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mphony

[스크랩] 프랑크 / 교향곡 D 단조(Symphony in D minor) FWV 38

P a o l o 2017. 10. 16. 11:20


Symphony in D minor, FWV 38

프랑크 / 교향곡 D 단조, FWV 38

Cesar Auguste Franck 1822 ~1890


 

Full (전곡)

Ricardo Muti, cond.

Philadelphia Orchestra

 

'프랑스에서의 참된 교향음악의 예술은 프랑크와 그 일파에 의해서 산출되었다.'

이것은 그의 제자인 뱅상 댕디가 한 말이다. 분명히 프랑스의 교향음악은 프랑크의 출현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문이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크도 베를리오즈와 마찬가지로 시류를 정면으로 거스런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만성형의 작곡가였을 뿐만 아니라, 평생 생클로틸드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의 지위에 만족했고, 그를 따르는 많지 않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이외에는 세속에 초연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좀처럼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가까스로 유명해졌을 때는 그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프랑크에게 있어서 유일한 교향곡인 이 D 단조는 1888년에 작곡되어, 그 이듬해인 1889년(67세)에 파리음악원의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세상을 뜨기 1년 전이다. 이 교향곡의 가장 큰 특색은 순환형식(forme cyclique)에 의해 작곡되었다는 점이다. 이 순환형식이란 것은 특징있는 순환주제를 곡 전체에 걸쳐 사용한으로써 내면에서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작곡법이다. 이 곡에서는 3개의 순환주제가 쓰여 있다. 프랑크는 그의 걸작 <바이올린 서나타 A장조>에서도 이 수법을 쓰고 있다.


또 하나의 특색은 전조의 교묘함과 오르간적인 중후한 울림이다. 프랑크는 모차르트와 더불어 <전조의 천재>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 천변만화하는 전조의 재미는 절묘하기 이를 데 없다. 또한 프랑크는 그의 즉흥 오르간 연주를 들은 리스트로부터 <마치 바흐의 재림 같다>고 절찬을 받은 오르간의 명수였다. 그러므로 그의 음악을 논할 때, 그로부터 오르간을 떼어 놓을 수 없다. 이 곡의 오르간적인 울림을 들으면, 그가 얼마나 오르간을 사랑했고, 오르간과 더불어 산 작곡가였는가를 알 수 있다.

 

 

1악장: Lento allegro non troppo. D단조. 2/2박자. 소나타 형식

 



Andr? Cluytens, cond.
Orchestre de la Societe des Concerts Du Conservatoire

1953/03/09,10 Mono, Paris

 

Pierre Monteux, cond.

Chicago Symphony Orchestra

 

movement 1, part 1

 

movement 1, part 2

Tam?s D?niel Cs?ry, cond.

Duna Symphonic Orchestra

June 3 2009 in the Great Hall of the Ferenc Liszt Academy of Music, Budapest

 

movement 1, part 1

 

movement 1, part 2

Carlo Maria Giulini, cond.

Philharmonia Orchestra

 

처음에 전곡의 기본동기를 연주하는 서주부(렌토)가 있고, 이어서 알레그로 논 트로포의 신비적 명상으로 도입된다.

저현에 의한 테마가 순환 주제로서 중요한 역할을 나타내면서 시작된다. d단조 서주부의 이 테마는 신비적인 색채가 강하고 회의와 고민을 나타내는 것 같지만, 주부에 들어가면서 다시 바뀌어 강한 전진성을 가진 투쟁적인 주제로 변모한다. 바이올린이 조용히 연주하는 경과 주제의 정화된 듯한 아름다움과 전 합주가 포르테시모로 연주될 정도로 확신에 넘치는 F장조의 제2주제가 대비되는 표정이 뛰어나다. 이 악장의 특징은 렌토의 서주부가 몇 번이고 형태를 바꾸면서 반복되는 점이며, 특히 재현부 앞부분의 중후함과 웅대하게 퍼져가는 D장조의 주화음을 끌어들이는 코다의 긍정적인 강함을 잊을 수 없다.

 

2악장: Allegretto. Bb장조. 4/4박자. 소나타 형식

 

 

Paul Paray, cond.

Detroit Symphony Orchestra

 

movement 2, part 1

 

movement 2, part 2

Tam?s D?niel Cs?ry, cond.

Duna Symphonic Orchestra

June 3 2009 in the Great Hall of the Ferenc Liszt Academy of Music, Budapest

 

movement 2, part 1

 

movement 2, part 2

Carlo Maria Giulini, cond.

