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브루크너 / 교향곡 9번 D단조(Symphony No.9 in D minor) WAB 109
P a o l o2018. 1. 31.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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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크너 / 교향곡 9번
Symphony No.9 in D minor, WAB 109 Josef Anton Bruckner (1824~1896)
1악장 : Feierlich, Misterioso 신비적이고 장중하게 (24:05)
제2주제의 도입도 브루크너답다. 그가 하나의 주제로부터 다른 주제로 이동할 때 즐겨 사용한 방법은 갑자기 멈추고 새로 시작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를 ‘브루크너의 휴지’라고불렀다. 이러한 방식은 음악 진행의 긴밀성과 논리성을 추구하는 브람스적인 입장에서 보면 비웃음거리가 될 만하지만 이런 점이야말로 브루크너 음악 특유의 매력이다.
2악장 스케르초는 완전히 새로운 음악이다. 브루크너의 스케르초들은 대개 즐겁고 변덕스러운 분위기를 다양하게 표출하고 있지만, 제9번의 스케르초는 냉소적이고 신랄한 화성으로 끝없이 우리를 협박하고 경고하는 듯하다. 이 신랄함은 야만스런 불협화음으로 변모해 깊은 충격을 던져준다. 다행히 오보에의 선율이 이 지옥 같은 분위기를 구제해주기는 하지만, 그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톤은 전례 없는 것이다. 중간 트리오 부분 역시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유령 같은 음악이다. 브루크너의 다른 음악에서 들을 수 없는 특별한 스케르초다.
Bruckner: Symphony #9 in D Minor
II. Scherzo: Bewegt, lebhaft - Trio: Schnell
Gennady Rozhdestvensky,
Symphony Orchestra of the USSR
Ministry of Culture
3악장 :Adagio Langsam, feierlich 느리고 장중하게(25:22)
3악장은단9도의 극적인 도약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브루크너는 바그너를 불러들인다. 6~7마디에서 현과 목관의 장대한 상승의 제스처는 바그너의 음악극 [파르지팔]의 ‘성배’ 모티브를 연상시킨다. 화성을 해결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표류하는 진행 역시 바그너를 닮았다. 이런 탐색이야말로 브루크너가 이 악장에서 추구하고 있는 아이디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브루크너의 음악이 늘 그렇듯이 으뜸 조를 광대하게 펼치고 확산시키는 방식으로 끝을 맺는다.
Bruckner: Symphony #9 in D Minor
III. Adagio: Langsam, feierlich
Gennady Rozhdestvensky,
Symphony Orchestra of the USSR
Ministry of Culture
19세기 후반 신비롭고 심오한 교향곡을 남긴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
브루크너가 [교향곡 9번]에 쏟아 부은 시간은 무려 10년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결국 미완으로 끝났다. 1887년부터 [교향곡 9번]의 스케치를 시작한 브루크너는 1891년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에 집중했으나 1892년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면서 작곡은 더디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전 생애 동안 괴롭혀왔던 자기비하와 의기소침에 시달리고 있었다. [교향곡 9번]의 작곡과 더불어 다른 작품들의 개정 작업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던 그는 1893년이 되어서야 1악장을 완성했고 이듬해에 2악장 스케르초와 3악장 아다지오를 마무리했으며 1895년에 드디어 교향곡의 마지막을 장식할 피날레의 스케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작업은 해를 넘겼다.
미완성으로 남겨진 브루크너 최후의 교향곡
1896년의 어느 일요일에도 브루크너는 피아노 앞에 앉아 피날레의 스케치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바람이 몹시 심해서 항상 해오던 산책을 15분 만에 끝낸 그는 점심을 먹는 일도 잊은 채 작업에 몰두했으나 갑자기 한기를 느끼고 침대로 향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브루크너는 언젠가 “제9번은 나의 최대 걸작이 될 것이며, 하느님께 이 작품을 끝낼 때까지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신은 그가 [교향곡 9번]을 완성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작곡 행위 자체를 신께 드리는 예배라 생각했던 브루크너에게 [교향곡 9번]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은 저승에서도 한이 되는 일이었으리라. 어쩌면 신은 아다지오 악장으로 마무리되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에 만족했기에 그를 하늘로 불러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장엄하고 숭고한 아다지오 악장만으로도 이 교향곡을 마무리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말이다.
