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피아니스트 - 어빈 니레지하치(Ervin Nyiregyhazi)
4월이 되면 필자는 4월에 세상을 떠난 한 사람의 슬픈 피아니스트를 회상하고는 한다. 어빈 니레지하치(Ervin Nyiregyhazi).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호로비츠나 루빈스타인 이상으로 떠들석할수 있었던 그 이름이 어둠 속으로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지만 부당하게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그의 빛이 비극의 베일속에 뒤덮인채, 여전히 어둠의 한 구석에서 꺼지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다.
4세 때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서 6세때에는 스스로 작곡한 피아노곡을 최초로 공개연주했고, 12세 때에 이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데뷔공연을 가졌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놀라기에 충분하다. 그 후로 청중 앞에 나타날 때마다 충격과 함께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그는 마치 신동의 대명사와 같은 존재였다.
암스테르담 심리학 연구소의 저자 레베즈 박사는 그를 모델로 삼아 펴낸 <음악 신동의 심리학>이라는 저서를 통해 '초견 능력, 기억력, 즉흥연주, 그리고 조바꿈이나 작곡능력에 있어 어린 시절의 니레지하치는 모짜르트에 견줄 만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자라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했다기 보다는 이미 모든 것을 갖추고 태어났다'는 것이 레베즈의 결론이었다.
이런 놀라운 신동이 어릴때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으리라는 것을 쉽사리 짐작할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때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던 니레지하치는 이제 망각의 깊숙한 늪속에 잠들고 있는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30이 될까 말까 하는 나이에 무대에서 자취를 감춘뒤 반세기도 넘는 세월이 흐르고 난 지금 누가 그를 기억할 것인가.
'리스트 이래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
1903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니레지하치는 4세 때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6세 때부터 하이든의 소나타, 그리그의 서정적 작품집, 쇼팽의 왈츠와 함께 자작의 소품을 연주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8세 때인 1911년에는 영국왕실로 초청을 받아 버킹검궁의 메어리 여왕 앞에서 어전 연주회를 가졌다.
10세때에 리스트 음악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는 레오 웨미네르에게 이론을, 그리고 이슈트반 토만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에른스트 폰 도흐나니에게도 배웠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는 순탄한 출발이었다.
그러나 타협을 모르는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아주 어려서 끊임없이 어머니와 충돌하고 있었다. 어린 자식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의 어머니는 자식을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려고 했고, 어린 니레지하치는 어머니의 세속적인 탐욕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언제나 아들편을 들어주던 아버지가 1914년 (11세 때)에 세상을 떠나자 모자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될 수 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불행한 일은 그 무렵 그가 리스트를 알게 된 일이다. 그때까지 바흐와 베토벤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연주의 폭이 제법 넓었던 그에게 바이올리니스트 페렌츠 베체이는 리스트를 연주해 본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젓는 그에게 베체이는 "헝가리 사람이라면 응당 리스트도 연주해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다시 물었다. 리스트만 연주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었지만, 내향적인 사람이 종종 외곬으로 빠져 거기서 결코 헤어나지 않으려는 비극적인 성향을 타고난다. 그리고 니레지하치는 그때부터 리스트에게만 푹 빠져버렸고 바로 그 일이 그의 비극을 재촉하는 악재가 되고 말았다.
1918년 아르투르 니키슈가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리스트의 협주곡을 연주했을 때, 베를린의 신문들은 '리스트 이래의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리스트 전문 피아니스트로 부각되었으나 그 무렵까지만 해도 그는 리스트 이외의 작품도 가끔 연주하기는 했다.
1919년 당대의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일컬어지던 라흐마니노프를 대신하여 오슬로에서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을 연주했을 때, 오슬로의 신문들은 그 광경을 이렇게 보도했다.
'라흐마니노프를 기대하고 있었던 청중들은, 거장 대신 16세의 꼬마가 등장하는것을 보고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작은 손이 건반에서 뛰놀기 시작하는 순간 청중들은 한결같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고, 이내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아쉬움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청중들은 꿩대신 닭이 아니라 닭대신 봉이었다고 흥분하고 있었다.'
그의 선풍적인 인기는 그 다음해의 카네기홀 데뷔 공연으로 불 붙어갔다. 리듬 과 강약의 처리에 있어서 약간의 자의적인 데가 있다고 비판하는 소리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기사는 그를 가리켜 '리스트의 재래'라고 흥분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카네기홀 공연에 이어진 보스턴 공연에 대해 올린 다운즈는 "지금까지 들어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도 더 아름다운 톤으로 더욱 고귀하고 더욱 시적인 음악을 만들어냈다"는 찬사를 그에게 쏟아부었다.
