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주제 선율은 목관파트에서 제시되는데, 오보에로 연주되는 전반부는 소박한 북유럽 민요풍이고, 클라리넷으로 연주되는 후반부는 낭만적 동경의 느낌을 머금고 있다. 아울러 이 선율의 배후에서 현악기로 새겨지는 토속적 리듬도 귀담아 들어둘 필요가 있다. 피아노가 제1주제를 다룬 후 음악은 계속해서 아니마토(animato, 생기 있게)의 경과부로 진행하는데, 여기에서 부각되는 경쾌한 리듬은 노르웨이의 도약무곡을 연상시킨다. 이어서 피우 렌토(piu lento, 한층 느리게) 부분으로 넘어가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첼로에서 가요풍의 제2주제 선율이 등장한다. 피아노가 이 감미로운 선율을 이어받아 충분히 확장시키면, 음악은 점차 고조되어 첫 번째 클라이맥스에 이룬 후 제시부를 매듭짓는다.
제1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발전부는 상당히 짧은 편이고, 재현부는 고전적인 형식에 충실하다. 이 악장의 진정한 클라이맥스는 종결부 직전에 나오는 카덴차에 놓여 있는데, 작곡가 자신에 의한 이 화려하고 당당한 카덴차 역시 제1주제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구축되어 있다.
2. Adagio (06:04)
'북유럽의 쇼팽'으로 일컬어지는 그리그 특유의 시정이 아로새겨진 완서악장이다. 제1부에서 약음기를 단 현악기에 의해서 폭넓게 펼쳐지는 주제는 다분히 명상적이면서도 동시에 뜨거운 기운을 내포하고 있다. 제2부로 넘어가면 피아노가 이 선율을 영롱한 음색으로 노래하는데, 그 흐름에 섬세하고 우아한 장식이 가미되어 음악은 점차 화려한 모양새를 띠게 된다. 제3부는 제1부가 충실히 되풀이되는 가운데 피아노가 곁들여져 한층 더 풍부하고 고양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3. Allegro moderato marcato (09:46)
론도 소나타 형식으로 구성된 피날레. 목관악기들의 독특한 앙상블로 행진곡풍 리듬이 부각되며 출발한다. 론도 주제는 경쾌하고 재기 넘치는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 역시 노르웨이의 도약무곡을 연상시킨다. 또 관현악이 이 리듬을 넘겨받아 한층 강렬한 이미지를 자아내는 부분에서는 북유럽 전설 속의 '트롤들의 행진'이 떠오른다.
이 악장은 이처럼 '노르웨이의 이미지'들로 가득한데, 무엇보다 중간의 정적인 부분에서 플루트로 제시되는 제2주제가 돋보인다. 노르웨이의 전원, 북유럽의 청명한 하늘 등을 강하게 환기시키는 이 주제는 아마도 그리그가 작곡한 가장 매혹적인 선율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특히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이 선율이 A장조로 더없이 힘차고 뜨겁게 울려 퍼질 때는 피요르드의 웅대한 절경 위로 그리그의 정신이 드높이 비상하는 듯한 느낌에 듣는 이의 가슴마저 벅차오른다.
한편 이 작품은 역사상 최초로 녹음된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1909년에 이루어진 그 역사적 녹음의 주인공은 독일의 거장 빌헬름 박하우스이다. 또 1868/1872년의 초판은 1993년 스웨덴의 피아니스트 로베 데르빙예르의 독주, 준이치 히로카미가 지휘한 노르쾨피니 교향악단의 협연으로 처음 음반에 수록되었다(BIS).
역사상 최초로 녹음된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a단조]는 1868년 여름, 덴마크의 쇨레뢰드에 자리한 목가적인 별장에서 작곡되어 이듬해 봄, 코펜하겐에서 초연되었다. 당연히 그리그 자신이 피아노 독주를 맡았어야 했지만, 그는 크리스티아니아에서의 지휘자 업무 때문에 초연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닐스 가데, 안톤 루빈스타인 등 저명한 음악가들이 배석한 초연은 성공을 거두었고, 작품의 악보는 1872년에 출판되었다. 노르드로크에게 헌정된 이 초판본은 출판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고, '피아노의 제왕' 리스트에게서도 격찬을 받았다. 리스트는 그리그와 두 번째 만났을 때 이 곡을 직접 연주했는데, 작품에 큰 감동을 받은 듯 마지막 부분을 다시 한 번 연주한 다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그 자신은 작품에 만족하지 못해서 적어도 일곱 번 이상 개정을 시도했다. 개정의 방향은 주로 전체의 구성과 관현악법을 보다 세련되게 다듬는 쪽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마지막 개정작업은 1907년 9월에 그가 세상을 떠나기 몇 주 전까지 이어졌다. 그 결과로 1917년에 출판된 악보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개정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곡에서 그리그의 젊은 날의 열정과 시정, 그리고 원숙기의 관현악 기법을 동시에 마주할 수 있다.
그리그가 자신의 유일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한 것은 스물 다섯 살 때인 1868년의 일이었는데, 당시 그는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일단 1866년 10월 크리스티아니아(현재의 오슬로)에서 개최한 공연이 성공을 거두면서 노르웨이 음악계의 새로운 별로 떠올랐고, 그 여세를 몰아 시립관현악단의 지휘자 자리를 꿰찼는가 하면, 1867년 1월에는 노르웨이 최초의 교향곡 작곡가로 알려진 오토 빈테르-옐름의 도움을 받아 ‘노르웨이 음악 아카데미’를 설립하는 등 음악가로서 탄탄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또 1867년 6월에는 사촌인 니나 하게룹과 결혼을 했고, 그 이듬해인 1868년에는 첫째 딸 알렉산드라가 태어났다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젊은 음악가의 당찬 패기와 원대한 포부, 그리고 단란한 가정을 꾸린 한 남자의 순수하고 솔직한 기쁨과 긍정적인 전망이 이 협주곡에 고스란히 투영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곡은 전편에 생기와 활력, 온화하고 감미로운 기운이 넘치면서도 단조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사뭇 독특한 인상을 풍긴다. 그리그가 이 협주곡에서 취한 조성의 유래는 그의 독일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공부하던 시절, 그는 게반트하우스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클라라 슈만이 남편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 로베르트 슈만이 남긴 피아노 협주곡의 조성 역시 이 곡과 같은 ‘a단조’이며, 그리그는 이밖에도 첫 악장을 시작하는 방식을 비롯하여 여러 모로 슈만의 스타일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연관성 때문인지 음반에 두 작품을 함께 수록하는 것은 일종의 공식처럼 관례화되어 있다.
하지만 그리그가 단조를 취한 것이 슈만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노르웨이의 환경과 정서를 표현하기에 장조보다 단조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