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는 알렉상드르 뒤마 2세의 소설 [동백 아가씨]를 토대로 한 것인데요, 뒤마의 원작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실제로 한때 뒤마의 연인이었던 파리 사교계의 코르티잔 마리 뒤플레시(1824-1847)를 모델로 삼은 인물입니다. 한동안 열렬히 숭배하며 사귀던 마리와 헤어진 2년 뒤에 뒤마는 나이 스물셋의 마리가 폐결핵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녀를 생각하며 [동백 아가씨]를 썼습니다. 죽은 마리가 동백꽃을 각별히 좋아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지요. 베르디 오페라의 남자주인공 알프레도는 결국 바로 뒤마 자신인 셈입니다.
이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곡은 1막 초반에 나오는 ‘축배의 노래(Brindisi)’입니다. 비올레타와 그녀를 남몰래 흠모해온 청년 알프레도가 파티에서 처음 만나 함께 부르는 이중창이죠. 국가 경축행사나 TV음악회에 자주 등장하는 노래지만, 사실 내용은 좀 퇴폐적입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의 이탈리아어 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청춘의 피가 끓어오르는 동안 삶의 쾌락을 즐기자는 내용이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이 파티는 정상적인 파티가 아니라 파리 상류사회 남자들이 모여 밤새 노는 일종의 ‘기생 파티’니까요.
파리 사교계의 꽃 비올레타와 그녀를 흠모해온 청년 알프레도의 첫 만남
그러니까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는 당대 사회의 이중윤리를 비판하는 작품인 셈입니다. 1853년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했을 때 이 오페라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 년이나 오백 년 전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동시대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관객들은 상당히 충격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베르디는 어쩔 수 없이 이 이야기의 배경을 백 년 전으로 바꿔놓아야 했답니다.
사교계 여성과 평범한 청년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
매일 밤 파티와 술로 시간을 보내다 폐결핵이 깊어져 건강이 악화된 비올레타를 1년 동안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사랑해온 알프레도는 드디어 이 파티에 나타나 비올레타에게 ‘언젠가 그 아름답던 날Un di felice eterea’이라는 아리아로 사랑을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웃어넘기며 거절하지만 곧 알프레도의 진심을 알고 그의 사랑에 응하는 비올레타. 처음으로 찾아온 진실한 사랑에 맘이 설레면서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삶에 절망하며 이대로 살겠다고 외칩니다(‘이상해라... 언제까지나 자유롭게E strano!... Sempre libera’) 어려운 고음과 고난도의 기교를 요구하는 소프라노 주인공의 대표곡입니다. 그러나 다시 만난 두 사람은 파리 교외에 살림을 차리고, 비올레타는 사교계 생활을 미련 없이 청산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평온한 행복도 잠시뿐. 2막에서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이 비올레타를 찾아와, 딸이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오빠인 알프레도가 매춘부와 함께 산다는 소문 때문에 난처하니 알프레도와 헤어지라고 요구합니다. 비올레타는 비통한 심정으로 알프레도를 떠나고, 아버지 제르몽은 ‘프로방스의 바다와 대지Di Provenza il mar, il suol’라는 간절한 바리톤 아리아로 아들을 설득해 고향으로 데려가려 합니다. 그러나 비올레타가 배신했다고 오해해 분노한 알프레도는 다른 파티에 달려가 사교계로 돌아간 비올레타를 만납니다. 그리고 자신이 도박판에서 딴 돈을 비올레타의 얼굴에 뿌리며 손님들 앞에서 심한 모욕을 줍니다.
비올레타를 후원하는 귀족과 결투를 벌여 그에게 상해를 입힌 알프레도는 아버지의 명령대로 한동안 외국에 가 지냅니다. 그 사이에 비올레타는 병이 깊어져 죽어가죠. 밖에서 즐거운 사육제가 한창일 때 마침내 오해가 풀린 알프레도가 비올레타를 찾아와 두 사람은 다시 파리를 떠나 함께 살자는 이중창을 부릅니다(‘파리를 떠나서Parigi, o cara’). 제르몽까지 나타나 비올레타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주며 착한 여자와 결혼하라는 유언을 남긴 채 숨을 거두고 맙니다(‘이 초상화를 받아요Prendi, quest'e l'immagine’).
알프레도와 헤어진 비올레타는 불치의 병이 깊어져 홀로 죽어간다.
사회의 이중윤리, 인습에 대한 저항을 담은 베르디의 걸작
베르디 오페라 중 중기의 걸작으로 꼽히는 [라 트라비아타]는 그 이전까지의 베르디 오페라들과는 여러 면에서 다른 획기적인 작품입니다. 우선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했던 격동의 무대들과는 전혀 다른, ‘주관성’이 강조된 오페라라는 점이 그렇습니다. 주인공들은 소박한 개인적 행복을 얻고자 했지만 인습적인 사회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주인공에게 모든 것이 집중된 ‘프리마 돈나(prima donna) 오페라’라는 점도 중요한 특징입니다. 비올레타 역의 소프라노는 다양한 창법과 음색을 구사하며 기존의 가창 규범을 뛰어넘게 됩니다. 소프라노 리리코, 스핀토, 드라마티코, 콜로라투라의 특성을 모두 발휘해야 하는 배역이 바로 비올레타 역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르디의 음악은 비올레타를 고귀한 품성을 지닌 여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매춘여성에게 기품을 부여했다는 것 자체가 오페라 극장에 별 생각 없이 즐기러 오는 관객들에게는 충격이 되었습니다.
관객은 우선 1막 ‘축배의 노래’, 2막 2장 ‘집시들의 노래’와 ‘마드리드의 투우사’ 등 다채롭고 화려한 파티 장면과 춤에 시선을 빼앗기기 쉽지만, 이 작품의 참된 묘미는 2막 1장에서 비올레타와 제르몽이 나누는 대화 장면에 있습니다. 노회한 장사꾼 제르몽이 사회적 신분이 낮은 젊은 여인을 교묘하게 설득해 자신이 속한 부르주아 사회의 안전을 지켜내는 대목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모두 잃은 뒤 여가수 스트레포니와 동거하며 주변의 비난과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던 작곡가 베르디의 ‘인습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이 장면의 긴 이중창은 아리아 위주였던 오랜 오페라 형식의 전통을 극복하려는 베르디의 참신한 시도였습니다. 음악적 모티프들이 때로는 선율적으로 때로는 레치타티보 식으로 함께 자라나 유기적으로 하나의 예술적 총체를 이루는 획기적인 예가 된 것입니다. 맨 처음에 연주되는 이 오페라의 전주곡 역시 경쾌한 ‘축배의 노래’ 주제로 시작하지 않고, 비올레타가 병으로 죽어가는 3막 전주곡의 어둡고 처연한 현악기 선율로 시작합니다. 베르디가 ‘모두에게 버림 받은 사회적 약자의 비참한 죽음’을 이 오페라의 주제로 삼았음을 확연히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