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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보로딘 / Nocturne for String Orchestra No. 2 in D Major

P a o l o 2018. 1. 22. 11:52



보로딘 / 현악 합주를 위한 야상곡

Nocturne for String Orchestra
String Quartet No. 2 in D Major,

Aleksandr Porfiryevich Borodin 1833~1887 



  


 



 

Christophe Rody (Switzerland), cond.

Liatoshinsky Chamber Orchestra, Kiev

 

String Quartet No. 2 in D Major (III. Notturno: Andante), popularly known as Borodin's Nocturne

Joshua Bell, violin

Michael Stern, cond.

Academy of St. Martin in the Fields

 

 

 

Alrxander Porfir'yevich Borodin (1833.11.12~1887.2.27, 러시아) 

 

러시아 작곡가 . 화학자. 페테르부르크 출생.그루지아의 귀족의 사생아로 태어나 아버지의 농노(農奴)였던 프르피리 보로딘의 아들로 입적하여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났다. 어린시절 피아노와 첼로를 비롯하여 여러 악기를 배우고 9세 때에는폴카를, 13세 때에는 플루트 협주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1850~56년 페테르부르크의과대학 에서 화학과 약학을 전공하고 졸업후 병리학 교수 조수로 근무하며 1858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859년에는 화학연구를 위해 하이델베르크대학에 유학하여, 서유럽 각지의 음악 특히 낭만파음악을 접했다.


1862년 귀국하여 1864년부터 모교의 화학담당교수로 재직하면서 발라키레프를 알게 되어 작곡을 틈틈히 배우고 과학자로서의 연구활동으로 인하여 휴가 때나 병으로 누웠을 때에 틈틈히 작곡을 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발라키레프와 C.A. 큐이 , 무소르그스키 , 림스키코르사코프 등과 함께 러시아 5인조 멤바가 되어 국민음악 창조에 진력하였고, 학계에서는 여성의학교육 제도의 확립에 진력하기도 하였다. 1877년 리스트로 부터 작품에 대한 격찬을 받았으며 1880년 이후 교육계에 파급됐던 반동(反動)화 정책과 아내의 병으로 창작 활동이 줄어들고 1887년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29세 때는 발라키레프에게 작곡법을 배워 음악인으로서 보다 많은 소양을 쌓았는데 그의 권고에 따라 러시아 국민음악 건설에 적극 노력할 방침을 세웠지만 과학자로서의 교수와 연구, 여성 의학을 위한 많은 사회 활동에 분망했기 때문에 작곡은 휴가나 병으로 누웠을 때에 주로 하는 형편이었다.
그는 44세 때 그의 교향곡의 대표작이라 할만한 제2교향곡을 발표하였다. 오페라 [이고르공]도 그 당시의 작품이지만 그가 완성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카프카즈의 에메레티아(Emeretia) 국왕의 후예인 게디아노프라고 하는 구르지아의 귀족의 사생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의 농노였던 포르피리 보로딘의 아들로 입적시켜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므로 그의 음악에 있어서의 동양적 요소는 이 같은 혈통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이 중앙 아시아적인 동양적인 이성과 정취가 농후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지만, 그의 국민주의로 인해 서구 음악 형식이 다분히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보로딘은 러시아 역사의 민족적 영웅으로 제재를 구하고, 러시아와의 일체감을 위하여 동방 여러 민족의 음악을 연구하여 동방 음악의 특이한 음계, 리듬, 화성, 선율의 요소를 도입한 동방적 시정이 넘치는 음악을 창출하였다. 또한 그는 국민악파의 작곡가로서는 특이하게 실내악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하여 고전적 구성을 나타내는 서정적 현악 4중주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대표작으로는 18년간 작업하였지만 미완으로 그친 오페라 《이고르공(公)》과 교향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3곡의 교향곡과 현악 4중주곡 등이 있으며, 그의 유작은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글라주노프에 의해 완성되었다.

 

 

◆ 러시아 국민악파 5인조?

 

1850년대 말에서 70년대에 걸쳐 활약한 러시아의 작곡가·평론가 그룹. 오인조(五人組)라고도 한다. 발라키레프를 중심으로 퀴, 무소르크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보로딘 등 5인조 작곡가와 음악·문예평론가인 V.스타소프가 참여하였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오페라와 독일오페라를 비롯한 서유럽음악이 압도적이던 당시 러시아음악계에 러시아 국민음악의 확립을 목표로 하는 혁신적 세력으로 대두, 러시아 음악사상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5인의 작곡가는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창작 및 작곡원리에 따라 각자 개성적인 작품을 썼다.


그리고 글린카와 다르고미즈스키의 전통을 이어받아 러시아 국민음악을 발전, 확립시킨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사상적 배경이 된 것은 벨린스키, 체르니셰프스키 등의 당시의 민주주의 사상이었으며, 리얼리즘 예술과 시민성에 바탕을 둔 음악을 창조하는 것이 이들 활동의 근본원리였다. 이와 같은 운동의 이념적 지도자는 스타소프였다.


이 운동은 19세기 러시아 사회에 높아가던 해방사상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 일파의 작곡상 임무는 러시아민족의 전승적(傳承的) 창조를 발굴하는 데 있었는데 특히 발라키레프,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은 많은 민요의 수집과 편곡을 하였다. 다음 단계로는 국민오페라의 창작에 특별한 의욕을 보여 혁신적인 작품을 썼다. 무소르크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보로딘의 《이골공(公)》,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프스코프의 소녀》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기악곡 분야에서는 실내악곡보다는 관현악곡, 특히 표제교향곡에 중점을 두어, 보로딘은 교향곡 제2번 《용사(勇士)》로써 러시아교향곡에 하나의 새로운 타입을 창조해 놓았다. 민족정신이 넘쳐 흐르는 표제교향곡의 대표작으로는 발라키레프의 《3개의 러시아적 주제에 의한 서곡》, 러시아적 주제에 의한 제2서곡 《1000년》(후에 《루시》로 개제) 《타마라》, 무소르크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 보로딘의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등을 들 수 있다.


성악곡의 장르에서도 생생한 러시아어의 억양을 이용한 독창적인 작품이 만들어졌다. 무소르크스키의 《벼룩의 노래》 《죽음의 노래와 무용》을 비롯하여 나머지 4인의 가곡이 이에 속한다. 이들의 작풍은 베를리오즈, 슈만, 리스트 등 낭만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동시에 종래의 양식을 과감히 타파하여 선율·화성·주제구성에서 혁신적인 면을 보였다.


따라서 소나타 등의 형식보다는 즉흥적인 환상곡·변주곡 형식을 중시하였다. 이 그룹은 무소르크스키, 보로딘이 죽은 후 완전히 해체되었으나, 러시아국민악파의 흐름은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글라주노프를 중심으로 계승되었다.





출처 : 관악산의 추억(e8853)
글쓴이 : 이종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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