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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익태 / 한국환상곡(Symphonic Fantasia ‘Korea’ )

P a o l o 2017. 10. 29. 16:15


안익태 / 한국환상곡

Symphonic Fantasia ‘Korea’

안익태(安益泰), 1906-1965



 

 

Eak Tay Ahn, cond. (안익태 지휘)

Los Angeles Philharmonic Orchestra

 


 

오케스트라의 도입부에 이어 호른이 애국가의 선율을 도입하고 모든 관악기 군이 총출동하는 가운데 베이스튜바의 우렁찬 리드와 관현악의 화려한 총주로 장엄하고 화려한 주부로 들어간다. 주부에서는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형상화 하는데, ‘도라지 타령’ 등 우리 가락이 도입되며, 여기에 2대의 하프와 금관악기 군이 충실히 뒤를 받쳐주는 가운데 다양한 타악기까지 추가되어 장엄한 여정을 이어간다. 이어 민족의 혼을 나타내는 부분에서는 ‘아리랑’을 비롯한 한민족의 평화를 묘사하다가 갑자기 곡상이 거칠어지는데, 이는 평화로운 이 나라를 침략한 일제의 강압통치를 그리는 부분으로 곡은 어둡고 침울해진다.


그러나 다시 일어난 민중들은 독립을 소리 높여 외치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애국가가 시작된다. 마침내 울려퍼진 ‘애국가’는 남녀 혼성합창으로 장엄하게 이어지는데, 초판본은 여기서 모든 곡이 끝나고 있다. 그러나 한국동란을 겪고 나서, 동족의 희생과 그 영령들을 위로하는 진혼곡이 뒤에 새로이 추가되고, 다시 한 번 천지를 진동하는 애국가의 장엄한 가락이 후반으로 내달린다. 후렴구에서 빠른 푸가토로 변한 합창은 ‘만세, 만세’를 긴박하게 쌓아올리는 가운데 장엄하고 화려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1악장은 개국과 아름다운 강산, 농부들의 평화롭고 소박한 생활을 그리고 있다. 이 둘을 따로 구분하기보다는 이렇게 묶어 곡의 흐름상 2악장과 구분하는 것이 훨씬 낫다. 첫 시작은 E Flat 장조. 오케스트라의 총 합주로 E flat 장조의 화음이 연주되고 나면 호른이 유려한 음색을 내는데 이 부분이 참으로 놀랍다. 악보를 보고 분석해보면 이 선율의 방향과 리듬이 대금의 가락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박자도 불규칙하고, 장식음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계속 서정적인 선율을 연주하다가 바이올린이 C 장조로 나오는 금관의 멜로디를 반주하는데 이 멜로디가 애국가 선율의 변형이다. 조용해지면 새소리가 들리고, 얼마 있다가 작은북이 조용히 연타하는 부분은 스님들의 목탁 소리를 연상케 한다. 경과구를 거쳐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 곳이 평화롭고 소박한 생활 부분의 시작이다. 여러 민요를 소재로 하여 6/8박자의 춤을 추는데 그 선율이 갑자기 끊긴다. 여기서부터 불길하게 되어 2악장으로 넘어간다.

 

2악장은 민족의 수난기. 조용히 연주되는 침통한 선율로 시작된다. 계속하여 침체된 분위기로 흐르다 투쟁적인 A 단조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곳은 3.1 운동을 묘사한 부분이다. 싱코페이션으로 투쟁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그러다가 애국가 선율이 나오는데 진행되는 듯 하다가 끊기게 된다. 투쟁이 실패로 끝나게 되고, 체념적인 분위기가 매우 비통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다시 투쟁은 재개 되고 이번에는 실패가 아니라 승리로 끝나게 된다. 결국 독립을 쟁취한 기쁨이 합창에 의해 높이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3악장은 바로 이 합창으로 이루어진다. 16분 31초에 처음으로 애국가 선율이 나오게 되어 여러 가지로 조를 바꾸어 변형시키게 되는데 혹자는 1절부터 4절까지를 표현하고 있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 1절의 가사만으로 여러 가지 조로 바뀌어 전개되게 되는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분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18분 1초부터는 대위법적 부분이 등장한다. 18분 30초부터는 '화려한 강산 한반도'라는 새로운 A flat 장조의 선율이 등장한다. 5음음계를 씀으로 인해 애국가보다 더욱 한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19분 18초에 다시 노래는 끊기고 또 어두운 분위기로 된다.

 

4악장은 안익태가 6 25전쟁을 겪은 후 말년에 추가한 부분. 원래 3악장까지 있던 것을 안익태가 추가하였다. 일제의 마지막 투쟁의 선율이 다시 나온다. 그리하여 이 악구는 몇 번 되풀이 한 다음에 20분 1초는 다시 민족의 영광과 승리를 노래하고 있다. 그리하여 여태까지 나왔던 동기들이 여러 차례 등장하고 결국 환희에 찬 기쁨으로 전곡이 끝난다. 바로 여기가 논란인데, 6 25전쟁과 이 곡은 무관하지 않다. 안익태가 말년에 이 곡에 대한 마지막 개정을 하면서 추가로 써 넣은 부분이다.

