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mphony

[스크랩] 슈베르트 교향곡 제5번 내림 나장조 D.485

P a o l o 2017. 4. 11. 10:09

슈베르트 교향곡 제5번 내림 나장조 D.485                         

 

                    
               Symphony No.5 in Bb Major, D.485
     

 

  슈베르트 교향곡 5번 in 내림 마장조, D. 485
                    Franz Schubert 1797-1828
             
                  in B ♭major, D. 485 전악장 연주
               Karl Bohm - Wiener Philharmoniker
 

                                                                                                                                                          

 
[초연]
이 교향곡의 악기 편성이 작은 것은 명백히도 하토비히 가(家)에서의 아마츄어 음악회에서 소인수로 연주할 목적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 곡이 아담한 즐거움을 지니고 있는 것은, 말하자면 즐거운 기분으로 슈베르트가 처음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공개연주회에 있어서의 초연의 일자와 장소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해설]
제4교향곡과 같은 해의 작품인데, 그 야심적인 경향은 전혀 볼 수 없고, 따라서 베토벤의 영향은 없으며, 모짜르트나 당시 인기 있었던 여러 작곡가들의 작풍(作風)을 느끼게 한다. 깊은 의미에 있어서 로맨틱한 경향을 나타내지 않고, 로코코적이며 또한 소시민적인 생활감정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듣기에 즐거우며 기쁜 감정을 알게 한다.
   
[악곡의 해설]
            [제1악장] Allegro 알레그로. B♭장조. 2/2박자. 단순한 소나타 형식을 가짐.
감미로우며 또한 경쾌한 4마디의 도입구가 있어서, 곧 제1주제가 제시된다. 낮은음 현이 언제나 높은음부의 음형을 되풀이하고 있다. 단 24마디의 연결부 뒤에 제2주제가 현으로 연주된다. 짧은 연결부 뒤에 전개부로 들어간다. 전개부는 내림라장조이며, 제1주제의 단소변형(短小變形)과 첫머리의 도입부에 쓰여진 바이올린의 음계와, 그것에 더해지는 1, 2의 새 주제가 재료가 되어서 단 50마디에 걸칠 뿐이다. 재현부에 있어서는 제1주제가 원래의 내림나장조가 아니고, 내림마장조이며, 또한 제2주제는 원칙대로 내림나장조이다. 악장 끝에 6째음을 반음 내리고, 단음계의 맛을 들이려고 시도했다.
 
                 [제2악장] Andante con moto 안단테 콘 모토. E♭장조. 6/8박자.
                                    
                                                          가요형식을 취했다.
 
             [제3악장] Menuetto.Allegro molto-Trio 알레그로 몰토 G 단조. 3/4박자.
                                    
이 악장은 제4교향곡의 제3악장과 같이 명칭도 메뉴에토이지만 실은 스케르쪼이다. 주부의 선율은 그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네의 제1악장을 생각케 하며, 또한 모짜르트의 g단조 교향곡의 메뉴에토도 상기케 한다. 트리오는 G장조로, 그 선율의 구조는 앞서 말한 주부의 선율과 같이 T―D의 분산화음에서 이루어져 있다.
 
                   [제4악장] Allegro vivace 알레그로 비바체. B♭장조. 2/4박자.
                             
이 교향곡 중 가장 화려한 부분이다. 전체가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고, 제1주제는 자잘한 조바꿈을 지닌 경과부 뒤에 페르마타를 두고, F장조의 제2주제가 나타난다. 이것에 따라 3잇단음표를 반주로 하는 경과부가 있어, 전개부에 들어간다. 그 재료는 제1주제이다. F장조의 딸림7화현의 페르마타가 그 끝남을 고하여 제시부에 들어가고, 제1주제와 제2주제가 함께 이에 따라서 배열되어서, 제2경과부를 닮은 코다를 갖고 이 악장을 마친다.
   
