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scoes of Piero della Francesca, for orchestra, H. 352 (17:37)
Bohuslav Martinů (1890 ~ 1959) 20세기 체코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1890년 12월 8일 보헤미아의 Policka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교회 탑 경비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 연주로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작곡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그의 고립된 성장과 수줍음의 성격은 일상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었으나 음악에 있어서는 빠른 발전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스스로 음악을 공부한 Martinu는 전문적인 지도의 필요성을 느껴 Prague Conservatory에 입학하여 드보르작의 사위인 Suk,Josef 의 지도하에 섬세한 서정시풍과 인상주의 등의 기술적인 기능을 배웠다. 1923년 9월 파리에 정착하면서 Debussy 이후 프랑스 음악의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인 Albert Roussel의 지도를 받았다. 1941년 나치스(Nazis)를 피하여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프린스턴 대학 과 마네스 음악학교 에서 교편을 잡고 전후 1946년에는 프라하음악원 교수로서 일시 귀국하였으나 재차 미국으로 돌아가 1952년 미국국적을 취득하였다. 1957년에는 은퇴하여 스위스의 프라테룬에서 생활을 하였으며, Martinu는 암으로 인한 고통 끝에 1959년 8월 29일 스위스 리스탈(Liestal)에서 사망하였다.
Bohuslav Martinů (1890-1959)
Bohuslav Martinu 1890-1959 는 다작을 한 체코 출신의 작곡가로 6곡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15곡의 오페라,14곡의 발레 스코어, 대단히 많은 관현악 작품들,실내악, 성악과 기악작품등을 포함하고 있다.
생애 체코시대. 보후슬라프.마르티누는 브르노의 북북서 약 60Km, 보헤미아와 모라바의 경계부근의 작은마을 폴리츠카에서 구두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님의 슬하에서 1890년12月8日 태어났다. 부모님은 이 마을의 화재감시와 야곱교회의 교회당 관리를 맡고 있어서 교회의 종루탑에서 살았다. 보후슬라프도 이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부모님은 음악가는 아니었어나 아버지는 아마추어극단의 열성적인 단원이었고 어머니는 독서와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해서 민요가수로도 있었던 구두기술자를 동거 시키기도 하는등 , 문화적인 환경은 풍족했었다. 유년기 그의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탑밖으로 나간 적은 거의 없었고 하루중 거의 대부분을 책을 읽으면서 보냈다. 7살때부터 근처 재봉사에게서 바이올린을 교습 받으면서 실력이 급성장 하여 얼마후 지역의 현악사중주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를 맡게 되었다. 12살이 되어서는 현악사중주곡을 작곡하게 되고 이러한 재능을 깨닫고 주위의 권유와 독지가로 부터의 후원도 있어 프라하음악원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의 수업에 만족 하지 못하여 학교의 허가를 받지 않은 아마추어 악단에 참가하기도 하는등의「만성적인 태만」을 이유로 1910년에 퇴학을 당하고 만다. 그 이후1912년부터는 고향의 초등학교에서 교사일을 하였다가, 1917년에는 음악원 시절의 친구 스타니슬라브.노바크의 주선으로 체코필하모니관현악단의 제2바이올린주자가 된다. 1919년에는 칸타타『체코광시곡』으로 스메타나상을 수상하고 작곡가로서 데뷰를 하게된다. 같은해에 국민극장오케스트라의 외국공연에 갔다가 파리에서 인상파 음악을 접하게되며 알베르트 루셀의 스코어에 매료된 그는 그이후 연주활동 틈틈이 도서관에 들러 인상파 작품을 연구했다. 1922년 요제프 수크 의 마스터 클래스에 들어가서 작곡을 배우는 시기가 되었을 때는 드뷔시 처럼 작곡하고 싶다고도 말했다. 