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 1810. 3. 1 - 1849. 10. 17 쇼팽은 폴란드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사회적인 불안을 피해 북쪽 나라 폴란드로 이주했는데, 처음에는 연초 공장에서 회계 일을 하던 그는 공장이 폐쇄된 후 스카르벡 백작의 집에 프랑스어 가정 교사로 머물렀다. 그리고 옛 귀족 출신 가정부 유스티나와 결혼, 1남 3녀를 얻었다. 그 가운데 둘째가 쇼 팽이었다. 4세 때 피아노 기초 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는 12세 때 바르샤바 음악 학교 교장인 엘스너에게 정식으로 작곡 교육을 받았다. 엘스너는 쇼팽의 독창성이 충분히 발휘되도록 여러 가지로 배려했는데, 이것이 그로 하여금 피아노 작곡가로서 독보적인 인물이 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15세 때 그는 처녀작 ≪론도 작품 1≫을 출판했고, 18세 때 베를린을 방문해 유럽 음악계를 견문했다. 다음해는 유럽 음악의 중심지 빈으로 가서 독주회를 열었다. 이때 슈만으로부터 "여러분,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십시오. 여기 천재가 나타났습니다."라는 극찬을 받음으로써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쇼팽의 마음은 결코 밝지만은 않았다. 바르샤바 음악원 성악과 여학생인 콘스탄치아 글라드코프스카를 남몰래 사모하면서도 도저히 사랑 고백을 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그는 차라리 그녀 곁을 영원히 떠나리라 마음먹고 정처 없는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살아있는 동안 두 번 다시 고국땅을 밟지 못했다. 그는 여러 나라를 전전한 끝에 파리에 정착, 음악가로서 지휘를 굳혀 갔다. 26세 때 리스트의 소개로 쇼팽은 당시 인기 절정에 있던 진취적인 여류 소설가 조르쥬 상드를 만났다. 그때 이미 그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섬세하고 내성적인 기질의 쇼팽은 남장을 하고 엽연초를 피우는 6세 연상의 상드의 극진한 병간호를 받으며 작곡에 전념했다. 이들은 마요르카 섬에서 사랑의 공동 생활을 즐겼는데, 이곳에서 쇼팽의 병세는 악화되었지만 주옥같은 명곡들을 많이 작곡했다. 하지만 화려한 사교 생활을 좋아하는 상드와 내성적이고 고독을 즐기는 쇼팽이 언제까지나 이러한 생활을 견딜 수는 없었나 보다. 그들의 공동 생활은 1846년 그의 나이 36세 때 끝이 났다. 그후 그는 생계를 위해 한때 그의 문하생이었던 스털링의 초청으로 스코틀랜드에 갔다가 기후가 몹시 나쁜 그곳에서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고, 급기야는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병을 이겨내지 못한 그는 결국 39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그의 유해는 피에르 라세즈 묘지에 묻혔고, 그의 유언에 따라 심장은 모국 폴란드의 바르샤바 성십자 교회에 안치되었다. 쇼팽은 일생을 거의 피아노곡 작곡에 전념했다. 그러나 예외로 만든 6개의 관현악곡, 3개의 소나타 역시 빛을 발하고 있고, 즉흥곡, 녹턴, 마주르카, 왈츠, 폴로네이즈 등은 쇼팽이 개척한 피아노곡 형식이었다. 새로움이 가득한 그의 곡들을 후대의 음악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정교함과 치밀한 악상을 독창적으로 사용한 쇼팽은 선배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완전히 독자의 세계를 열고 음악의 세계에 군림하기 시작한 인물이다 영원한 낭만파 피아니스트 조르쥬 상드의 무덤. 쇼팽에게 있어 가장 밝은 태양이었던 상드도 1876년 열정의 불꽃을 모두 다 사르고 여기에 묻힌다. 프랑스 중부 노앙 지방에 눈부시던 태양도 그녀의 주검 위에서는 슬며시 그 빛을 감추고 만다. 쇼팽은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작곡가입니다. 19세기를 대표하는 낭만파 피아니스트이며 또 주로 피아노만을 위해 작곡했기 때문이죠. 