   
                            Schubert Symphony No. 5 in B ♭major, D. 485
이 교향곡은 1816년 9월에 시작, 10월에 완성한 다섯번째의 것으로 이 해의 4월에 만들어진 제4번 C단조 교향곡 비극적에 이어서 썼으며, 슈베르트 19세 때의 작품이다.
소관현악을 위한 교향곡으로서, '트럼펫 및 드럼을 사용하지 않음' 이라는 단서가 붙었으며, 유명한 '일요일 오후의 슈베르트 4중주단에서 발전한 단델호프의 연주 곡목으로 작곡된 것이다. 그 당시, 제4번 교향곡과 함께 만의 지휘에 의해 종종 크리스탈 왕궁에서 연주되었다.
곡은 초기의 작품이기 때문에, 자연히 하이든이나 모짜르트, 롯시니, 베토벤을 사숙했던 시대의 슈베르트를 반영했고, 특히 모짜르트의 감화가 현저함을 엿볼수가 있다. 그러나 주제를 다루는 법과 관악기를 다루는 법은 슈베르트적이며, 악장의 발전에는 독자적인 경지가 개척되어 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슈베르트의 교육 부족이 발견된다.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 슈베르트는 교장이었고, 어머니 엘리자베트의 처녀 때 이름은 비에츠였으며 결혼 당시에는 가정부였다. 슈베르트는 생존한 자식 중 4번째로, 위로 이그나츠·카를·페르디난트 등 3형제가 있었고, 아래로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정직한 인격의 소유자였고 큰 학교를 세웠다. 집안은 음악적 분위기였고, 특히 가족이 현악4중주를 연주할 때면 그가 비올라를 연주했다. 아버지와 형 이그나츠에게 기초적인 음악교육을 받았고, 이후 지역교구교회 오르간 연주자에게 오르간 연주법과 음악이론을 배웠다. 1808년 빈 궁정소년합창단의 단원이 되었고, 장학금으로 빈의 평민을 위한 기숙학교 슈타트콘비크트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빈 궁정 오르간 연주자였던 벤첼 루치츠카와 당시 최고의 명성을 날렸던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배웠다. 슈베르트는 학생들로 구성된 관현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 지 얼마 안 되어 악장을 맡게 되었고, 루치츠카가 없을 때에는 지휘를 하기도 했다. 동료 학생들과 합창활동을 했으며, 실내악과 피아노를 연마했다.
동료 학생들의 말에 따르면 슈베르트는 수줍음을 잘 탔으며 초기 작품들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를 꺼려 했다. 초기 작품에는 길이가 긴 〈피아노 2중주를 위한 판타지아 Fantasia for Piano Duet〉와 가곡 1곡, 여러 개의 관현악 서곡, 다양한 실내악, 현악4중주 3곡 등이 포함되어 있고,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에의 대본으로 만든 미완성 오페레타 〈거울 기사 Der Spiegelritter〉도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친구들의 격려와 관심으로 수줍음을 극복한 그는 살리에리에게 작품을 가져가 주목을 받게 되었다. 1812년에는 변성기를 맞아 학교를 떠나게 되었지만, 이후에도 3년 이상이나 살리에리에게 개인교습을 받았다. 빈에 있는 교원양성대학에 들어갔고, 1814년 가을에는 아버지가 재직하던 학교의 보조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키가 작아서 군대에 들어가지 못하고, 1818년까지 교사로 있었다.
1813~15년에 작곡한 수많은 곡들은 다양성과 내적 가치에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이 젊은 천재작곡가의 작품들은 아직 성숙미가 결여되어 있기는 하지만, 양식적 독창성과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현악4중주 5곡 외에 완전한 규모의 미사곡 3곡, 교향곡 3곡이 작곡되었고, 첫 완성작 오페라 〈악마의 별장 Des Teufels Lustschloss〉은 교원양성대학에 있는 동안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장르는 가곡이었다. 1814년 10월 19일에 그는 처음으로 괴테의 〈파우스트 Faust〉에 나오는 〈실잣는 그레트헨 Gretchen am Spinnrade〉에 곡을 붙였다. 30번째 가곡인 이 노래를 통해 그는 단숨에 독일 리트에 신기원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듬해에 그는 140곡 이상의 리트를 작곡했다. 그의 가곡 중에는 미완성이거나 스케치만 남아 있는 곡들이 많아서 그의 창작과정을 엿보게 해준다. 그가 작곡을 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분명히 선율이었고, 선율은 노랫말인 시(詩)에서 비롯되었으며 선율 윤곽에 의해 화성과 조바꿈의 방향이 제시되었다. 