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그 / 피아노 협주곡 Grieg, Piano Concerto in A minor, Op.16
“그리그의 a단조는 가장 빈번하게 들을 수 있는 피아노 협주곡으로서 슈만이나 차이콥스키와 대등한 위치에서 위대한 낭만파 협주곡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나아가 이 협주곡은 노르웨이적인 특징으로 가득해서, 보다 무거운 중앙유럽의 낭만주의와는 달리 북유럽적인 서정성을 띠고 있다. 따라서 따스하고 밝으며, 장중하면서 또한 민족적이다.” 노르웨이의 피아니스트인 E. 스텐-뇌클베리가 한 이 말은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a단조]의 위상과 특성을 잘 요약해주고 있다. 이 힘차고 아름다운 피아노 협주곡은 [페르 귄트]와 나란히 그리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전 세계 공연장에서 청중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피아노 협주곡의 하나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노르웨이 민족음악에 대한 의지를 담은 대작
이 협주곡은 무엇보다 그리그가 '노르웨이 민족음악'에 대한 의지를 본격화한 첫 번째 대작이라는 데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그는 라이프치히 유학 직후 크리스티아니아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여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문화적으로 다소 낙후되어 있던 고국에서 안주하지 않고 보다 풍부한 경험과 자극을 찾아 당시 북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던 덴마크의 수도로 건너갔다. 코펜하겐에 머무는 동안 그리그는 문화적⋅환경적⋅인간적으로 무척 뜻 깊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었던 일은 베르겐(그리그 자신의 고향이기도 하다) 출신의 음악가 리카르드 노르드로크와의 만남이었다.
그리그는 노르드로크를 만나자마자 노르웨이의 전통음악과 민족적 소재에 대한 그의 정열과 신념에 금세 감화되었다. 바야흐로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노르웨이의 전설과 산맥, 피요르드와 농민의 이야기가 되살아나 숨쉬기 시작했고, 그는 '진정한 노르웨이 국민음악'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모색하게 되었다. 동년배인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다른 친구들과 함께 '오이테르페 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당대의 스칸디나비아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회를 열었다. 비록 노르드로크의 안타까운 요절로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음악으로 노르웨이의 정신을 표현하자던 친구와의 약속은 그리그에게 평생의 화두로 남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 협주곡은 그리그가 조국의 전통유산을 새로이 자각하기 시작한 증거물이라 하겠다. 여기서 그는 노르웨이 민요풍의 선율을 구사했고, 노르웨이 산악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도약무곡의 리듬을 사용했으며, 노르웨이 민속악기인 '하르당게르 피들'의 연주 스타일을 모방했다. 또 노르웨이 전설 속의 이미지를 투영했는가 하면, 악곡 전편에 면면히 흐르는 청명하고 서늘한 기운을 통해서 노르웨이 대자연의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리그의 피아노>
Michelangeli, Piano 일명 '그리그 사인(Grieg's sign)'으로 불리는 유명한 도입부로 시작된다. 팀파니의 롤링 크레셴도에 이은 오케스트라의 투티와 함께 피아노가 튀어나와 강렬한 하행화음을 짚어나가는 이 도입부는 슈만 협주곡의 직접적인 영향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슈만의 영향은 이뿐이 아니다. 슈만 협주곡의 첫 악장과 마찬가지로 이 협주곡의 첫 악장도 제1주제의 지배를 받으며, 두 곡 모두 낭만적인 정열과 동경의 느낌으로 가득하다.
제1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발전부는 상당히 짧은 편이고, 재현부는 고전적인 형식에 충실하다. 이 악장의 진정한 클라이맥스는 종결부 직전에 나오는 카덴차에 놓여 있는데, 작곡가 자신에 의한 이 화려하고 당당한 카덴차 역시 제1주제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구축되어 있다.