Philharmonia Orchestra

 

하프와 현의 피치카토가 순환동기에 의한 주제를 제시한 뒤에 잉글리쉬 호른이, 황혼 속에 혼자 생각에 잠기는 듯한 선율을 노래한다. 그리고 이 부분에는 실질적으로 제3악장이라 볼 수 있는 스케르초 같은 부분이 들어 있는데, 약음기를 단 현의 가락이 섬세한 베일에 싸인 듯한 절묘함을 들려 준다.

중간부에 스케르쪼를 갖는 완서악장이다. 제1악장과 같이 동주제의 Bb장조로 끝난다. 현의 피치카토와 하프의 화음이 풍성한 반주에 선도되어 잉글리쉬 호른이 쓸쓸하게 주제를 연주한다. 이는 4년 뒤에 초연된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과 함께 교향곡에서 잉글리쉬 호른이 가장 뛰어나게 사용된 예로 꼽힌다. 초연 당시에는 이 악기의 사용에 대해 비판도 많았다. 부주제는 Bb장조로 바뀐다. 바이올린이 기도하듯 나오는데, 이 청순한 감정 표현의 아름다움이야말로 프랑크의 특징이다.

 

3악장: Allegro non troppo, D장조. 2/2박자 소나타 형식


 

Paul Paray, cond.

Detroit Symphony Orchestra

 

movement 3, part 1

 

movement 3, part 2

Tam?s D?niel Cs?ry, cond.

Duna Symphonic Orchestra

June 3 2009 in the Great Hall of the Ferenc Liszt Academy of Music, Budapest

 

movement 3

Carlo Maria Giulini, cond.

Philharmonia Orchestra

 

 

현의 강주에서 새로운 주제가 환희를 팅겨내고, 계속해서 감명 깊은 피날레로 장엄하게 부풀어 오른다.

D장조의 주화음에 끌려 환희에 찬 제1주제가 장점을 쌓은 뒤, 트럼펫이 코랄풍의 제2주제를 부드럽게 연주한다. 여기에 제2악장에 나왔던 잉글리쉬 호른의 주제와 제1악장의 주제가 합쳐져, 빛나는 승리 속에 막을 내린다.

 

세자르 프랑크(1822년-1890년)의 유일한 교향곡인 D단조는 1886년에 착수하여 1888년에 완성된 작품이다.

1889년 2월 17일 파리에서 초연했고, H. 뒤파르크에게 헌정되었다. 연주시간은 약 40분이 소요된다. 악기 편성은 플루트 2, 오보에 2, 잉글리쉬 호른, 클라리넷 2, 베이스 클라리넷, 파곳 2, 호른 4, 트럼펫 2, 코르넷 2, 트롬본 3, 튜바 1, 팀파니, 하프 그리고 현악 5부이다.


프랑크의 생애는 오르간의 대가였던 브루크너와 닮았다. 작곡을 계속 해왔지만, 50대까지는 오르가니스트 겸 교사로 알려졌을 뿐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수년 전부터 비로소 작곡가로써의 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보통 1곡 밖에 교향곡을 남기지 않은 사람은 습작으로 한 곡만 쓰고 세상을 떠났거나 아니면 오페라 작곡으로 방향 전환을 했기 때문에 후속 교향곡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프랑크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가 첫 교향곡이 이 D단조를 완성한 때가 66세 때였다. 교향곡을 쓰기 시작한 시기가 늦은 작곡가로는 브루크너와 브람스가 있지만 이 두 사람도 40대에 제1번을 작곡했다. 그러니 프랑크는 이들보다도 훨씬 늦은 나이에 첫 교향곡을 완성한 것이다. 

 

오르간적인 중후한 울림이라는 점에서 브루크너와 닮았지만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영향이 강한 브루크너에 비하면 프랑크는 바흐에 가깝다. 프랑크의 교향곡을 보면, d단조에서 D장조로 바꾸는 낭만파 특유의 어두움에서 밝음으로의 흐름이 전곡을 통해 흐르면서 순환 형식에 의한 통일을 노리고 있다. 한 걸음 물러 선 듯하면서 직선적인, 프랑크의 성격을 반영한 비교적 꾸밈없는 오케스트레이션 안에서 하프와 잉글리쉬 호른의 용법은 인상적이다. 스케르쪼 악장이 제외된 전 3악장 교향곡이라는 점도 당시로서는 이례적이다. 성실한 프랑크에게 스케르쪼적인 장난이 필요 없었을지 모른다.