다음해인 1923년에는 장학금을 받아 염원인 파리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파리시대 1923년 마르티누는 체코를 떠나 파리로 갔으며, 그동안 추구해오던 낭만주의 스타일의 음악 어법을 신중하게 철회하였다. 파리에서는 알베르트 루셀에게 대위법을 배우고 프랑스육인조와 스트라빈스키등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작곡을 했다. 1929년 고향 브르노 음악원 얀.군트로 부터 작곡과 교수로 초빙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작곡에 전념한다. 1930년대에는 표현주의와 구성주의에 대해 경험하였으며, 유럽음악가들의 기교적 발전에 경도 되었다..그의 관현악 작품인 Half-time 과 La Bagarre는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그는 또한 재즈적 어법을 적용하기도 했는데 그 적절한 예는 Kuchynske revue ("Kitchen Revue")에서 찾을 수 있다..전후의 아방가르드 스타일과 신 고전주의 스타일의 음악은 그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짧은 기간 동안의 작풍은 의고전주의 (pseudoclassicism)성향을 띄기도 하여 자장가나 동요와 같은 고향의 민요등을 소재로 하여 바로크풍의 작품을 쓰게 된다. 그 가장 적절한 예는 Otvirani studanek ("The Opening of the Wells")이다. 1931년에는 파리의 카페에서 알게된 봉제공 샤롯 퀘네헨(Charlotte Quennehen)과 결혼하게된다. 1938년 뮌헨 협정이 체결된 뒤에는 두번째로 고향에 돌아오기도 했다. 1939년 3월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 나치가 침입하자 체코슬로바키아 반대파의 문화대사관원으로 임명된 Martinů는 체코의 많은 예술가들이 파리로 피난 오도록 도왔으며 전쟁이 시작될 쯤 그는 국가적인 색채를 지닌 Polnimse (Field Mass)를 작곡하여 자주 독립 체코슬로바키아 군악대에 주었다. 그의 음악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보호령에 있었을 때 나치에 의해 블랙리스트에 올라 그의 개인적인 상황은 악화되었고 독일인들이 1940년 봄에 파리로 왔을 때 피에르푸르니에와 루돌프피르쿠츠니의 권유로 그는 프랑스 남부로 Charlotte과 함께 피난했다. 그 해 10월부터 3달간 그는 피아노와 작은 오케스트라를 위한 Sinfonietta giocosa를 포함한 작곡을 계속하였고 1941년 초에 그들은 Marseilles를 통해 Lisbon으로 가서 스위스의 친구 파울자허와 에르네스트앙세르메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가는 통로를 찾아 결국 3월 21일 포르투갈을 떠나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미국시대 1941년 마르티누는 나치의 유럽침공을 피해 미국으로 피신, 그 곳에서 그의 프랑스인 아내와 New York 에 정착하였다..미국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어려움이 많았다. 그와 비슷한 환경에 처한 뛰어난 예술가들이 많았을 뿐 아니라 언어 또한 걸림돌로 작용했고, 자금 역시 부족했다. 아울러 이와 같은 이민자들에겐 그들의 재능을 활용할만한 기회가 흔치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마르티누는 그러한 환경에 자신을 순응시켰고, 대단히 많은 양의 작품을 작곡했으며 그의6곡의 교향곡중 5곡이 미국 체재중에 작곡된 것이 보여진다.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이후 작품들에 있어 한층 더 민족적인 색채와 서정적인 선율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모국에 대한 향수와 언어적 문제점,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세르게이 쿠세비츠키(Sergey Koussevitzky, 1874-1951)의 위촉으로 1942년 첫 번째 교향곡을 포함하여 4개의 교향곡을 완성하였으며 그 중 마지막 것은 체코 필하모니에 헌정되어, 1947년 첫 번째 프라하 봄 페스티발에서 쿠벨릭 지휘 아래 초연 되었다. 미국에 머물렀던1940년대는 그의 창작활동의 정점에 있었다. 1945년 체코가 해방되면서 프라하 음악원 으로부터 작곡과 교수의 요청이 있었다. 