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작곡가. 로라우 출생.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하며 18세기 후반 빈고전파를 대표한다. 고전파 작곡가들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았고, 근대적인 현악4중주곡(絃樂四重奏曲)의 안출(案出)과 교향곡 완성, 그리고 교향적인 미사곡 확립 등 고전파음악의 기반을 쌓음과 동시에 명작을 남겼다. 또한 하이든은 당시 최대의 인기작곡가였는데 그 참된 값어치는 20세기 후반에 비로소 재인식되고 있다.
작은 마을에서 수레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하이든은 음악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출발하였다. 하인부르크와 빈에 있는 교회소년합창대원으로 출발하였고, 일반교양과 음악의 기초를 몸에 익혔다. 17세 무렵에 합창대를 떠나 빈에서 음악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였으며, 음악 개인교수, 그리고 동료들과 악단에 의한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사교계의 인기 있는 화려한 존재였던 툰 백작부인의 음악교사를 시작으로, 25세 무렵에는 퓌른베르크 남작의 와인칠의 거성(居城)으로 초빙됨으로써 최초의 현악4중주곡군을 작곡하였고, 27세 무렵 보헤미아의 모르친 백작가의 악장이 되어서 초기의 일련의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하이든의 음악활동을 결정지은 것은 29세 때 헝가리 대귀족 에스테르하지 후작가(侯爵家) 부악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이다.
에스테르하지가 4대의 군주에게 72세까지 38년 간에 걸쳐 충실한 악장으로 근무하였다. 최초의 5년간의 부악장 시절은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거성에서 세속음악을 담당하였고, 교향곡에 관해서는 바로크로부터 전고전파(前古典派)에 이르는 여러 양식을 시도하면서 독자적 교향곡 양식을 모색하였다. 34세부터 58세에 이르는 악장시절은 최신의 설비를 자랑하는 오페라하우스와 인형극 극장을 갖춘 에스테르하지궁전이 음악활동의 중심 터전이 되었다.
종래의 기악을 중심으로 한 세속음악에, 교회음악과 오페라의 작곡·지휘가 하이든에게 부과되었다. 특히 에스테르하지궁전의 오페라공연은 매우 충실하였고,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절찬을 받았다. 50세 이후부터 하이든의 명성은 유럽 전지역으로 퍼졌으며, 프랑스·에스파냐·이탈리아로부터도 작곡을 주문받았다. 하이든이 섬긴 3번째 군주 안톤 후작은 음악에 관심이 없었으나 명예악장 칭호를 줌으로써 자유로운 활동을 허용하였다.
그 결과 58세부터 63세에 결쳐 런던의 연주회 주최자 잘로몬의 초청으로 2차례에 걸쳐서 영국으로 건너가 잘로몬이 주최하는 연주회를 위하여 12곡의 《잘로몬교향곡집》을 작곡·지휘하였다. 4번째 군주 니콜라우스 2세 후작의 희망에 따라 오스트리아로 귀국한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가를 위하여 6곡의 미사곡을 작곡함과 동시에 하이든음악의 총결산이라고 할 만한 2대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와 《사계(四季)》를 발표하였고, 대작곡가로서 명성을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