 

 

프랑크 C?sar Auguste Franck, 1822.12.10~1890.11.8 

 

화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운 프랑크는 12세의 나이로 리에주 음악원을 졸업하고 연주여행을 다녔을 정도로 조숙한 천재였다. 15세 되던 해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푸가, 대위법, 작곡, 오르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오르간 연주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이던 그는 여러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를 전전하다가 1858년에 성 클로틸드 교회의 합창장이 된 그는 이어 그 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이 즈음 그의 오르간 연주를 들은 리스트는 프랑크를 두고 "바흐 이후 최고의 오르가니스트"라며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용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프랑크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명망과 존경을 받았다. 1872년엔 파리 음악원의오르간 교수가 되어 루이 비에른, 가브리엘 피에르네, 에르네스트 쇼송, 앙리 뒤파르, 뱅상 댕디 등을 가르쳤으며, 프랑스 국민음악협회의 일원으로 프랑스 작곡가들을 지도했다. 그의 작품들은 베토벤과 바그너풍의 풍부한 화음들로 가득차 있다. 그 중에서도 <교향곡 D단조>, 피아노곡 <전주곡, 코랄과 푸가>, 교향시 <저주받은 사냥꾼>,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 등이 대표적이다.

 

프랑스의 작곡가·오르간 연주자. 벨기에 리에주 출생. 처음 리에주에서 공부를 하다가 1835년 파리로 나와 파리음악원에서 피아노·오르간·대위법 등을 공부하였다. 1843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와 오르간 개인교수, 1872년 F.부노아의 후임으로 음악원의 오르간 교수가 되었으며, 그 이듬해 프랑스국적을 얻었다.


당시 프랑스의 음악계에는 로시니, 마이어베어 등의 극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가벼운 오페라작품이 성행하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이해를 받지 못하다가 1890년의 《현악4중주곡》으로 겨우 성공을 거두었는데 1개월 후 마차사고로 죽었다.

로마가톨릭교도로서의 깊은 신앙심은 그의 예술과 생활에 잘 반영되어 있으며 그가 죽은 후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1894년 ‘스콜라 칸토룸’이, 1935년에는 ‘에콜 세자르 프랑크’가 설립되었다. 그의 음악은 프랑스와 독일의 전통음악을 조화시킨 것이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낭만주의 속에서 순수음악을 지향하고 있다.

 

화성에서는 대담한 전조(轉調)와 반음계를 자유로이 구사하여 새로운 어법을 창조하였으며, 또한 소나타 ·교향곡의 각 악장을 유일한 테마로 통일하는 순환형식(循環形式)을 발전시켰다. 교육자로서도 뛰어나 V.댕디, C.보르드, E.쇼송, G.피에르네 등의 인재를 길러냈다. 주요 작품으로는 《루트》《지복(至福)》《속죄(贖罪)》《교향변주곡》《바이올린 소나타》《현악4중주곡》《세 중찬가(衆讚歌)》를 비롯하여 오르간곡·피아노곡·교향시·합창곡 등이 있다.


은행의 하급 행원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을 리스트와 필적할 만한 피아니스트로 키우려고 했다. 프랑크는 우선 리에주의 왕립 음악학교에서 배우고 이어서 1835년 파리로 가서 레이하와 피에르 침머만 Pierre Zimmermann에게 레슨을 받은 다음 파리 음악원에서 침머만에게 피아노를, 르보른 Leborne에게 푸가와 대위법을 배웠다. 1838년 피아노 부문에서 명예 대상을 획득했는데 이 상은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준 일이 없던 상이었다. 또한 그는 푸가(1840), 오르간(1841, 브누아의 클래스) 부문에서도 상을 받았다.


그러나 한시 바삐 아들을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만들어야겠다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이겨 프랑크는 1842년 파리 음악원을 자퇴하고 벨기에,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연주회를 개최하였으며 그 후 파리에서도 연주회를 가졌다. 이런 연주회용으로 그는 아버지의 희망대로 발라드, 환상곡, 4손을 위한 2중주곡(영국 국가 주께서 왕을 구하셨도다 God save the King이나 유행 오페라의 아리아에 의한) 등 기교를 요하는 많은 피아노곡을 작곡했다. 또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곡도 몇 개 썼으며(안단테 퀴에토소 Andante quietoso), 이것을 아브네크와 르 쿠페 Le Couppey의 제자였던 형제 조제프 Joseph와 함께 연주했다. 

 

이들 뛰어난 기교를 목적으로 한 곡의 그늘에서 진짜 프랑크적 작품이 아버지 모르게 작곡되고 있었다. 그러한 곡들 가운데에는 1839년부터 1842년에 걸쳐서 작곡되어 벨기에 왕에게 헌정된 3개의 3중주곡이 있다. 이 중 특히 최초의 f#단조의 작품에는 뒤에 프랑크가 잘 사용하는 순환형식이 이미 나타나 있다. 또한 1846년에 살 엘라르에서 당시 음악계의 거물들(리스트, 마이어베어, 스폰티니, 모셸레스, 픽시스 Pixis) 앞에서 초연된 성서에 의한 목가 루트(1843~45)의 초연이 젊은 프랑크가 거둔 최후의 성공이었다.