또한 그가 중시한 것은 시의 장면(자연 경관, 일상의 친숙한 모습, 신비스러운 장면 등)들에 대한 음악외적인 세부 묘사였고, 이에 따라 그는 물레로 실을 잣는 모습이나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봄의 '현란한 옷' 등과 같은 회화적 이미지를 반주를 통해 묘사했다. 이러한 특성은 1815년에 작곡된 가곡들에서 보다 분명해졌고, 이후의 가곡들도 질적으로 성숙하기는 했지만 초기의 이러한 특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815년에는 그동안 노력에 비해 빛을 보지 못했던 오페라 작곡에 계속 몰두해 5~12월에 〈4년간의 보초병 근무 Der vierjährige Posten〉·〈페르난도 Fernando〉·〈빌라 벨라의 클라우디네 Claudine von Villa Bella〉·〈살라망카의 친구들 Die Freunde von Salamanka〉 등의 오페라를 발표했다.
당시 창작활동 이외의 외적 활동은 거의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대학시절의 친구들, 특히 요제프 폰 슈파눈은 그에게 따뜻한 우정을 베풀었다. 1814년 슈파눈은 그를 시인 요한 마이어호퍼에게 소개해주었고, 젊고 전도유망한 프란츠 폰 쇼버를 설득하여 슈베르트를 방문하도록 했다. 1815년말 쇼버는 조일렌가세에 있는 학교로 찾아갔고, 그곳에서 서류더미를 들고 교실 앞에 서 있는 슈베르트와 마주쳤다. 쇼버는 누군가의 조언을 열렬히 원하고 있던 젊은 작곡가 슈베르트에게 학교일의 속박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려는 의욕을 심어주었다. 1816년 봄에 슈베르트는 라이바흐(지금의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 있는 한 대학의 음악감독직에 지원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친구들은 슈베르트의 가곡이 괴테의 관심을 끌도록 노력했고, 1816년 4월에는 바이마르에 있는 괴테에게 그의 시 16편에 곡을 붙인 슈베르트의 가곡집을 보내기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1816년 슈베르트는 마침내 쇼버의 설득으로 휴직서를 쓰게 되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직서가 수리되었고, 이후 8개월 동안 슈베르트는 쇼버와 함께 미망인이 된 친구 어머니의 집에서 살았다.
1817년초 쇼버는 바리톤 가수 요한 미하엘 포글을 집에 데려와 슈베르트에게 소개했고, 이 인연을 계기로 포글은 빈의 대저택 살롱에서 슈베르트의 가곡을 불러 사람들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슈베르트는 후텐브레너 형제, 작곡가 안젤름, 아마추어 음악가 요제프, 요제프 폰 가이(슈베르트는 가이와 함께 피아노 2중주를 연주했음) 등과도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로운 시기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1817년 가을 그는 다시 학교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을 '실패한' 음악가라고 편지에 썼다. 그러나 그 이전의 2년 동안은 결실이 아주 풍부한 시기로 〈가니메트 Ganymed〉·〈방랑자 Der Wanderer〉, 괴테의 소설인 〈빌헬름 마이스터 Wilhelm Meister〉에 나오는 시에 곡을 붙인 〈하프 연주자의 노래 Harper's Songs〉 등의 가곡을 작곡했을 뿐 아니라 4번 교향곡 C단조 〈비극적 Tragic〉(1816), 오늘날에도 인기를 누리는 5번 교향곡 B♭장조(1816), 4번째 미사곡 C장조(1816) 등을 작곡했다. 1817년은 일련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기 시작한 해로 이중 6곡은 쇼버의 집에서 작곡되었고, 그중 대표적인 작품은 7번 E♭장조, 11번 B장조이다.
1818년 여름 적성에 맞지 않았던 교사직을 그만두었다. 그해 봄에는 6번 교향곡 C장조 외에 변변한 작품 하나 쓰지 못했지만, 그러는 동안 그의 이름은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작품이 발표된 최초의 공개연주회가 1818년 3월 1일 빈에서 〈이탈리아 서곡 Italian Overture〉 C장조를 연주한 것이 그의 작품이 발표된 최초의 공개연주회였다. 6월에 그는 에스테르하치 백작인 요한의 두 딸에게 음악을 가르치기 위해 헝가리 젤리츠에 있는 가족 여름휴양지에 갔다.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당시 아주 의욕에 가득 차 있었던 것 같고, 창작 의욕도 새롭게 불타올라 여름 동안 피아노 2중주 〈프랑스 가곡에 의한 변주곡 E단조 Variations on a French Song in E minor〉, 소나타 B♭장조, 무용곡, 가곡, 〈독일진혼곡 Deutsche Trauermesse〉 등을 완성했다.