마르티누는 여기에 동의를 했지만 그이후 그 말을 취소하기도 했다. 1946년에는 세르게이 쿠세비츠키로부터 의뢰를 받아 바크샤 음악학교의 하절기 강사를 맡기도 하는데 이 하절기 강습축제 숙소의 발코니에서 추락하여 중상을 입게 되고 1개월 이상의 입원 치료를 받게 된다. 퇴원후에도 두통,이명등 난청같은 후유증을 격게된다. 이 시기의 작풍은 점차 가벼운 방향으로 바뀌어간다. 이시기 까지도 그는 조국으로 돌아갈 계획이 있었다.실제로 1947년 교향곡 제5번의 초연에는 작곡가의 대리로 출석하지 않고 프라하를 방문한 부인은 서보헤미아의 예술가촌으로 귀국후 거주할 곳을 미리 둘러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1948년에 공산 정권이 탄생하고 문화정책에 이해를 보여주고 있던 얀마사리크가 사망했다는 보도를 접한후 귀국을 단념했다. 하지만 망향의 생각이 끊이지 않아 그해 여름부터 수차례 유럽을 방문하여 기회를 엿보다 1953년에 유럽으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1948년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여름을 보낸 후프린스턴 대학과 메네스 음악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가 작곡과 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양의 작품을 썼다. 다시 유럽에서 구겐하임 장학금으로 1953년 5월에 유럽으로 돌아가서 처음에는 파리에서 그리고 9월에 니스로 이사를 가서 그 후 2년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안정적인 생활을 찾게 된 그는 오페라 Mirandolina, 오라토리오 Gilgameš그리고 1954년 이탈리아에서 여름에 여행하는 동안 예술가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든 Les fresques de Piero della Francesca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 1420?∼1492 이탈리아)와 같은 중요한 작품을 작곡하였다. 1956년부터는 로마의 미국아카데미에서 교편을 잡았다. 하지만 주거지를 갖추려 하지는 않았고 호텔을 전전하며 살아갔다 .다양한 위촉에 보답하여 수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1950년대의 작품은 창작 제3기로 분류되며 신인상주의의 색채가 짙다 이런 일방에서 형식의 범위에 구애됨이 없는 작풍의 작품을 많이 작곡하게 된다. 뉴욕에 있는 동안 마르티누는 그의 말년의 가장 큰 프로젝트인 오페라 The Greek Passion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1954년 Antibes에서 만났던 소설가 Nikos Kazantzakis에 의해 쓰여 진 Christ Recrucified를 토대로 하였으며, 종교적 색채를 엿 볼 수 있는 마르티누는 자신의 말년을 Switzerland에서 보냈으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1958년11月 위수술을 받았지만 이미 시기늘 놓쳐서 암으로 발전 된다 .1959년봄 까지는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같은해 8월28일 스위스 바젤 근교의 리스탈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자허가 소유한 숲의 한쪽에 안장되었다가 1979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틸극장에서 행해진 위령제에서는 바츨라프 노이만의 지휘 체코・필하모니관현악단의 연주로 교향곡제6번과 칸타타『The Opening of the Wells 』가 연주되었다 .그이후 전년에 사망한 부인의 유해도 폴리츠카의 묘지로 안치되었으며 그 묘비에는 The Opening of the Wells 의 1절을 인용하여 "Jsem doma" (「나는 고향에 있다」)고 새겨졌다. 마르티누는 초기 작품에서 그가 보여 줬던 잠재력을 갈수록 극대화 시킨 작곡가로 일생동안 체코 민족주의 음악을 바탕으로 하는 다양한 장르의 곡을 통해 20세기 초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새로운 음악적 흐름을 수용하였으며 작품 안에 이러한 어법들을 융합시켜 독자적인 음악 어법의 틀을 형성함으로써 20세기 체코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자리매김 하였다.