이 시기부터 아버지와의 관계가 아주 나빠지게 되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프랑크와 그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펠리시테 데무소 F?licit? Desmoussaux와의 결혼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1848년에 결혼했는데, 그때까지 그의 연주회를 보살펴준 아버지가 등을 돌리자 그는 가난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연주장을 찾아다녔다.


1863년까지는 주로 오를레앙에서 12회의 콘서트에 반주자로 출연하였다. 1회의 연주에 1845년에는 80프랑, 1856년에는 100프랑, 1859년에는 120프랑을 받았다. 또 30분당 1.5프랑에서 2프랑을 받고 피아노 레슨을 했으며(블랑슈가 69번지에 있는 자택에서, 그리고 파리의 몇몇 중학교에서),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도 일했다(처음에는 노틀담 로레트 교회[1845], 이어서 생 장 생 프랑수와 뒤 마레 교회[1853]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이 두 번째 교회에서 그는 혁명적인 악기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카바이에 콜이 제작한 교향 오르간 orgue symphonique으로, 프랑크가 본 것은 이 고명한 오르간 제작자가 만든 초기의 오르간이었는데, 그는 이 오르간 제작자와 친교를 맺어 카바이에 콜의 명성을 높이는 데 일조를 했다. 이 시기는 참다운 창조라는 관점에서 볼 때 프랑크로서는 거의 공백의 시기였다. 그가 이 시기에 만든 작품으로는 몇 개의 가곡과 1편의 오페라 코미크가 있을 뿐이다. 후자인 오페라 코미크 완고한 머슴은 배우의 딸인 아내의 압력으로 씌어진 것인데 상연되지 않은 채 끝나 버려 그의 2년 동안(1851~53)의 노력은 수포로 끝나 버린다.

 

그러나 이 시기는 프랑크에게 있어서 자성(自省)의 시기, 내적 성숙의 시기이기도 했으며, 그 성과는 그가 파리의 성 클로틸트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 임명되는 1858년에 개화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의 천재적 재능은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며 표면에 나타나게 된다. 오르간 주자로서의 자신의 지위와 교회에서 그의 음악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에 대한 경의에서 우선 몇 개의 종교음악을 작곡하게 되는데 1858년의 장엄 미사곡, 오르간을 위한 안단티노, 3개의 모테트, 1859년의 대오르간을 위한 3개의 아리아 찬가, 1860년의 3성 미사곡, 그리고 이들 작품 다음에 1860년부터 1862년에 걸쳐 완성된 뛰어난 오르간을 위한 6개의 소품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마지막 작품에는 아직도 전세기의 영향이 다소 보이기는 하지만(교향적 대작품, 끝곡), 그 혁명적인 구조(매우 구성이 잘 정비된 형식, 가장 많은 것은 3부 형식), 교묘한 서법, 열기를 띠고 있는 음악어법(기도, 파스토랄)에 의해서 프랑스에 있어서의 종교적 오르간곡에 대해 눈뜨게 함으로써 그의 후계자들(특히 비에른, 비도르)이 작곡하게 되는 오르간 교향곡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이 시기부터 프랑크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이후 분주한 생활 중에 틈틈이 걸작을 잇달아 내놓게 된다.


스당의 항복이 준 충격 속에서 몇 사람의 프랑크 찬미자와 그의 제자들이 국민음악협회 Soci?t? nationale de musique(S. N. M.)를 창립했다. 이 협회의 목적은 프랑스 예술 Ars gallica의 부흥에 있었으며, 프랑스 작품의 보다 많은 상연과 프랑스 작곡가들의 의욕적인 창작활동을 촉진시키는 데 있었다. 1872년 프랑크는 파리 음악원의 오르간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주위에는 많은 젊은 작곡가들(댕디, 뒤파르크, 쇼송 등)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유명한 프랑크파를 형성하여 프랑크를 무명의 상태에서 구출하려고 했다. 제자들에게 이끌려 그는 새로운 작품을 잇달아 만들게 된다.


