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배경
루돌프대공은 베토벤의 음악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베토벤이 창작생활에 있어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베토벤은 이러한 배려에 대한 보답으로 루돌프대공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지도해 주었으며 자신의 많은 작품을 대공을 위해 작곡하고 헌정하였다. 이들 곡 중에는 B flat장조의 피아노소나타 op. 101, '장엄 미사'와 같은 거대한 곡도 포함되어 있으며 피아노트리오 '대공', 피아노 소나타 21, 23, 26번 등의 유명한 작품들도 루돌프대공과 연관이 있는 곡들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베토벤을 존경하는 것 만큼이나 루돌프대공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번에 이야기하게 될 '피아노 협주곡 5번' 역시 루돌프대공을 위해 작곡된 대표적인 곡이다. 베토벤은 1809년에 5번 협주곡을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이듬해 런던과 라이프치히의 출판사 (clementi-London, Breitkopf & Hartel-Leipzig)에서 출판되었다. 당시 베토벤은 귓병이 악화되어 일상생활에 상당한 불편을 느낄 정도였으며, 결국 이 곡의 초연은 1811년 11월 28일 라이프치히에서 프리드리히 슈나이더에 의해 이루어졌다. 라이프치히에서의 연주와 마찬가지로 비인에서의 초연시에도 베토벤은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자신의 협주곡이 청중 앞에서 연주되었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있었다. 베토벤이 작곡한 5곡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스스로 초연하지 못한 곡은 제 5번협주곡 뿐이다. 제 3번 교향곡을 비롯하여 이 시기에 작곡된 곡들이 아주 간결한 어법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악화되는 귓병의 영향이라고 생각되는데 특히 E flat장조, 혹은 C단조의 간단한 으뜸, 딸림화음을 유니즌으로 효과적인 화성전개를 통해 강한 음악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베토벤 특유의 작곡기법이 극단적으로 잘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작곡시기가 완전히 일치하는 op.81-a의 E flat장조 소나타는 베토벤의 세련된 작곡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좋은 예이며, 피아노 협주곡 5번 역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작곡양식과 효율적인 기법이 매우 돋보이는 작품이다.
피아노 / Maurizio Pollini (1942~ )
현존하는 피아니스트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연주를 들려주는 인물로 꼽히는 피아니스트인 마우리치오 폴리니는 미켈란젤리의 뒤를 이어 이딸리아 피아니스트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는 1942년에 태어나서 1957년 15세때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 출전하여 2위(1위없음)에 입상하였고, 1960년 쇼팽콩쿠르에서 심사 위원 전원 일치의 1위 입상자가 되었다. 이 때 심사위원장으로 있던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우리 심사위원 중에서 그 만큼 잘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고 감탄했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쇼팽 콩쿠르 후 얼마 안 되어 폴리니는 악단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은퇴한 여러가지 사정에 대해서 소문이 있었지만, 10년후 침묵뒤에서 콘서트 홀로 복귀하였고 경이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70년대 들어서면서 마침내 성숙한 음악을 각종 음반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쇼팽콩쿠르 우승자답게 그의 쇼팽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음색은 한마디로 밝고 부드러우며, 명확하다는 것이며, 이는 쇼팽연주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70~80년대의 음반들중에서도 베토벤 후기 소나타집은 가장 주목받는 연주로 그라모폰상을 수상하였고 지금까지도 스테디셀러로 진열대의 한 칸을 차지하고 있다.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함께 이탈리아의 공장근로자들을 위해 직접 공장에가서 연주하기도 했던 폴리니, 음악은 특정 인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 그는 남들보다 5~10cm 낮은 의자에서 연주하지만 그의 음악은 높은 위치에 있는 지성파 연주의 대가이다.
