eaktay, Cond Los Angeles Philharmonic Orche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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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곡 연속듣기 Los Angeles Philharmonic Orchestra Conducted by Ahn, Eaktay 안익태는 1930년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서 스코틀랜드의 민요 '올드랭자인(Auld lang syne)'의 곡조에 맞춰서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처음 들었다. 당시 24세의 안익태는 일본의 구니타치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즉시 미국 유학에 올라 첫 기착지인 샌프란시스코에 체재하고 있을 때였다. 올드랭자인의 선율에 가사를 붙여서 애국가를 부르는 것에 충격을 받고 제데로된 애국가를 만들어야 겠다고 작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1936년 6월, 애국가를 완성하게 되었고 동시에 [한국 환상곡]도 완성 시켰다.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지도를 받기 위해서 유럽에 건너갔던 무렵이었다. 때마침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몇몇 한인들이 모여서 안익태가 쓴 애국가를 목이 터져라 노래하게 되는데 이것이 최초로 불리어진 애국가였다. 그리고 2년 후인 1938년, 안익태는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해서 [한국 환상곡]을 초연했다. 한국 환상곡은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그린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형식적으로는 교향시곡의 형태를 취하면서 작품의 표제를 한국의 역사, 그 속에 깃든 한민족의 고난과 영광을 테마로 삼고있는 것이다. 최강주로 연주되는 관현악의 총주(總奏)는 단군 조선의 개국을 알리는 장엄한 서주로 여겨진다. 여기에 이어지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가락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한껏 담은 것인데 여기에 보태지는 전통적인 민요 가락과 리듬이 평화롭고 순박한 한민족의 얼을 그린다. 그러나 음악은 일변해서 무겁고 침통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일본의 침략과 애국지사들의 죽음이 그려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전통 아악(雅樂)이 등장하여 분위기를 더욱 참담하게 이끈다. 그러나 이러한 비통의 역사를 누르고 애국가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해방의 환희와 감격이 표현된다.(안익태는 처음 여기까지로 곡을 완성 시켰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안익태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추가했다. 그리하여 전쟁에 희생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곡을 연주한 뒤 음악은 다시 장엄한 애국가와 만세! 만세!를 피날레로 치달아 가면서 감동적인 클라이맥스를 형성한다. 우리 민족의 수난과 영광을 함께 묘사한 안익태(1905-1965) 선생님의 대서사시 교향곡 "한국 환상곡"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한국의 민족음악을 토대로 한 서정적 부분입니다. 서두에 진동하는 관현악의 울림으로 고조선이 개국을 알리고 아름다운 조국 강산을 그리는 서정적인 멜로디가 흐르며 이어 우리의 민요 가락이 여러 가지 악기 소리와 더불어 타령조의 멜로디로 섞이면서 농민들의 춤사위가 표현됩니다. 둘째 - 일제 아래 신음하는 한반도의 암울한 모습을 묘사한 부분입니다. 무겁고 침통한 선율이 슬프게 이어집니다. 셋째 - 광복의 기쁨을 맞는 애국가의 합창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애국가의 1절부터 4절까지를 합창으로 표현했습니다. 넷째 - 6.25로 인한 처절함을 묘사한 부분입니다. 선율은 다시 슬픔으로 바뀌고 전통 아악의 정취가 울려퍼진 뒤 "무궁화 삼천리 나의 사랑아, 영광의 태극기 길이 빛나리, 금수강산 화려한 나의 사랑아"의 만세 소리와 함께 곡 전체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 클래식 음악산책
안익태(安益泰) (1905-1962) 안익태는 1905년 12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안창호, 안중근 등 애국지사를 배출한 가문으로 그 당시 중류층 가정의 셋째아들이었던 안익태는 형 익심이 선물로 사다준 바이올린을 받으면서 인생의 행로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919년 독립 운동에 연루되어 반강제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뒤 1932년에는 미국으로, 1936년에는 유럽으로 건너가 작곡가 겸 지휘자로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안익태는 1946년 7월 스페인 백작의 딸 로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하였고 그해 마요르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습니다. 그가 오랜 방랑 생활 끝에 고국 땅을 밟은 것은 1955년 이승만 대통령 탄생 80주년 기념 음악제에 초청을 받았을 때였습니다. 