1872년 이후, 그는 교육자(파리 음악원), 오르간 주자(성 크로틸드 교회), 작곡가 등 세 분야에서 동시에 활약하게 된다. 이후 거의 매년 대작이 발표된다. 이들 작품은 여름 휴가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이 많으며 1878년부터 1879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피아노5중주곡은 랄로와 생상에 의해서 준비된 프랑스 실내악의 부흥과 그의 작품에 있어서 밀도높은 창작기의 시작을 나타내는 작품이었다. 곡마다 작풍은 개선되고 본질이 심화되었다. 이리하여 교향시 저주받은 사냥꾼(1882), 교향시 귀신(1884), 교향시 프시케(1887~88),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 코랄과 푸가(1884),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적 변주곡(1885),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뛰어난 소나타(1886), 교향곡 d단조(1886~88), 현악4중주곡(1889), 그리고 그의 최후의 작품이며 오르간 작곡가로서의 유언이라 할 수 있는 오르간을 위한 3개의 코랄(1890) 등과 같은 대작이 완성되었다.


진지하고 성실한 예술가였던 프랑크의 공적은 세 가지 점에서 주목된다. 우선 프랑크는 실내악의 개혁자로서, 프랑스의 음악계가 극장음악에 주목한 시기에 오페라 이상의 음악이 4중주곡, 5중주곡 속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것들은 베토벤과 슈베르트에게서 음악어법을 계승하였으며, 교향적 작품에서는 바그너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 견고한 구축성에서 대개의 경우 3부형식을 사용하고 있고, 1842년의 피아노3중주곡(20세 때의 작품)에서 이미 완전한 형태로 사용되고 있는 순환형식을 낳고 있다. 각 악장 속에 복수의 주제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끝악장에서 그러한 주제가 겹쳐지는 이 수법은 그의 작품에 견고한 구조와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운동성과 반음계에 의한 그의 서법은 곡에 새로운 변화를 주는 풍부한 조바꿈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제2의 공적은, 오르간곡에서 교회의 많은 정오르간 주자들이 소나기처럼 격렬한 곡이나 오페라의 아리아에 의한 환상곡으로 만족했던 시대에, 교회와 기도라는 본래의 길로 오르간을 복귀시킨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3개의 곡집은 모범적인 작품이다. 1862년의 대오르간을 위한 6개의 소품에 의해서, 프랑크는 오르간곡의 미학(형식, 서법)을 일신했으며 오르간 교향곡의 선구자가 되었다. 1878년의 대오르간을 위한 3개의 소품은 트로카데로 교회에 설치된 카바이에 콜이 제작한 오르간의 완성을 축하하여 작곡된 작품이다.


이 곡에 의해서 그는 오르간을 오케스트라의 라이벌로 만드는 순수한 교향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이 곡집의 각 곡에는 세속적인 소제목이 붙여졌고(환상곡 A장조, 칸타빌레, 영웅적 소품), 이 중 영웅적 소품에서는 두 주제의 대조를 교묘하게 다루고 있다. 1890년의 오르간을 위한 3개의 코랄에서는 독일 양식의 코랄과 그레고리오 성가의 서정성을 융합해서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바그너에게서 이어받은 반음계의 사용과 전통적인 대위법의 사용, 또한 전통적 대위법의 융합도 시도하고 있다. 이리하여 프랑크는 그 이전에 존재하고 있던 모든 것의 장대한 통합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의 영향 중 제3의 특징은, 그의 주위에 모인 사람들의 정신적 운동이다. 그의 제자들은 곧 그의 친구가 되어 프랑크파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프랑스의 우수한 음악가들을 모이게 했다. 그의 미학에 대한 반동이 그의 후계자들 중에서는 나타났을 때도 역시 그들에게서는 프랑크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이 보였다. 드뷔시와 라벨은 그들의 현악4중주곡 속에서 순환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 프랑크의 작품에는 자신의 메시지를 순화하는데 타협이 없는 위대한 감상가(感傷家)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는 그러한 작품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초월하여, 직접 또는 간접적인 형태로 생애의 모범으로까지 연결시켰다. 아마도 그가 불충분한 교육과 그 소박함 때문에 많은 악취미를 동시대에 가져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소박함은 때로는 놀라운 것이어서 사람들은 그를 청정한 할아버지 Pater Seraphicus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러나 이것은 부당한 것으로, 그가 남긴 많은 작품이 보여주듯이 프랑크는 청순하면서도 격렬한 관능의 소유자였다.


그의 걸작-피아노5중주곡, 전주곡, 코랄과 푸가, 프시케, 오르간을 위한 3개의 코랄-의 배후에는 정열적이고 진정하며 최고봉을 지향하는 모습이 인정된다. 그의 전작품은 스스로 택한 험준한 정복의 과정을 말해주고 있다.

 


출처 : 관악산의 추억(e8853)
글쓴이 : 이종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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