더욱 이 매력적인 일은 쇼팽의 선율이 언제나 쉽게 이어지면서도 매우 풍부하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연주자들한테는 그의 피아노 곡이 아주 사랑받는 곡입니다. 마치 바이얼 인이나 첼로같은 악기를 다루거나 또는 노래를 부르듯이 연주할 수 있습니다. 쇼팽은 피아노를 위해서 많은 곡을 썼습니다. 그러나 연주를 하는 데에는 많은 기교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24개의 연습곡은 각각 기술적 난점이 있죠. 물론 모두 아름답지만요. 결국 훌륭한 연주자라면 기교의 어려움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그 외에도 쇼팽의 녹턴이라든가 또 세계적으로 이름난 왈츠곡들을 남긴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모두가 연주하기에는 어려운 작품들입니다. 한 마디로 연주자의 한 사람으로서 쇼팽을 말하자면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가장 사랑하고 선호하면서도 연주하기에는 가장 어려운 음악가 중에 한 사람입니다. 임종, "불쌍한 나의 어머니!" 스카르 도를레아. 안뜰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는 두 개의 건물이 바로 노앙을 떠나 파리로 온 쇼팽과 상드가 별거 아닌 별거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쇼팽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 졌고, 새벽녘에 시작한 기침은 반나절 이상이나 계속됐다가 그칠 정도로 악화되는 바람에 상드는 그의 병간호로 심신이 몹시 지친 상태였다. 그래도 두 건물에서 마주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뜰에서는 가끔씩 쇼팽의 즉흥 연주회가 열리곤 했다. 발자크, 하이네같은 문인들이 이 연주회의 초대 손님으로 자리를 빛냈다. 상드와의 사랑도 마침내 파국을 맞이한다. 상드의 딸을 둘러싸고 생긴 미묘한 감정대립으로 끝내 아픈 결별을 선언했던 것이다. 상드 곁을 떠난 뒤 사랑에의 목마름과 심각한 폐결핵으로 햇빛을 그리워한 쇼팽은 이곳 프라스 방동으로 거처를 옮긴지 다섯 달만에 햇살 잘드는 2층 방에서 서른아홉 생을 마감한다. "어머니, 불쌍한 나의 어머니!" 임종의 마지막 순간에 쇼팽이 불러본 이름은 "어머니, 불쌍한 나의 어머니! "였을 뿐이다. 마들레느 성당. 쇼팽의 장래식이 거행된 곳이다. 성당으로 오르는 돌계단 아래로 멀리 보이는 길 저 끝까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도의 행렬로 가득 메워져 있다. 자신의 <장송행진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프레드릭 쇼팽은 영원한 안식 속에 잠들었다. 그의 죽음은 음악을 이해하는 모든 이들에게 크나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고이 잠드소서. 눈물처럼 순수했던 영혼이여! 우리는 지금 그대를 위해 울지만 그대는 우리를 위해 위안의 선율을 남기고 떠났는가? 그대의 슬픈 생각이 끝난 뒤에 고귀한 예술은 더욱 그 빛을 발한다."
판타지 (fantasy) 보통은 환상곡이란 표현보다 판타지라는 표현을 쓰다보니 백과사전에도 나오는 것이 쉽게 접근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악상이 떠오르는 대로 자유로이 작곡한 작품. 보통 환상곡으로 번역 된다. 이는 시대 ·작곡가 ·곡풍(曲風) 등에 따라 종류가 많으나 일반적으로는 다음의 5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즉흥적 성격을 띤 곡:모차르트의 피아노용 《환상곡》(D단조), 베토벤의 피아노용 《환상곡》(작품번호 77) 등. ② 자유형식의 소나타: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월광》, 슈만의 《환상곡》(작품번호 17) 등. ③ 몽환적(夢幻的) ·몽상적 분위기를 띤 낭만파시대의 소곡:브람스의 《환상곡집》(작품번호 116) 등. ④ 오페라의 아리아 등을 계속해서 연주하도록 한 곡으로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처리되어 있는 것:리스트의 《돈 조반니 환상곡》 등. ⑤ 16∼17세기의 기악곡 명칭:엄격한 대위법을 따랐으며 후세의 자유로운 환상적 요소는 포함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