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udio Arrau, Piano
클라우디오 아라우 피아노에 있어서 ‘제2의 모차르트’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수여할 수 있는 연주자들은 비교적 많은 편이지만, 한 세기 전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칠레에서 태어난 다섯 살에 불과한 꼬마 신동에게 이런 칭호가 부여된다면, 그것은 쉽게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진과 메스티소의 나라, 유럽의 문화와는 거리를 둔 칠레에서 이러한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예술가가 탄생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이 소년의 이름은 바로 클라우디오 아라우다. 칠레의 모차르트 그는 흔히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루돌프 제르킨과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는 1903년생 3대 피아니스트로 일컬어진다. 러시아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화신인 호로비츠와 현대 독일적 구조주의자로 칭송받는 제르킨과 비교하자면, 아라우는 19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로부터 비롯한 독일 낭만주의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말할 수 있다.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들며 순간 순간의 ‘작은 기적’을 연주 중에 깨달으면서 청중에게 전달하는 그의 직관적인 연주 스타일은 당시의 독일 피아니스트들에게도 찾아보기 힘든 전통의 산물으로서 그만의 창조적인 음악관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름다움과 성실함이 피아니스트에게 있어서 최고의 미덕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이는 클라우디오 아라우를 지칭하기 위한 수사일 것이 분명하다. 벨칸토적인 아름다움과 투명한 톤, 순결함을 연상시키는 터치, 자연스러운 프레이징, 작품을 탄생시킨 작곡가의 의도에 대한 정확하고도 객관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아라우의 아름다운 피아니즘은 호수가에 던져진 돌이 일으키는 잔잔하면서도 명징한 원심파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단아하면서도 청초하다. 특히 아라우에게 있어서 스승의 스승인 리스트 연주에서는 자신이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이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피아니즘이 한껏 만개한다. 그가 연주하는 [사랑의 꿈]이나 [페트라르카의 소네트]의 음표 하나하나에서는 달콤한 꽃향기를 연상시키고, [에스테장의 분수]에서는 청량한 자연의 이미지가 묻어나오는 한편, 피아노 소나타나 [단테 소나타]에서는 한 편의 장대한 드라마가 펼쳐지기도 한다. 리스트로부터 집시적이거나 파괴적인 이미지를 말끔히 걷어내고 귀족적인 우아함과 고차원적인 아름다움만을 수놓는 아라우의 연주는 한 마디로 경이로움 그 자체로서 오랜 동안 전세계 애호가들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어왔다.
리스트의 직계 제자로서 그는 독일-오스트리아 레퍼토리에 깊은 애정을 갖고 연주해 왔는데, 이 가운데에는 베토벤이라는 거대한 산이 자리잡고 있다. 빌헬름 켐프와 제르킨과 더불어 20세기 베토벤 연주계를 3등분했던 그는 아름답고 상상력 풍부한 베토벤 해석의 원형으로 칭송받았다.
그는 단 한 차례의 전곡 레코딩만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두 번째 80년대 디지털 레코딩은 그의 서거로 인해 완성되지 못했다) 베토벤 해석의 빛나는 금자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피아노 협주곡은 세 번에 걸쳐 전집을 완성하여 낭만주의적 베토벤 협주곡 해석의 살아있는 화석으로서 그의 명성은 대단히 높았다. 그가 베토벤에서 보여준 음향에 대한 탐미적 접근과 음악적 콘텍스트에 대한 치열한 탐구에 비견할 만한 피아니스트는 이전 시대의 에밀 폰 자우어(그 역시 리스트의 가르침을 받았다) 정도가 유일할 것이다. 그러나 그를 결코 느린 템포를 고집하는 심오한 예술가로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젊은 날의 아라우의 연주는 빠른 템포와 기계적일 정도의 정교함, 치열한 열정을 토해내는 전형적인 비르투오소임을 음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가 50년대에 녹음한 베버의 [콘체르트슈튀크]나 리스트의 헝가리 환상곡 등등은 대단히 치열한 에너지가 넘실거리는 녹음인 한편, 60년대까지 그가 실황 연주에서 보여준 베토벤 소나타는 한층 직선적이고 스케일 큰 스타일이 강조되어 있다. 그 또한 동갑내기 피아니스트들처럼 나이가 들면서 한층 원숙해진 해석관에 따라 외향적인 비르투오시티보다는 내면적인 강렬한 울림을 추구했던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의 계승자 1903년 2월 6일 칠레의 칠란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난 아라우는 한 살 때 승마사고로 안과의사인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피아노 교사인 어머니로부터 음악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후 네 살 때 글자를 익히기도 전에 악보를 읽을 수 있었고, 한 번 들은 것을 피아노로 칠 수 있는 천부적인 능력을 가졌던 그는 그 나이에 이미 바흐와 베토벤을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었다. 다섯 살 때에 이미 모차르트와 베토벤, 쇼팽의 프로그램으로 첫 공개 연주회를 가질 정도로 천재적인 음악성을 드러낸 그는 8세가 되던 1911년 칠레 국가 장학생의 자격으로 독일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베를린의 슈테른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던 아라우는 여기서 리스트의 제자이자 저명한 피아노 교수인 마르틴 크라우제를 만나게 된다. 에트빈 피셔의 스승이기도 한 크라우제는 어린 아라우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고 그를 피아니스트를 넘어서서 전인적인 예술가로 교육시키는데 전념했다. 무보수로 그를 가르쳤던 크라우제가 1918년 서거한 뒤 아라우는 일체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자신을 계발했는데, 그 이유는 크라우제 외의 다른 가르침으로 인해 혼란을 겪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만큼 크라우제가 아라우에게 끼친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는 크라우제로부터 리스트로부터 비롯한 해석과 영감의 전통, 정신적, 물리적 연주 기법 모두를 물려받았다. 특히 그는 음표와 같은 의미를 갖는 트릴과 쉼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이는 아라우 연주의 가장 독특한 스타일로 자리잡게 되었다. 피아노 뿐만 아니라 크라우제는 어린 아라우에게 오페라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듣게 해 주었고, 문학과 미술, 무용, 연극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 또한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끔 이끌어주었다. 이는 후일 아라우가 전인적인 예술인으로 성장하는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다시 말해 그는 스승으로부터 리스트의 음악뿐만 아니라 19세기 유럽의 문화를 통째로 전수받았던 것이다.