'북유럽의 쇼팽'으로 일컬어지는 그리그 특유의 시정이 아로새겨진 완서악장이다. 제1부에서 약음기를 단 현악기에 의해서 폭넓게 펼쳐지는 주제는 다분히 명상적이면서도 동시에 뜨거운 기운을 내포하고 있다. 제2부로 넘어가면 피아노가 이 선율을 영롱한 음색으로 노래하는데, 그 흐름에 섬세하고 우아한 장식이 가미되어 음악은 점차 화려한 모양새를 띠게 된다. 제3부는 제1부가 충실히 되풀이되는 가운데 피아노가 곁들여져 한층 더 풍부하고 고양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론도 소나타 형식으로 구성된 피날레. 목관악기들의 독특한 앙상블로 행진곡풍 리듬이 부각되며 출발한다. 론도 주제는 경쾌하고 재기 넘치는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 역시 노르웨이의 도약무곡을 연상시킨다. 또 관현악이 이 리듬을 넘겨받아 한층 강렬한 이미지를 자아내는 부분에서는 북유럽 전설 속의 '트롤들의 행진'이 떠오른다.
이 악장은 이처럼 '노르웨이의 이미지'들로 가득한데, 무엇보다 중간의 정적인 부분에서 플루트로 제시되는 제2주제가 돋보인다. 노르웨이의 전원, 북유럽의 청명한 하늘 등을 강하게 환기시키는 이 주제는 아마도 그리그가 작곡한 가장 매혹적인 선율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특히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이 선율이 A장조로 더없이 힘차고 뜨겁게 울려 퍼질 때는 피요르드의 웅대한 절경 위로 그리그의 정신이 드높이 비상하는 듯한 느낌에 듣는 이의 가슴마저 벅차오른다.
한편 이 작품은 역사상 최초로 녹음된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1909년에 이루어진 그 역사적 녹음의 주인공은 독일의 거장 빌헬름 박하우스이다. 또 1868/1872년의 초판은 1993년 스웨덴의 피아니스트 로베 데르빙예르의 독주, 준이치 히로카미가 지휘한 노르쾨피니 교향악단의 협연으로 처음 음반에 수록되었다(BIS).
역사상 최초로 녹음된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a단조]는 1868년 여름, 덴마크의 쇨레뢰드에 자리한 목가적인 별장에서 작곡되어 이듬해 봄, 코펜하겐에서 초연되었다. 당연히 그리그 자신이 피아노 독주를 맡았어야 했지만, 그는 크리스티아니아에서의 지휘자 업무 때문에 초연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닐스 가데, 안톤 루빈스타인 등 저명한 음악가들이 배석한 초연은 성공을 거두었고, 작품의 악보는 1872년에 출판되었다. 노르드로크에게 헌정된 이 초판본은 출판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고, '피아노의 제왕' 리스트에게서도 격찬을 받았다. 리스트는 그리그와 두 번째 만났을 때 이 곡을 직접 연주했는데, 작품에 큰 감동을 받은 듯 마지막 부분을 다시 한 번 연주한 다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그가 자신의 유일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한 것은 스물 다섯 살 때인 1868년의 일이었는데, 당시 그는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일단 1866년 10월 크리스티아니아(현재의 오슬로)에서 개최한 공연이 성공을 거두면서 노르웨이 음악계의 새로운 별로 떠올랐고, 그 여세를 몰아 시립관현악단의 지휘자 자리를 꿰찼는가 하면, 1867년 1월에는 노르웨이 최초의 교향곡 작곡가로 알려진 오토 빈테르-옐름의 도움을 받아 ‘노르웨이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하는 등 음악가로서 탄탄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또 1867년 6월에는 사촌인 니나 하게룹과 결혼을 했고, 그 이듬해인 1868년에는 첫째 딸 알렉산드라가 태어났다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젊은 음악가의 당찬 패기와 원대한 포부, 그리고 단란한 가정을 꾸린 한 남자의 순수하고 솔직한 기쁨과 긍정적인 전망이 이 협주곡에 고스란히 투영되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리그가 단조를 취한 것이 슈만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노르웨이의 환경과 정서를 표현하기에 장조보다 단조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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