지휘 / Karl Böhm (1897~1981)
카롤 뵘은 오스트리아의 그라츠 출생의 지휘자, 음악을 좋아하는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우선은 부모의 뜻에 따라 그라츠 대학의 법학부에 들어갔으나,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소중히 여긴 아버지는 자식을 1년간의 빈 유학에 보냈다. 빈에서 만디체프스키라는 아주 엄격한 스승에게 사사하게 되어 퍽 효과적인 영재 교육을 받게 되고, 세계의 음악 중심 도시였던 빈에서 음악의 가장 뛰어난 결실을 얻게 되었다. 제대하여 고향에 돌아와 보니 때 마침 인재가 부족했던 시기여서 고향인 그라츠 가극장의 연습 지휘자라는 하급 직책을 얻게 된 것이 직업 음악가로서의 시작이었다. 뵘의 아버지는 예술가의 경력이란 심히 불안전하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기에 음악을 하되 법학 박사 학위는 따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강력히 종용했기에 가극장 일만 해도 과중한 노동이었는데도 이를 악물고 국가고시 시험 준비를 하여 결국은 박사 학위를 얻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가 일생을 통해 그 학위를 실제로 써 먹은 일은 없었다. 그라츠에서 데뷔한 지 5년 후에 브루노 발터의 초청을 받고 뮌헨으로 옮겨 대가극장에서 다시 밑바닥부터 올라가면서 귀중한 경험을 쌓고 실력을 축적했다. 1927년 33세때 다룸슈탓트 가극장의 총 감독이 되면서 책임 있는 부서를 맡게 되고, 그 후로 함부르크, 드레스덴 등에서도 활약,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로도 독일에 남아서 행동했기에 카라얀처럼 직접 나치당에 입당은 안 했지만 각 가지 혐의를 받게 되어 전후 2년간 연주 활동이 금지되어 각 가지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복권된 후로는 어떤 의미에선 수 차례 자기를 괴롭힌 모국보다는 좀더 시야를 넓혀 국제적인 커리어를 쌓아야겠다고 다짐하고는 적극적으로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미국 등에서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올려 각국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훈장, 명예적 그 밖의 포상을 받게 되고 최만년에는 안질 때문에 고생도 했지만 그의 인생의 마지막 부분은 영광에 찬 생애였다.
악장별
1st. Allegro E flat 장조, 4/4박자, 소나타형식 협주 소나타 형식의 제일 긴 악장이다. 서두 부분이 피아노의 강한 3도 화음으로 끝남과 동시에 오케스트라의 1주제가 등장한다. 이 주제는 바이올린과 클라리넷에 의해 선율이 형성되고, 타악기와 트럼펫으로 강인한 윤곽을 형성한다. 2주제는 갑작스럽게 C단조로 등장하며 바이올린으로 제시된다. 이 악장에서 거의 유일하게 단선율로 이루어진 부분인데 곧바로 호른이 장화음으로 이어받고 두 개의 주제선율을 소재로 악상은 발전해 나간다. 피아노는 약한 반금계의 상승음형으로 등장하여 조용하게 1주제를 연주하고 오케스트라의 당당한 선율들과는 대조적으로 조용하게 음악을 진행한다. 이러한 대조는 곡의 전개부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나타난다. 피아노는 관현악과 대립하지 않고, 독자적인 선율부만 포르테로 연주할 뿐이다.
2nd. Adagio un poco mosso - attacca B장조, 4/4박자, 조금 빠른 느낌의 아다지오, 변주곡형식 우아한 주제선율이 현악기를 타고 흘러나오다가 피아노독주가 약음으로 선율을 이어받아 느긋하게 노래하기 시작한다. 자유로운 형식의 변주이므로 명확한 구분은 없으며, 앞 소절의 화음을 바로 트릴로 이으면서 악상이 변화하는 형식이다. 감정이 최고조에 도달하면 선율선은 피아노에서 현악기군으로 넘어가게 되고 곧바로 16분음표의 분산화음을 피아노가 계속해서 연주하는 가운데 목관악기가 선율을 받아 악상을 진행한다. 선율의 진행이 끝나면 론도악장의 화성이 암시되고 바로 싱커페이션을 동반한 새로운 재료가 등장한다. 아다지오 악장에서는 그다지 싱커페이션의 효과가 느껴지지 않지만 이 재료는 바로 3악장으로 이어지게 되고, 빠른 템포를 타고 리드미컬한 주제로 변화하게 된다.
3rd. Rondo, Allegro E flat 장조, 6/8박자, 론도형식 3악장은 일관된 리듬이 지배하는 경쾌한 론도이다. 2악장 말미의 선율을 피아노가 ff로 이어받아 폭발하듯 제시한다. 하강음형에 이어지는 D음 유니즌의 딸림화음은 piano에서 forte로의 급작스런 전환으로 인해 대단히 산뜻한 인상을 준다. 피아노의 제시가 끝나면 오케스트라가 똑같은 선율을 이어받아 연주한다. 팀파니와 트럼펫에 의해 리듬이 돌출되어 나오며 선율은 현악기군이 연주해간다. 론도주제의 반복이 한차례 끝나면 호른이 리듬을 이어받는 가운데 현악기로 한 차례 강인한 패시지를 연주하며 론도주제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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