11세에 이미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과 브람스의 [파가니니 변주곡] 등을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었던 아라우의 베를린 데뷔는 1914년, 그러니까 11세의 나이에 이루어졌다. 이후 크라우제의 추천으로 아르투르 니키쉬, 칼 무크, 빌렘 멩겔베르크와 협연하여 이들 대지휘자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한편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협연 이후 그의 음악 세계에 빠져들었던 아라우는 독일을 떠날 때까지 그의 연주회에 빠짐없이 참석할 정도로 존경을 표했다. 1925년에는 슈테른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고 1927년에는 제네바 국제콩쿨에서 우승하는 등 상승세를 타던 아라우는 1930년대에 접어들며 레코딩을 시작하는 한편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1940년 독일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아라우는 신대륙에서 새로운 캐리어를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특유의 이지적인 스타일과 그 안에 꿈틀대는 라틴적인 열정, 리스트에서 비롯한 독일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독창적인 세계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그의 연주는 단 번에 청중을 사로잡았다. 미국 콜럼비아(CBS의 전신)에서 남긴 그의 녹음들은 당시 그가 애용했던 볼드윈 피아노의 독특한 질감과 비르투오소로서의 기백이 넘실거리는 훌륭한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튜디오 레코딩에 관대헀던 연주자 라이브 레코딩만을 고집하거나 스튜디오 레코딩에 신경질적인 결벽증을 보였던 동료 피아니스트들과는 달리 그는 스튜디오 레코딩에 있어서 대단히 관대했던 모던한 연주자이기도 했다. 오히려 여러 공간적, 음향적 제약이 있는 라이브 레코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정도다. 1960년대 이후 필립스(Philips) 레이블의 전속 아티스트로 계약하면서 집중적으로 레코딩을 하기 시작하여 방대한 디스코그래피를 남길 수 있었다. 악기의 문제를 들며 바흐 레코딩은 최대한 자제했지만, 모차르트, 베토벤, 슈만, 리스트, 슈베르트, 브람스를 비롯한 고전-낭만주의 시대의 오스트리아-독일 레파토리를 모조리 섭렵하며 백과사전에 비견할 만한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했던 쇼팽 또한 독특한 향기를 발산했던 소중한 레파토리였다. 많은 레코딩과 연주 무대를 경험한 피아니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비르투오소답게 그는 실내악 연주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은 편이었다. 다만 젊은 시절 요제프 시게티, 만년에 이르러 아르투르 그뤼미오와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만을 녹음으로 남겼을 정도다. 그는 평생토록 미국과 서유럽, 동유럽, 러시아, 멕시코, 남아메리카, 자신의 고향인 칠레는 물론이려니와 일본과 한국(1987년 내한공연)에 이르기까지 전세계를 돌며 연주 여행을 즐겼다. 자연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음악을 사랑하는 청중을 사랑했던 그는 각 도시마다의 청중들의 반응과 분위기에 민감했는데, 특히 한국과 멕시코, 러시아의 청중에 잠재되어 있는 음악적 가치에 대한 호기심과 존경심에 놀라움을 표하곤 했다. 이렇듯 음악과 청중에 대한 겸허하면서도 진심어린 태도로 인해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한결 같은 찬사와 존경을 받으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르트벵글러의 음악을 추종했던 그는 음악에 있어서의 자발성과 더불어 작곡가의 의도에 대한 절대적인 충실함을 우선시했다. 게다가 그는 정열과 상상력 없는 연주를 혐오하면서 진지한 통찰력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꿰뚫은 창조적인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 연주자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인본주의자였던 그의 예술은 피아노 음악에 대한 가장 고전적이고 가장 혁신적인 창조력을 보여주는 본보기로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많은 피아니스트들과 음악 청중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88세가 되던 1991년 유럽 연주회 여행을 진행하던 아라우는 오스트리아의 뮈르츠쭈슐라크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떴다. 그는 당시 바흐의 작품을 비롯하여 새로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 멘델스죤, 레거, 부조니, 불레즈의 [피아노 소나타 3번] 등을 녹음하려고 준비중이었다. 이렇게 마르쿠제-리스트-체르니-베토벤으로 이어져 내려왔던 독일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위대한 전통은 아라우의 죽음과 더불어 신화의 영역으로 사라져버렸다. 약력 1911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이주 1914 11세의 나이로 베를린 데뷔 1925 슈테른 음악원 교수 취임 1927 제네바 국제콩쿠르 피아노 1등상 1930 12번의 연주회를 통해 바흐 건반음악 전곡 연주 1940 독일을 떠나 미국에 정착 1987 한국 내한 공연 1991 오스트리아에서 타계 - 글 박제성 / 음악 칼럼니스트,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 역자
-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써 온 음악 칼럼니스트 공연, 방송, 저널활동, 음반리뷰, 음악강좌 등 클래식 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쇼팽 녹턴 클라우디오 아라우 Frederic F Chopin 1810 ~ 1849 폴란드 Claudio Arrau,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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