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1년부터 쎄인트 후로이안 교회 오르간 연주자 생활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것보다는 브루크너 (1823 - 1896) 의 깊은 신앙심은 7개의 미사곡을 비롯하여 테 데움, 모데트 등 많은 종교음악을 남기도록 한다. 비단 교향곡분만 아니라 이러한 종교음악들은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는 역할을 하였다. 아베 마리아 (WAB 6)는 1856년에 작곡된 일종의 Modet로 Offerings (봉헌식 혹은 성찬식) 을 위한 작품이다.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
심포니스트로 대위법에 정통한 브르크너는 1824년 9월4일 오스트리아 알스후엘덴에서 태어나고 1896년 10월일 빈에서 고히 잠들었다. 브르크너의 부친과 백부는 다같이 소학교의 교사였고 모친은 여관업자의 딸이었다.그는 형제중에서 장남이었다. 당시의 소학교 교사는 음악에도 풍부한 지식이 있어야 했으므로 다행이도 부친으로부터 최초의 음악교육을 받았다. 부친의 사후 그는 합창단 단원이 되었다.
브르크너는 윈드하구의 소학교 교사가 되어 빈곤한 가운데에서도 쉬지 않고 음악를 공부했다.그 후 성프로리안스에서 교직에 있으며 하루에 오르간을 10시간 이상 피아노를 3시간 동안 피나는 중노동의 노력을 했다.
J.S.바흐의 작품과 G.P.팔레스트리나, A.가브리엘리 이후의 교회음악 연구를 계속하여, 그 스스로도 《레퀴엠》과 《미사 솔렘니스》(1854) 등을 쓰고 그는 30세가 넘어서야 교사직을 떠나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855년에 오르간연주자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린쓰시원의 오르간연주자가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대위법에 밝았다. 그의 시험관이된 헬베크는 꺼꾸로 그가 우리들을 시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라고 말하여 그의 음악이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에 칭찬을 했다. 브륵크니는 그 후 기회를 얻어 키쓰라에게 작곡을 배우고 제크타에게 대위법을 배웠다.
1867년에 제크타의 뒤를 이어 빈의 궁정 오르간연주자가 되었다. 또한 빈의 음악원에서 화성과 대위법을 맡았다. 50세때 빈대학의 명예교수가 되고 다시 철학박사의 칭호를 받았다. 프랑스나 영국에 오르간연주자로서 연주 여행을 한적도 있었다. 오르간연주자의 작곡가 교사로서 근면하고 평온한 일생을 보내고 빈에서서거했었다.
그의 작품에는 9개의 교향곡이 있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낭만적(Romantische)이라는 부제가 있는 제4번 교향곡 이다. 이 곡이 1881년에 초연되었을 때 그는 각 악장이 끝날 적마다 일어서서 인사하진 않으면 안될 정도의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 호인인 시골뜨기의 브르크너는 어떻게 기뼜던지 지휘자 리히타에게 기쁨에 넘쳐 튀어가 “이것을 받아주게, 그리고 내 건강을 위해 한잔해주게” 그는 한 개의 은화를 리히타에게 쥐어준 것이었다. 리히타는 시계줄에 그 은화를 달고 때때로 그날밤을 회상하였다 한다.
브르크너의 음악은 바그너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도 전체의 경향은 아카테믹 했다. 그리고 브르크너와 브람스의 대립은 혹심한 것이었다. 비평가 전통파(反바그너派로 대표격인) 한스릭크은 언제나 브르크너를 욕하며 그가 대위법의 교사가 되는 것도 반대했다. 브르크너가 황제에개 방문했을 때 “한스릭크씨가 나에 대한 평을 쓰지 못하게 해주십소서”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독신으로 일생의 생을 마쳤다. 젊었을 때는 빈곤하여 결혼의 여유가 없었고 정착 결혼할 생각이 났을 때는 이미 늙어있었다. 맥주를 즐겨마시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유일한 그의 낙이었다. 또한 그에게는 방대한 작품을 어려운 대위법에 의해서 작곡한다는 즐거움이 있었던 것이다. 정밀한 대위법을 구사하여 대규모의 교향곡의 작곡에만 전념한 점에 있어서 브르크너의 후계자가 된 것이 마라였다.그는 19세기 후반의 최대 교회음악가였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최대의 교향곡 작곡가로서도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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