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 / 전주곡 Rakhmaninov, Preludes Op.23 Rakhmaninov 1873∼1943
근대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이 작곡가이기를 항상 갈망했고, 피아니스트로서의 지위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수단이라고 여러 차례에 걸쳐 토로한 적이 있다. 그가 작곡한 많은 작품들이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라흐마니노프는 진보적인 작곡가로서의 업적보다는 고전주의 피아니즘에 대한 업적으로 음악사적으로 더 많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참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생의 마지막 무렵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피아노 소품을 작곡하는 것은 교향곡이나 협주곡보다 나에게는 더 큰 문제를 제기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는 식으로 간단하고 명료하게 말하자면,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할 수 있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작품들은 그 변화의 폭이 크지는 않지만, 한 곡 한 곡 강렬한 개성을 가진 수작들이다.
출판 당시부터 즉각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악보는 폭발적으로 팔렸고 모든 연주회에서 그의 피아노 소품이 반드시 연주되었다. 특히 전주곡은 라흐마니노프가 특히 사랑했던 장르로 저 유명한 [Op.3 No.2 C샤프 단조 전주곡]과 1910년 8월부터 9월에 걸쳐 작곡한 [13개의 전주곡 Op.32] 그리고 [전주곡 Op.23]을 합하여 도합 24개의 전주곡을 작곡했다.
Rachmaninoff Prelude No. 5 In G Minor from Op. 23 Boris Berezovsky plays
Rachmaninoff Prelude No. 5 In G Minor from Op. 23 Santiago Rodriguez piano.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창조해낸 고난도의 피아노 음악
[전주곡 Op.23]은 10개의 작은 전주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24개로 구성된 쇼팽의 [전주곡 Op.28]이 전체 연주시간이 40여 분 정도 걸리는 것처럼,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Op.23] 또한 전곡 연주에는 비슷한 연주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쇼팽의 전주곡은 모든 곡들이 다른 조성으로 작곡되어 있어서 장단조를 한 바퀴 돌도록 구성되어 있지만 라흐마니노프의 경우는 쇼팽처럼 일관되게 작곡, 출판하지 않고 3회에 걸쳐 나누어낸 점이 다르다.
또한 작품 전체를 일별해 보더라도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은 쇼팽의 경우와 같이 하나의 일관된 흐름 혹은 연관성 있는 화자가 등장하는 일종의 연가곡 형식이라고 보긴 힘들다. 각각의 곡들이 개별적인 성격과 독립적인 개성을 가진 세트 플레이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바흐와 쇼팽, 스크리아빈 등의 전통적인 전주곡 형식보다 진일보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라흐마니노프 전주곡의 특징이기도 하다. 한 곡당 반 페이지 분량인 쇼팽의 작은 전주곡들에 비하여,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은 최소 4~5분 이상 연주시간을 요하는 만큼 복잡하고도 확장된 폴리포니 형식을 띄고 있다. 한편 각 작품들은 낭만주의 이디엄이 최고조로 발휘되어 있어 연주와 해석 모든 면에서 최고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의 손길만을 허락한다. 연주 테크닉, 조성과 화성, 리듬, 서정성, 타악기적인 가능성과 낭만적인 음색 등등,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독창적인 세계가 바로 이들 전주곡에 담겨 있는 것이다.
라흐마니노프가 처음으로 작곡한 [C샤프 단조 전주곡 Op.3 No.2]의 명성이 너무 높은 탓에 작곡가 생전부터 [전주곡 Op.23]의 진가가 조금은 가려진 듯하다. 라흐마니노프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내가 생각하건데 [전주곡 Op.23]은 음악적으로 내 첫 번째 전주곡보다 더 나은 것 같다. 그러나 대중들은 내 신념을 함께 하려는 의향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지.” 대중적인 작품들의 인기에 비대중적인 작품이 편승하고자, 그는 한 작품번호의 곡들을 전부 연주하지 않고 여러 곡들을 섞어서 연주하는 것을 선호했다.
라흐마니노프 이후의 많은 피아니스트들 역시 그의 음악을 발췌해서 연주하는 것을 선호했지만 이제는 그 경향이 서서히 바뀌어 전곡을 연주하는 형식을 많이 채택하고 있다. 특히 각 전주곡들은 작품마다 작곡시기 및 작곡 스타일이 현격하게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한 총 24개의 전주곡은 쇼팽과 마찬가지로 24개의 장조와 단조를 모두 한 번씩 사용해 조성의 자연스러운 순환과 일관성을 도모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테크닉, 서정성, 낭만적 음색 – 라흐마니노프만의 세계
라흐마니노프는 1901년 행진곡풍 리듬으로 유명한 [Op.23 No.5]를 먼저 작곡했고 나머지 전주곡들은 1902년 4촌인 나탈리 사티나와의 결혼 후에 완성되었다. 1번과 2번, 5번은 1903년 2월 10일 모스크바에서 초연되었다. 나머지 여섯 곡은 그 이후에 작곡되었으며 1904년이 되어서야 이 작품은 비로소 [전주곡 Op.23]으로 온전히 출판될 수 있었다.
