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스타코비치//피아노 협주곡 제2번 F장조 Op.102
| "쇼스타코비치//피아노 협주곡 제2번 F장조 Op.102 [레너드 번스타인(pf,cond)뉴욕 필"] Shostakovich Concerto For Piano And Orchestra No.2 In F Major Op.102 New York Philharmonic Orchestra Leonard Bernstein, piano & cond 1958년 녹음
1악장 (Allegro) 2악장 (Andante) 3악장 (Allegro) Dmitri Shostakovich, Piano Orchestra National de la Radiodiffusion Francaise Andre Cluytens, Conducted 이 곡은 첫 번째 협주곡과 상당한 시간차를 두고 작곡되는데, 두 번째 협주곡의 탄생에 결정적인 모티브를 제공한 것은 작곡가의 아들 막심 쇼스타코비치이다. 1938년 태어난 막심은 아버지를 닮아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에 상당한 재능을 보인다. 드미트리는 자신이 아버지를 여윈 나이와 자신의 아들이 같은 나이가 되던 1954년, 아들과의 피아노 연탄용으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티노 작품 94를 작곡했다. 물론 남다른 의미가 있었던 이 작품에 대해 무척이나 정성을 들인 흔적이 남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장중한 서주로 시작해 육중한 걸음걸이로 나가던 곡은 갑자기 분위기를 일신해 장난기 어린 속주부로 넘어간다. 이는 협주곡 1번에서 들리던 악상들과 근본적으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음반에서는 원래의 의도와 같이 드미트리와 막심 부자의 연탄 연주로 들을 수 있는데, 이는 무척이나 소중한 경험이다. 1957년, 쇼스타코비치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티노를 바탕으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성한다. 역시 자연스럽게 아들을 염두에 두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피아노 협주곡 2번은 1번이 쓰여진 지 무려 24년이 지난 1957년도에 작곡 되었습니다. 모두 3악장으로 구성되었고, 전체적으로 힘있고 활달한 분위기이지만 안단테의 2악장은 모짜르트나 다른 대가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작품에 비겨... 그 고요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오히려 더 뛰어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마음을 적시는 고요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하드한 힘과 분위기 묘하게 잘 조화되어 있는 곡 입니다. 2번 협주곡은 눈부신 피아노 비르투오시티와 장대한 오케스트라의 다이내믹의 역동적인 쾌감과 쾌속질주의 시원함을 안겨준 1악장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도 잘 연주된 쇼팽 1번 협주곡 2악장의 감동에 비견할 만한 잘 절제된 심도 깊은 낭만성과 호화스럽되 차분한 음색을 들려주는 안단테 악장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좋은 대조를 이루는 3악장에서 그 건강한 힘과 재기발랄함이 리튼의 치밀한 앙상블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 또한 대단히 흥미롭다. Shostakovich 쇼스타코비치 (1906.9.25~1975.8.9) 소련의 작곡가. 페테르부르크 출생. 어려서부터 페테르부르크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우고, 11세 때 글랴세르의 음악학교에 들어가 정규의 작곡공부를 시작하였다. 러시아혁명 후인 1919년에는 페트로그라드음악원에 입학, L.니콜라이에프에게 피아노를, M.시타인베르크와 A.K.글라주노프에게 작곡을 배우고 25년에 졸업하였다. 졸업작품인 《제1교향곡》은 소련뿐 아니라 세계 악단에 그의 이름을 떨치게 하였다. 당시 페테르부르크에는 유럽의 새로운 경향의 음악, 즉 I.F.스 트라빈스키의 원시주의, A.베르크의 표현주의 작품들이 한창 연주되었으므로, 그도 그들의 작품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한편 이 무렵부터 예술에서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가 34년에 발표한 (므첸스크의 맥베스부인)이 공산당의 예술운동에 역행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창작에 대한 이러한 간섭은 당연히 문제가 되었으나, 그는 이 비판을 견디어 내고 작풍을 전환하여 37년의 《제5교향곡》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40년 《피아노5중주곡》으로 제1회 스탈린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방공 감시원으로 종군하였고, 42년 《제7교향곡》으로 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 그러나 대전 후인 45년에 발표한 《제9교향곡》은.. 그 경묘한 내용과 신고전적 작 풍 때문에 타락한 유럽 부르주아지의 형식주의에의 추종”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즉 ‘지다노프 비 판’이다. 그러나 49년의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와 51년의 합창모음곡 《10의 시(詩)》로 인기를 회복하고 또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하여 27년 쇼팽 국제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하였다. 37∼41년에는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43∼48년에는 모스크바음악원의 작곡교수를 지냈다. 작품에 15곡의 교향곡 외에 현악4중주곡을 비롯, 기악곡·오페라·오라토리오·발레음악·영화음악 등 많은 걸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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