그후 고국에서 음악을 계속하려 했던 안익태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65년 9월 16일 바르셀로나에서 각기병과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해는 평소 그의 소망대로 1977년 7월 국립묘지로 옮겨 안장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들려드리는 "한국 환상곡"은 한국의 역사적 배경과 6.25 전쟁을 묘사한 것으로 1935년 7월 필라델피아 음악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 카네기 홀에서의 작곡 콩쿠르에 응모, 입선된 곡으로 몇 번의 수정을 거친 후 초연되었습니다. 스승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조언이 많이 포함된 교향곡 [한국 환상곡]은 해방전에는 합창 부분까지만 연주돼오다 6.25 이후 제4부를 추가시켜 현재의 곡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귀하는 훌륭한 능력과 풍부한 경험을 가진 지휘자라는 엄연한 사실을 나와 우리 벗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귀하의 탁월한 능력을 더욱 넓은 세상에 확신을 갖고 전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더구나 귀하의 그 민족음악적 작품은 대단히 가치있는 것으로 그 탁월한 솜씨를 높이 평가합니다. 그것은 또한 착실한 심포니의 연주회 곡목으로 선택된다면 반드시 흥미를 끌 것입니다. 나는 귀하의 음악예술가로서의 장래에 큰 희망을 갖습니다. 신의 가호아래 대성의 길로 매진하시기 바랍니다. - 리하르트 스르라우스" 위의 글은 후기 낭판파의 거장이라 일컬어지는 리하르트 스트라우스(Richard Strauss)가 안익태에게 준 추천장의 내용입니다. * 그는1905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안창호, 안중근 등 애국지사를 배출한 가문으로 그 당시 중류정도의 가정의 셋째 아들이었던 안익태는 형 안익심이 동경 유학 중 방학을 이용해 귀국하면서 선물로 사다 준 바이올린을 받으면서 그의 인생의 행로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정년회관(YMCA)을 발판으로 활동을 전개하면서 마침내는 미국유학을 결정하게 됩니다. 물론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아끼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후원을 받아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가서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에게 사사받고 그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역사적 배경과 6.25 전쟁을 묘사한 이 한국 환상곡은1935년 7월 필라델피아 음악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 카네기 홀에서의 작곡 콩쿠르에 응모, 입선되었던 곡으로 몇번의 수정을 거친 후 초연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에피소드 중심의 악곡 전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애국선열 추도곡 "진혼곡"은 의식이나 행사의 요소가 짙은 곡으로 장중한 느낌을 주며 교향시 "강천선악"은 아악을 바탕으로 하여 작곡한 순수 관현악으로 구사나 악상이 뛰어납니다. 그의 작품은 휄릭스 바인가르트너, 리하르트 스트라우스, 레오폴드 스토콥스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며 후기 낭만주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과 민족주의 음악에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한국 환상곡이나 이 후에 작곡되는 "애국가"는 후자의 경우로서 일생을 조국을 떠나 방랑하며 망명생활을 해야했던 음악가의 민족혼을 불어 넣어 만든 곡이라 하겠습니다. 일제 치하의 한국이라는 약소국 출신으로 세계를 방랑하며 망명 음악생활을 했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리하르트 스트라우스, 헝가리 작곡가 졸탄 코다이, 에르네스트 프릿즈 라이너, 휄릭스 바인가르트너 등의 기라성같은 음악가들에게서 작곡과 지휘를 사사받고, 푸르트뱅글러, 알프레드 카젤라, 피제티, 토스카니니, 폰 카라얀과 교유를 나누었으며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던 한국인 음악가 안익태... 유능한 지휘자로서 각국을 순회연주했는데 파리 콩세르, 런던 로열 필하모니, 로마 심포니, 베를린 필하모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일본 NHK 등 저명한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그는 스페인 백작의 딸 이었던 로리타와 결혼, 스페인 국적을 갖고 마드리드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서 활동하다 1965년에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별세했습니다.이 후로 스페인에서는 소규모이지만 안익태 추모행사가 매년 열리며 마요르카의 안익태 박물관 앞 거리는 안익태 거리로 명명되어 오늘날에도 망향의 아픔으로 민족혼을 살랐던 음악가를 기리며, 약소국 출신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음악가의 넋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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