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 프랑스의 남동부 일대, 즉 론 강 하류에서 알프스 산맥에 이르는 지방을 일컫는 명칭이다. 그러나 느낌표를 사용한 데서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내가 이 지명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은 그러한 사전상의 정의를 넘어선 것이다. 이 지명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언제나 그곳에 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곤 한다. 이 충동은 너무나 강렬한 것이어서 거의 고통스럽기까지 하지만, 한편으론 무척 감미로운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곳에 대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미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이 이런 충동을 낳은 것이리라.
영화 <마르셀의 여름>에는 프로방스의 풍경이 아름답게 등장한다. 꼬마 마르셀이 여름을 보내기 위해 찾아갔던 프로방스…. 문학 작품을 통해 막연하게 알고 있던 그 지방의 풍광은, 비록 좁은 화면 속에서였지만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울창한 수목과 황량한 돌산이 어우러진, 그곳에 내리쬐는 햇볕만큼이나 강렬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풍경…. 그 풍경은 영화 줄거리 자체보다도 더 인상적이었다. 그러한 자연 속에 나고 자란 이들은 아마도 소박하면서도 정열적인 사람들이리라. 알퐁스 도데의 희곡 <아를의 여인>(‘아를르의 여인’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더 많은데, 잘못된 명칭이다)에 나오는 여인이 그랬듯이 말이다.
두 개의 모음곡으로 구성된 비제의 성공적 작품
도데의 작품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마지막 수업>과 <별>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다른 작품들까지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아를의 여인>만 해도 비제가 음악을 붙임으로써 구원해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덜 알려졌을 것이다. 음악 얘기를 하기 전에, 도데의 원작이 우리나라에 그리 잘 알려져 있지는 않은 만큼 이에 대해 대강 설명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이 작품은 3막 5장으로 되어 있으며(5막으로 보기도 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를 인근의 남프랑스 농가에 사는 청년 프레데리는 아를의 투우장에서 한 여인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보수적인 집안 어른들은 여인의 과거가 불순하다는 이유로 둘의 결합에 반대한다. 고민에 빠진 프레데리는 결국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비베트와 약혼한다. 결혼식 전날 밤에 프레데리의 집 뜰에서 축하 잔치가 벌어지는데, 여기서 잔치에 초대받아 온 아를의 여인이 춤추는 장면(실제 희곡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을 목격한 프레데리는 결국 일깨워진 고뇌에 괴로워하다 2층 창문에서 투신자살하고 만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책으로 읽을 수도 있다. 다만 희곡 버전은 국내에 번역된 것이 없고, 같은 제목의 단편으로만 구할 수 있다. 도데가 희곡으로 개작하기 몇 년 전에 쓴 단편에는 주인공 이름이 프레데리가 아니라 장으로 되어 있는 등 몇 가지 사소한 차이가 있기는 하나 내용은 동일하다.
남프랑스 아를의 추수 장면을 그린 반 고흐의 ‘추수’
도데의 희곡은 발표된 바로 그 해인 1872년에 비제의 부수음악을 곁들여 상연되었다. 비제가 당시 창작력의 절정기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희곡과 음악의 성공 여부에 대해서는 많은 곳에서 상반되게 기술하고 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둘 다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연극은 21회에 걸쳐 공연된 뒤 그대로 묻혀버렸고, 비제의 음악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아기자기하다’는 등 평가가 그리 좋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인기를 끌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이 지닌 진가를 알고 있었던 비제는 곧장 27곡에 달하는 원곡에서 일부를 추려내 편집하고 합창과 소규모의 극장 오케스트라용이었던 원래의 편성을 대규모의 정규 관현악용으로 고쳐 네 곡으로 이루어진 모음곡으로 개작했다.
이렇게 탄생한 <아를의 여인 모음곡>(현재는 1모음곡이라고 한다)은 처음부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비제 사후 4년 뒤에는 작곡가의 친구이자 파리 음악원 교수인 에르네스트 기로(그는 비제의 <카르멘>에 레치타티보를 붙이고 오펜바흐의 유작 <호프만의 이야기>를 보필해 완성하기도 했다)가 다시 2모음곡을 만들어냈으며, 이 모음곡 역시 오늘날에는 1모음곡과 대등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원곡이 27곡이라고 하지만 악상이 중복되는 경우가 많아 모두 소개할 필요는 없을 듯하며, 모음곡 버전을 기준으로 각 곡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제2모음곡
1. 목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장중하고 유장한 선율이 프로방스의 광활한 대지를 펼쳐 보이며, 중간부에서는 큰북을 비롯한 타악기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프로방스 민요 선율을 노래한다. 3부에서는 1부의 악상이 축약된 형태로 반복된다.
2. 간주곡
엄밀한 의미에서, 2모음곡 가운데 비제의 원곡을 그대로 살려 쓴 것은 이 곡뿐이다. 엄숙하고 진지한 악상이 연주되다가(다른 사람이 이 악상에 ‘아뉴스 데이’ 가사를 붙여 편곡하기도 했다) 중간부로 넘어가면 색소폰이 차분하면서도 간구하는 듯한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준다.
3. 미뉴에트
기로는 여기서 ‘일탈’을 저지른다. 비제의 부수음악이 아니라 그의 다른 오페라 <아름다운 페르트의 아가씨>에서 곡을 따와 모음곡에 넣어버린 것이다. 하프의 반주로 애잔하게 흐르는 플루트 선율은 통상적인 미뉴에트와는 매우 다르지만 정말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어쨌든 당시에는 미뉴에트로서는 낯선 악상에 의구심을 느낀 사람도 있었던지, 누군가가 기로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명색이 미뉴에트인데 좀 신바람 나는 곡이어야 하지 않나?” 그랬더니 기로 왈, “아니, 여주인공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남자 주인공은 자살하는 판국에 신바람 날 게 어디 있나?”
4. 파랑돌(Farandole)
앞서 나왔던 ‘세 왕의 행진’과 프로방스 춤곡인 ‘파랑돌’ 선율을 짜 맞춘 곡이다. (좀 이야기가 엇나가는 것 같지만, 여기서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파랑돌’을 ‘파란색 돌’인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얘기 말이다. 말이 난 김에 하는 말이지만, 같은 착각을 했던 분들은 솔직히 털어놓길 바란다. 슬픔뿐만 아니라 ‘쪽팔림’도 나누면 반이 된다!) 이를 두고 기로의 자의적인 편곡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실 비제 자신이 부수음악의 마지막 막에서 두 악상을 결합한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따라서 기로가 한 것은 이를 조금 다듬은, 말하자면 극히 단순한 편집 작업에 불과했다. ‘세 왕의 행진’ 선율로 당당하게 시작해 잠시 카논 스타일로 발전하다가, 빠르고 활기찬 파랑돌 선율로 넘어간다. 그러다가 두 악상이 번갈에 등장하고, 마침내는 둘이 한 데 어울려 열광적인 클라이맥스를 구축한다.
프로방스의 밝은 햇살과 아름다운 들판
개인적으로 프로방스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문학 활동을 통해 고향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도데의 글보다도 파리 태생인 비제의 음악이 더 많은 ‘프로방스’를 느끼게 한다. 어차피 책이나 음악이나 간접 경험이고, 이로써 획득되는 이미지야 어차피 가상일진대 굳이 우열을 논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이제 그곳에는 도데의 <별>에 등장했던 것과 같은 순진한 목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비제의 <아를의 여인>에 나왔던, 이 잊을 수 없는 여인은 거기에 여전히 있으리라. [네이버캐스트 2010.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