1901년부터 1903년 사이는 라흐마니노프에게 대단히 힘든 시기였다. 이들 전주곡을 작곡하게 된 동기는 전적으로 재정적인 문제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잠을 잘 수 있는 집조차 없었던 라흐마니노프는 호텔에 머무르며 작곡을 했고 무기력증, 의기소침과 싸우고 있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재정적 문제는 그의 사촌이자 음악가인 알렉산더 질로티(Alexander Siloti)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불행한 시기를 강렬한 창작열로 극복한 결과물인 이 전주곡집을 자신의 수호천사였던 질로티에게 헌정했다.
Sergei Rachmaninov Sviatoslav Richter
RACHMANINOV Préludes Op 23
Alexis Weissenberg, Piano No. 1 - F# minor Largo (03:10) 1. F샤프 단조 라르고 쇼팽의 전주곡에 가까운 스타일로 작곡된 곡 가운데 하나로 자유롭게 구성된 작품. 16분음표의 단순한 분산화움을 반주로 하여 오른손으로는 서정적인 선율이 물결처럼 흘러나간다. No. 2 - Bb major Maestoso (03:37) 2. B플랫 장조 마에스토소 3부 형식의 웅장한 전주곡. 왼손의 현란한 아르페지오 위에 오른손은 힘찬 주제를 노래부르며 시작한다. 가운데 부분에서는 양손의 역할이 바뀌어 왼손에 애조 띈 선율이, 오른손은 이를 장식해 나가고, 이어 1부가 반복되는 3부가 시작되기 직전 전조를 통해 재현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No. 3 - D minor (02:52) 3. D단조 템포 디 미뉴엣 육중한 화음이 날렵하게 진행되어 아이러니컬한 뉘앙스를 짙게 풍기는 주제가 지나가고, 이후 대위법적인 진행이 적절한 무게감을 실으며 스트레토(stretto)를 통해 긴장감을 더한 뒤 주제를 반복하며 끝을 맺는다. No. 4 - D major Andante catabile (05:34) 4. D장조 안단테 칸타빌레 셋잇단음표의 완만한 리듬으로 시작하며 오른손의 애수 띈 선율과 베이스 라인의 분산화음이 어우러져 녹턴풍의 스타일을 견지한다. No.5 - G minor Alla marcia (03:35) 5. G단조 알라 마르치아 ‘행진곡풍으로’라는 지시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 전주곡은 [Op.3 No.2]와 더불어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이다. 명확한 3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행진곡풍의 리드미컬한 주제 선율로부터 극적인 긴장감을 높여가는 대목은 전형적인 라흐마니노프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울한 서정을 거쳐 마지막 재현이 위풍당당하게 끝난 뒤 덧붙여진 3소절 정도의 사그러지는 듯한 짧은 코다는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No. 6 - Eb major (03:08) 6. E플랫 장조 안단테 서정적인 주제가 오른손을 중심으로 분산화음처럼 진행되고, 이후 확대, 발전하며 반음계적인 시퀀스를 통해 약간의 감정적 동요를 보여준다. 이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상시키는 듯한 음형과 분위기를 자아내며 16분음표의 잔잔한 물결을 따라 끝을 맺는다. No. 7 - C minor (02:42) 7. C단조 알레그로 레가토로 빠르게 흘러가는 16분음표의 패시지와 C음을 강조하는 오르간적인 울림으로 시작하는 이 곡은, 중후한 선율과 장식적 선율이 대비를 이루며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침잠해들어가는 모습이 이채롭다. No. 8 - Ab major Allegro vivace (03:18) 8. A플랫 장조 알레그로 비바체 토카타풍의 짧은 전주곡으로서 쇼팽의 연습곡을 연상시키는 듯한 화려함이 인상적인 대목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16분음표의 분산화음을 오른손으로 연주하고 주선율을 왼손이 반주 형식으로 노래부르며 클라이맥스를 맞이한 뒤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사라진다. No. 9 - Eb minor (01:58) 9. E플랫 단조 프레스토 기교적으로 가장 어려운 테크닉을 요구하는 전주곡 가운데 하나로서 대위법적인 진행을 바탕으로 극도로 섬세한 다이내믹 컨트럴과 음영 조절을 요구한다. 오른손은 3도와 6도, 2도와 4도를 트릴처럼 동시에 연주하며 왼손은 이 음형을 아르페지오적으로 펼쳐놓은 듯한 장대한 멜로디가 펼쳐지는, 진정한 비르투오소를 위한 전주곡이다. No.10 - Gb major (03:56) 10. G플랫 장조 라르고 [전주곡 Op.23]을 마무리하는 느린 악곡으로서 단순하고 섬세하며 우아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왼손의 주제가 오른손의 싱코페이션 코드의 반주를 받으며 진행, 2부에서는 반음계적 화성이, 마지막 3부에서는 왼손의 셋잇단음이 주제를 다시 노래부르며 수수께끼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듯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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