작품세계 마르티누는 400 여곡에 이르는 대단히 많은 작품을 작곡한 다작가였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정규적으로 연주되거나 레코딩되고 있다..그의 합창 작품 가운데 The Epic of Gilgamesh (1955), 그의 일관되게 훌륭한 현대적인 6곡의 교향곡, 그리고 첼로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 오보협주곡, 그리고 5곡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그의 반전 오페라인 Comedy on the bridge; 7곡의 현악 사중주와 플룻 소나타를 포함한 그의 실내악 작품들이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흔히 연주되며 레코딩되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의 음악은 다양한 영향을 흡수했음을 드러네고 있다. La Revue de Cuisine (1927) 과 같은 작품은 jazz의 영향을 크게 받은 작품이며, Double Concerto for two string orchestras, piano and timpani (1938)는 바로크의 concerto grosso의 영향을 드러내는 다수의 작품군 가운데 하나이다..이 밖에 체코 민속 음악의 영향을 받은 다른 작품들도 다수 있다..그는 또한 많은 다른 작곡가들 가운데 특히 Claude Debussy 와 Igor Stravinsky의 작품에 경도 되었으며, 그들로 부터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의 관현악 작품들의 성격적 특징은 거의 피아노가 상존한다는 사실이다..즉 small concerto for harpsichord and chamber orchestra을 포함한 그의 대부분의 관현악 작품들에는 피아노가 매우 중요한 파트의 하나로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1930년으로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의 작품 대부분은 신 고전주의적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들이 작곡되었다..그러나 그의 마지막 작품 몇몇은 보다 광시적 몸짓과 느슨함과 형식에 대한 보다 자연스러운 인식과 통찰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그의 양식적 변화를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의 작품들은 그의 6곡의 교향곡에 비하면 쉽게 들리는 결과를 낳았다. 마르티누의 보다 덜 알려진 작품가운데 하나는 Lucie Bigelow Rosen의 위촉으로 작곡된 테레민 theremin 의 특징을 반영한 작품이다..1944년 여름에 위촉을 받은 즉시 마르티누는 작곡에 착수 했으며, Fantasia for theremin, oboe, string quartet and piano라는 작품이 탄생했으며, 이는 이 작품의 위촉자인 Rosen에게 헌정되었다..그는 이 작품을 1945년 뉴욕에서 자신의 theremin 연주로 Koutzen Quartet 와 Robert Boom과 함께 초연하였다..그의 오페라 The Greek Passion (opera) 은 Nikos Kazantzakis의 동명의 소설 The Greek Passion 을 기초로 작곡된 것이다.
여섯곡의 마르티누의 교향곡들은 매우 짧은 시간의 테두리 안에서 작곡되었다..1번에서 5번 까지는 1942년 부터 1946년 동안, 거의 5년이 채 안되는 시간동안 작곡되었으며 교향곡 6번은 Fantaisies symphoniques 로 명시되었는데 이는 1953년 작곡된 것으로 당시 그는 대중들로 부터 갈채를 받고 있던 때였으며, 창작에 대한 에너지로 충만하던 시기였다. 미국은 전쟁에 의해 내몰린 그를 따뜻하게 맞아준 오직 유일한 새로운 대륙인 것 처럼 보였다. 이곳에서 마르티누는 용기를 내 클래식의 다양한 형식을 탐구하였을 뿐 아니라 이전에 그가 놓치거나 소홀하게 여겼던 부분을 만회하고 채우려 노력했다. 카를 안체를 Karel Ancerl 과 바츨라프 노이만 Vaclav Neumann, Libor Pesek, Jiri Belohlavek 과 같은 다수의 체코 출신의 주요한 지휘자들의 족적을 따라 마르티누의 교향곡 전곡 레코딩이란 업무가 지난 20년간 프라하 라디오 심포니의 명성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노련한 Vladimir Valek 과 Czech Radio Symphony Orchestra에게 주어졌으며,이 레코딩은 2006~7년에 걸쳐 체코 라디오 방송국에서 제작되었으며,국제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의 높은 예술적인 수준이 반영된 빼어난 연주로 완성되었다. Vladimir Valek 과 Czech Radio Symphony Orchestra가 손잡고 내놓은 드보르작 및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전집에 이은 교향곡 전곡 시리즈 세 번째 음반이다.