브루크너가 최후의 순간까지 붙들고 있던 그의 [교향곡 9번]은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9번]과 마찬가지로 d단조로 되어 있다. 이는 브루크너에게 매우 불리한 일이었다. 베토벤의 위대한 교향곡과 똑같은 조성으로 작곡된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그 유사성으로 인해 베토벤의 작품과 비교당할 운명에 처했던 것이다. 평생 비평가들의 신랄한 비판에 시달려왔던 브루크너는 저승에서도 비평가들의 악평을 들었을까?
당대 음악평론가들 중에서도 신랄한 풍자로 유명한 한스 폰 뷜로우는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 ‘환희의 송가’에 빗대어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9번] d단조를 ‘불행(Schadenfreude)의 송가’라 비아냥거렸다. 아마도 뷜로우는 브루크너 [교향곡 9번] 3악장을 장식하는 지나치게 장대하고 숭고한 선율을 비꼬았던 것 같다.
베토벤과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의 유사성은 조성뿐 아니라 음악양식에도 드러난다. 두 교향곡의 도입부를 비교해보면 두 작품 모두 웅얼거리듯 조용하게 시작해 광대한 주제선율로 발전해간다. 이는 마치 태초의 혼돈 속에서 우주가 생성해가는 듯한 개시 방법이다. 브루크너는 [교향곡 9번]뿐 아니라 그의 다른 교향곡에서도 이와 같은 개시 방법을 빈번히 사용하여 “브루크너의 모든 교향곡은 베토벤 [교향곡 9번]과 똑같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두 작곡가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베토벤의 도입부는 처음에 모호한 조성으로 신비감을 주다가 점차 커지면서 확실한 d단조 조성을 확립하지만, 브루크너의 도입부는 이와 반대로 확실한 d단조로 시작해 가면 갈수록 혼란에 빠진다. 브루크너다운 신비로운 전개방식이다.
베토벤과의 유사성, 브루크너만의 독창성
브루크너의 많은 아다지오들 가운데서 제9번의 아다지오는 매우 심오하고 특별하다. 그래서 브루크너 학자인 로버트 심슨도 이 악장을 가리켜 이렇게 평했다.
“비록 이 교향곡이 피날레에 의해 완전한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마지막 아다지오에 감사해야한다. 이것은 그의 가장 완벽한 작품은 아닐지라도 그의 가장 심오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과 더불어 미완성 작품의 걸작으로 손꼽히는지도 모르겠다.
브루크너는 그의 [교향곡 제7번]을 바그너의 후원자이자 “예술계의 위대한 왕 루트비히 2세”에게 바쳤고, 제8번을 “지상의 뛰어난 군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게 헌정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제9번]은 “모든 것의 왕이시며 사랑이신 하느님”께 바쳤다. 이 교향곡은 하느님께 바치는 그의 마지막 기도가 된 것이다.
1895년에 펠베데레 궁에 있는 이 부속건물에 들어가 이듬해에 이 곳에서 죽었다. 브루크너는 그의 린쯔 시절부터 빈에 다니면서 시몬 제히터에게 정통적인 작곡법을 배웠는데 그 뒤도 이론의 연구에 여념이 없었다. 그 무렵 바그너의 《탄호이저》와 《로엔그린》을 듣고 감명을 받았고, 1865년에 뮌헨에서 《트리스탄》을 듣고서는 더욱 바그너한테 경도(傾倒)하게 되는 것이다.
1868년에는 빈 음악원 교수가 되어 빈에 정주하였고, 1875년부터는 빈 대학의 작곡이론 교수가 되었다. 그 한편으로는 왕궁 안의 궁정예배당 오르간 주자 노릇도 하면서 만년의 대작에 도전하는 것인데, 그가 노쇠한 뒤 계단이 많은 고층주택에 사는 것을 걱정한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그에게 펠베데레 궁의 단층 부속 건물을 주어 1895년에 이 곳으로 옮기었으나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