빈으로 돌아온 슈베르트는 마이어호퍼와 방을 같이 쓰게 되었고, 겨울 동안 오페레타 〈쌍둥이 형제 Die Zwillingsbrüder〉를 작곡했다. 포글의 후원을 받기는 했지만 이 오페레타의 공연은 연기되었고, 1819년 6월에 슈베르트와 포글은 오스트리아 북부에 있는 포글의 고향 슈타이어로 여행을 떠났다. 슈베르트는 시골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자신의 음악에 대한 그곳 사람들의 열렬한 반응에 감동을 받았다. 슈타이어에서는 그의 기악곡들 가운데 최초로 널리 알려진 작품들이라 할 수 있는 피아노 소나타 A장조 D. 664(D.는 O. E. 도이치에 의한 작품번호), 피아노와 현을 위한 5중주 〈송어 Die Forelle〉를 작곡했다. 1819년말에 친구 마이어호퍼의 시와 괴테의 시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에 곡을 붙이는 일에 몰두했다.
1820년 6월에 〈쌍둥이 형제〉가 빈에서 공연되었다. 포글이 쌍둥이 형제 역을 동시에 맡은 이 공연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어서 연극 〈마술 하프 Die Zauberharfe〉의 부수음악이 같은 해 8월에 공연되었고, 여기에 포함된 〈로자문데 Rosamunde〉 서곡은 친근하고 아름다운 선율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제 친구와 후원자에 의한 제한된 영역을 벗어나 보다 넓은 계층의 사람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존라이트너 가족이 그의 음악에 관심을 가졌고, 특히 존라이트너의 아들인 레오폴트는 슈베르트의 절친한 친구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1820년말에 슈베르트는 〈크바르테트자츠 Quartettsatz〉 C단조를 작곡했는데, 이 곡은 1820년대 중반에 등장하는 위대한 현악4중주들을 예고하는 곡이다. 1820년대말에 나온 그밖의 작품들로는 시편 23절의 가사를 가지고 만든 여성 합창을 위한 모테트와 그해 12월에 작곡을 시작한 괴테의 〈물 위의 정령의 노래 Gesang der Geister über den Wassern〉에 붙인 합창곡이 있다. 이 곡은 더블베이스 반주에 의한 남성 8중주곡(D. 714)으로, 1821년 2월에 완성되었다. 자신의 작품들을 출판하고자 한 슈베르트의 노력은 거의 결실을 거두지 못했지만, 1821년초에 몇몇 친구들이 그의 가곡 〈마왕 Erlkönig〉 출판을 위한 후원운동을 벌였다. 반응은 상당히 좋아 이 곡 외에 〈실잣는 그레트헨〉도 출판할 수 있었고 18개월 후에는 작품 12번까지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빈에서 슈베르트의 가곡과 춤곡의 인기는 상당하여, 살롱 연주회는 거의 그의 작품 일색이 되었다. '슈베르티아덴'이라 부른 이 모임은 부유한 상인, 시의원 등의 집에서 열렸다. 하지만 오페라 및 기타 대중연주회에서는 아직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1821년 8월을 7번 교향곡 E단조, E장조 작곡으로 보냈고, 이 시기의 다른 여러 미완성 작품과 함께 이 작품도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오페라에서 성공을 하리라는 결심으로 그해 9~10월에 장크트푈텐 지방으로 짧은 휴가를 보내러 갔고, 이곳에서 그의 친구들은 3막 오페라 〈알폰조와 에스트렐라 Alfonso und Estrella〉가 공연될 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였다. 이 오페라는 1822년 2월에 완성되었지만 무대에 오르지는 못했다. 1822년 7월 아트첸브루크에서 쇼버와 다른 친구들과 함께 〈나의 꿈 Mein Traum〉이라는 자전적인 기록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음악 애호가 청년과 아버지의 말다툼을 묘사하고 있다. 1822년 가을에는 위의 오페라 이외에도 미완성 작품인 〈미완성 교향곡 B단조〉를 작곡하기 시작했고, 이 곡은 앞서의 오페라와는 달리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슈베르트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이 곡은 1822년에 2개 악장과 스케르초 악장 일부만 작곡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피아노 환상곡 1곡(자신의 가곡 〈방랑자〉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미사 A♭장조를 완성했다.

 

 


    

 

                

   



출처 : 아트힐
글쓴이 : 아목동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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