마르티누는 그의 교향곡 안에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적인 음악어법을 교묘하게 혼합함으로써 매우 아름다운 교향곡을 창조해냈다..여섯곡 모두 충만한 재미로 가득 차 있을 뿐 아니라 진실로 탁월한 작품들이다. 1.2번 교향곡은 각각 교향곡 안에서 다루고 있는 관현악적 음향과 아울러 충만한 에너지와그의 전형적인 창의적 리듬감으로 유명하다. 1942년에 작곡된 교향곡 1번은 쿠세비츠키 부인을 추도하기 위해 작곡한 것으로 이 작품을 유럽 초연한 앙세르메는 “이시대 가장 진정한 심포니스트이다”고 그를 찬양하였다. 1943년에 작곡된 교향곡 2번은 클리블랜드 거주시 체코인 노동자들을 위해 작곡되었으며, 대편성 오케스트라의 작품이지만 작은그룹으로 분할된 악기군이 서로 번갈아 나타나는 실내악적인 구성으로 작곡되어 있다. 1943년에 작곡된 3번 교향곡은 쿠세비츠키의 보스톤교향악단 활동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작품이지만 악화된 전쟁상황을 반영하여 축제적인 분위기는 없고 제2악장은 오히려 비통한 울림이 지배적이다. 종지에 이르러서도 거의 격렬한 크라이막스로 휘몰아가지 않는 절제된 표현을 보이고 있다.. 1945년에 작곡된 교향곡 4번은 제3번 과는 대조적으로 전쟁종결의 기쁨이 가득하게 투영됨 특히 느린악장인 제3악장은 서정성이 풍부한 작품이다. 1946년 작곡된 .교향곡 5번은 뉴욕에서 작곡되었으며, 보다 개선된 환경에서 찾아온 고향에 대한 실현될 수 없는 기대감을 반영한 것으로, 당시 그가 앓던 향수병과 그로 인한 슬픔이 그대로 반영된 작품이다.제2회 프라하의 봄 음악축제에서 초연되었고 ,체코필하모니관현악단에 헌정되었다. 1953년 작곡한 6번 째 교향곡은미국 체재중에 완성하지 못한 유일한 교향곡 그의 5번 째 교향곡이 작곡된 후 7년 후인 1953년 파리에서 작곡 되었다.이 작품은 본래 1951년 뉴욕에서 작곡을 시작하였으나 중단되었다가 1953년 작곡이 재개되었던 것이다..작곡자 자신은 이 작품을 제6번이라고 부르지 않고「세번째 교향적 환상곡」이라고 이름 붙여졌다.「환상교향곡」이라고도 부를 생각이 있었으나 이것은 베를리오즈에게 경의를 나타내 철회 되었다. .1955년에 초연되었으나 그해에 연주되었던 최우수 작품으로서 뉴욕비평가상을 수상 하였다.또한 로제스트벤스키는 이 작품에 대해서「무엇보다 풍부한 세계일것이다.또한50년을 살수 있다면 마르티누의 전작품을 연주하고 싶지만」이라고도 말한적이 있다. 본 작품은 Boston Symphony Orchestra 의 창립 75주년 기념일을 위해 작곡된 것으로 보스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있던 Charles Munch에게 헌정되었으며, 1955년 뮌쉬의 지휘아래 보스턴에서 초연되었다..5일 후에 New York 에서 다시 연주되었으며, 당년 뉴욕에서 초연된 가장 훌륭한 관현악 작품으로 선정되었고 뉴욕의 비평가 써클이 수여하는 상을 수상하였다. 이 작품은 3조의 관악기 연주자들과 브라스, 퍼커션, 현 등 대편성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이다.. 본 교향곡은 자유로운 형식으로 유명하지만 논리적이고 조리가 서있는 접근을 하고 있다. 댓글 : 어제는 마르티누의 교향곡 1번과 2번을 취침전에 잠시 들었는데... 느낌이 코플랜드의 음악을 들을때와 비슷하다. 물론 코플랜드보다 좀더 앞선 작곡가라 코플랜드가 마르티누의 영향을 받은건지는 모르지만...아직 3번 이후론 안들어봐서 모르지만... 일단 교향곡이 미국으로 넘어간 이후에 작곡이 되기 시작한걸로 봐서 마르티누 역시 넓고 광활한 미국을 생각하면서 작곡한건 아닐까? 글 출처 : 플래밍고 (행복은 내가 만드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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