 

임재식 지휘

Teatro Monumental Madrid

 

Chung Myung-Whun, cond. (정명훈 지휘)

KBS Symphony Orchestra

12nd, FEB, 1999. KBS Music Hall, Seoul Korea.

 



 

안익태(安益泰), 1906-1965

 

안익태는 한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음악가이다. 그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다닐 때, 첼로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19년 3·1 운동에 가담한 죄(?)로 숭실중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당시 교장인 마우리 박사의 배려로 1921년 동경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 특기자로 입학하였다.


그 뒤 동경 구니다치 음악학교에서 첼로를 전공하면서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계속하였다. 1930년 구니다치 음악대학을 졸업한 안익태는 한국과 일본 등에서 첼로 독주자로 활약하다가 그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신시내티 음악대학에 입학하였다. 이후 신시내티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로 들어가 훗날 수석까지 역임하고, 카네기 홀에서 첼로 독주회까지 열어 당시 뉴욕의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는다.

 

1935년 안익태는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으로 자리를 옮겨, 1936년 커티스 음악원을 졸업하였다. 그리고 한인교회에서 합창을 지휘하면서 ‘한국환상곡’을 작곡하고 있을 때, 마침 그곳을 방문한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의 눈에 들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인연을 갖게 된다. 그가 이때 작곡하던 ‘한국환상곡’은 카네기 홀이 주관하는 작곡경연대회에 출품을 목표로 만들던 곡이었는데, 드디어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은 카네기재단에 입선되었고, 그는 이 작품의 초연을 위해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1936년 베를린으로 간 안익태는 그전부터 작곡하리라 마음먹은 애국가를 마침내 완성시킨다. 그리고 이때 베를린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영광의 월계관을 받는 일이 생기자, 안익태는 이때 일본 선수단에 포함된 한국 선수들을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만나 그때 막 작곡을 마친 애국가를 그들과 함께 처음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애국가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조선독립회의에 보내 독립운동과 관련한 집회에서 애국가를 사용토록 했다. 그리고 얼마 전 완성했던 ‘한국환상곡’의 뒷부분에 새로 작곡한 애국가를 추가함으로써 비로소 聲部가 달린 대곡으로 '한국환상곡'이 완성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환상곡’과 ‘애국가’는 태동 시기는 달랐지만 결실은 동시에 이루어진 셈이다.

 

1937년 안익태는 비엔나로 간다. 비엔나에서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어 작곡과 지휘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리고 베토벤 해석으로 유명한 작곡가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1887-1971)에게도 작곡을 배운다. 이후 부다페스트로 간 안익태는 헝가리 민족음악의 아버지인 졸탄 코다이(1882-1967)로부터 교향악에 민속음악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하여 배우게 된다.


 

1939년 안익태는 헝가리 정부의 장학금으로 부다페스트의 ‘에외트뵈스 로란드’ 대학교를 졸업한다. 마침 그때 부다페스트에서 리하르트 스트라우스가 지휘하는 음악회가 있었는데, 안익태의 음악적 재능을 평소 높이 평가한 스트라우스가 안익태를 음악회의 지휘자로 강력 추천한다. 이 음악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안익태는 이후 스트라우스의 추천으로 로마 교향악단을 필두로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로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유럽의 정상 오케스트라를 차례로 지휘하면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한편, 유럽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마다 ‘한국환상곡’을 레퍼토리에 넣어 연주함으로써 ‘한국환상곡’이 차츰 알려지기 시작하자, 아일랜드의 더블린 교향악단이 안익태를 초청한다.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 아래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일본의 압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안익태가 만든 '한국환상곡'을 듣고 싶어 했던 것이다. 더블린에서 '한국환상곡'을 성공적으로 마친 안익태는 이제 유럽 음악계에 그 이름을 조금씩 알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1946년 7월 5일 바르셀로나에서 ‘롤리타 팔라베라’와 결혼식을 올린 안익태는 마요르카 오케스트라 설립과 함께 지휘자로 초청 받아 부인 롤리타와 함께 마요르카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조국 대한민국에서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때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에서 공식적으로 국가로 불려진다.

 

이후 안익태는 1964년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를 시작으로 조국을 위해 헌신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울국제음악제는 3회까지 이어진 후 폐지되었다.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간 안익태는 1965년 9월 16일 갑자기 찾아온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이국 만리 마요르카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음악가 안익태의 유해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1977년 7월 8일이 되어서야 조국의 국립묘지에 이장되었다.






출처 : 관악산의 추억(e8853)
글쓴이 : 이종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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