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mphony

[스크랩] 프로코피에프 / 교향곡 5번 (Symphony No.5 in Bb major) Op.100

P a o l o 2018. 2. 24.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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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코피에프 / 교향곡 5번

 Symphony No.5 in Bb major, Op.100
 
Sergei Prokofiev 1891-1953



   
 
 
 

프로코피에프는 모두 7곡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교향곡
작곡가의 진면목은 제5번에서 나타난다.
이 작품은 그의 대표적 교향곡이자 소비에트 리얼리즘의 최고 걸작의
 하나이며 현대 음악의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망명했던 작곡가가 고국으로 돌아온 후 1944년에 작곡하여 1945년 초 독·소 전쟁에서
승리하여 레닌그라드가 해방된 것을 축하하는 날 전국에 생중계를 통해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전쟁을 직접 그린 것은 아니지만 그 시대를 반영한 비장감이 감돌고 있다.
작곡가 자신은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의 찬가라 불렀듯이 이 곡엔 밝고 명랑한
서정도 있어 이 양면성이 아이러니컬하게 교차되어 있다.

 
Prokofiev: Symphony No.5 in B flat major Op.100
Conducted by: Young Chil Lee
The George Enescu Philharmonic Orchestra
The Romanian Athenaeum Concert Hall, Bucharest, Romania

 

Sergei Prokofiev 1891~1953
Symphony No.5 in B flat major op.100
1. Andante
00:00
2. Allegro marcato 12:55
3. Adagio 21:28
4. Allegro giocoso 34:35
Valery Gergiev
Mariinsky Theatre Orchestra
  
남러시아의 농학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에게 음악 교육을 받고, 5세 때 이미 작곡을 하는 등 비범한 재능을 나타냈다. 1904년(13세)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재학중에 「피아노 협주곡 제1번」(1912)을 비롯한 초기의 대표적인 작품을 발표하고, 신진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한 R. 슈트라우스(오스트리아)나 드뷔시(프랑스)의 음악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고, 러시아 고전 음악과 서구 근대 음악과의 모순에 괴로와하면서 결국 전통 파괴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1914년(23세) 음악원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런던에서 러시아 발레단의 주재자인 디아길레프를 만나, 그 발레단을 위한 「알라와 롤리 Ala i Lolli」(1914), 「어릿 광대 Skazka pro shuta」(1915)를 작곡했다.

1917년은 러시아 혁명의 해였지만, 그는 밝고 건강한 18세 기풍의 「고전적 교향곡」을 완성하여 이듬해에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망명을 결심한 프로코피예프(러시아)는 이 해 페테르스부르크를 출발,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6월에 일본에 도착, 3회의 연주회를 연 뒤 8월에는 미국에 건너갔다.
1918년부터 2년간의 미국 체류 중에 피아니스트로 활약하면서 창작 활동을 계속해 「피아노 협주곡 제3번」(1921)과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의 사랑 L’amour des trois oranges」(1919) 등을 작곡했지만 호평을 받지 못했다. 1923년부터 파리로 이주해, 디아길레프를 위한 「강철의 춤 Le pas d’acier」(1925)과 그 밖의 발레 음악, 「제2번」(1924)에서 「제4번」(1930)까지의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제4번」(1931), 「제5번」(1932) 등을 완성했다.

◀<10살 때의 프로코피에프>

그러나 이러한 작품의 특징이었던 무내용의 추상적인 서구 모더니즘은 결국 그의 작품 창조의 원천이 되지 못했고, 작곡가로서의 위기 의식을 느낀 그는 1932년(41세) 러시아로 돌아갔다. 귀국 후에는 이미 습득한 모더니즘의 기법을 평이한 형식과 결합시켜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작품을 쓰고자 노력했는데, 그 산물로 모음곡 「키제 중위 Lieutenant Kijé」(1934),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1935), 발레 음악 「로미오와 줄리
에트 Romeo and Juliet」(1935) 등의 작품을 남겼다. 또한 영화 음악에 바탕을 둔 칸타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1939)는 그의 민족적 공감의 열렬한 표현이었다.

독·소 전쟁 발발 후에도 그 적극적인 창작 활동은 계속되었으며, 1944년(53세)에 완성시킨 걸작 「교향곡 제5번」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2차 대전 후에는 다시 서구적 형식주의 경향이 강해져, 1948년(57세)에 구소련 음악회의에서 지다노프에 의해 비판받게 된다.

이 해에 그는 프라우다(Prauda)에 자기 비판의 글을 발표했으며, 그 이후의 작풍은 「
교향곡 제7번(교향곡)」(1952)으로 대표되는 극히 간명 평이한 고전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우랄 민요에 의한 발레 「석화」에서 그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지만, 완성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프로코피예프(러시아)는 전통적인 러시아 음악과 서유럽의 형식주의와의 모순에 항상 괴로와했던 작곡가였다.
그 때문에 그의 작풍은 크게 변화해 왔지만, 결국은 차이코프스키(러시아)에서 현대에 이르는 러시아 음악의 전통을 정통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음악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작으로는 그 밖에 「피터와 이리」(1938), 「피아노 소나타 제7번(독주곡)」(1942) 등이 있다.





 



출처 : 관악산의 추억(e8853)
글쓴이 : 이종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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