신동으로 칭송을 받다 갑자기 자취 감춰
이렇듯 곳곳에서 선풍적인 열광을 불러 일으켰던 그가 때로는 굶주리고 때로는 뉴욕의 지하철에서 밤새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고 말한다면 누가 믿을 수 있으랴. 그러나 그 믿을 수 없는 일이 그에게는 종종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도대체 현실감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피아니스트여서 그의 계약금이 얼마이며 그것이 누구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버렸는지 일체 알지 못했다. 그리고 흥행업자들은 그의 그런 순진성을 악용하여, '풀도 먹이지 않고 우유만 짜내려는'악랄한 사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 악덕 흥행업자들을 피하기 위해 그는 어느 여인의 손짓에 끌려들었다. 그 보다 11세나 손위인데다 이미 여러 차례 결혼경력이 있었던 메어리 켈렌이라는 그 여인은 팔을 넓게 벌리고 그를 안아주면서 말했다.
"이제는 더 이상 걱정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지켜줄테니까요."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것이 앙큼한 승냥이의 미소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노린 것은 오직 그가 벌어들이는 돈뿐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쓸쓸히 그녀 곁을 떠나갔다. 그러나 하나의 함정을 탈출하면 또 하나의 함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어 그가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착한 흥행업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리스트에게만 집착하여 레퍼토리를 넓히려 하지 않는 그의 고집 때문에 그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점점 더 사기꾼들의 희생물이 되어갔다. 어떤 사기꾼은 그를 서커스단으로 끌고 갔는데, 누구든 미발표 악보를 가지고 오면 즉석에서 초견으로 그것을 연주해 보이는 묘기를 보여주는 희한한 쇼에 출연시키려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그 일을 거침없이 해냈지만,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슬픔의 골이 깊어갔고, 마침내 음악계에서 자취를 감추고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30세 안팎의 일이었다.
그후 그는 뉴욕 부두에서 하역 노동자로 일하기도 하고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부랑아로 전락하여 아무도 그를 왕년의 신동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한때 살고 있었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니레지하치가 홀연히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1973년 5월 6일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뒷거리에 '리스트의 재래, 세기의 피아니스트 니레지하치 40년만에 무대에 서다' 라는 초라한 포스터가 나붙은 것이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오랜 침묵 끝에 다시 서도록 했던 것일까. 거기에는 눈물겨운 사연이 숨어 있었다. 그가 곤궁에 처해 있었을 때 그는 엘시 스완이라는 여인으로부터 조그맣지만 따뜻한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배신과 협잡 그리고 사기에만 시달렸던 그에게는 조그만 온정조차도 눈물겨운 것이어서 그녀의 따스한 도움이 오래도록 그의 언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한때 젊고 싱싱하던 엘시 스완이 79세의 노파가 되어 누구 한사람 돌보아줄 사람도없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돕기로 했다. 다만 그 고귀한 여인에게 까닭없이 도움을 주겠다면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지도 몰라서, 고심끝에 그는 좀더 당당한 방법을 찾아냈다. 남편이 아내의 병을 돌본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데 생각이 미친 그는 그녀에게 구혼을 했다. 이렇게 해서 70세의 신랑이 죽어가는 노파를 아내로 맞았다.
아내의 입원비를 마련하기 의해 그가 돈을 벌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40여년만에 겨우 몇번의 리허설을 거쳐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나 그 연주회는 초라할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초라한 연주회장에 뜻밖의 일이 벌어지게 된다. 국제피아니스트 협회의 미국 서부지역 지부장이던 테리 맥네일이 우연히 그 연주회의 한 구석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그는 물론 니레지하치라는 이름을 전혀 몰랐다. 다만 40여년만에 다시 무대에 선다는 희한한 피아니스트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발길이 이끌렸을뿐이다. 그런데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맥네일은 가슴이 설레기 시작하고 그 연주에 점점 넋을 잃고 말았다.
40여년만에 나타나 연주회 열어
마지막 프로그램이었던 리스트의 <두개의 전설>이 막 연주되려고 했을 때에야 그는 자신의 무릎 위에 카세트 녹음기가 놓여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허겁지겁 녹음기 버튼을 눌렀다.
그 후 맥네일은 알리시아 데 라로차, 게릭 올슨, 조지 볼레 등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을 만날 때마다 그가 녹음했던 잡음투성이의 그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목격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뉴욕 타임스>의 음악평론가 해럴드 숀버그는 '19세기의 연주 스타일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20세기 후반에 아직도 살아 남아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할수 있었겠는가. 불완전한 녹음을 통해서나마 그 기적적인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커다란 축복이다'라고 흥분했다.
숀버그의 그 글을 통해 니레지하치는 다시 세상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CBS사(社)가 재빨리 그의 연주를 녹음하여 두장짜리 음반을 내놓았다. CBS가 현명했더라면 그때 좀 더 많은 곡을 녹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약삭빠르게도 반응을 보아가면서 그 다음 일을 생각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CBS가 머뭇거리고 잇는 동안 니레지하치는 또 다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엘시 스완이 눈을 감아버린 다음, 그에게는 더 이상 연주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텔덱(Teldec) 레이블에서는 1973년에 있었던 연주회의 실황녹음을 레코드로 내놓았다. 포터블 카세트로 엉성하게 녹음되어 그 상태는 최악이라 해도 그 <두개의 전설>은 모든 면에서 우리를 오래도록 감격시킬 만한 전설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 당당함, 그 열기, 그 흡인력을 우리는 니레지하치 아닌 어느 연주자를 통해서 다시 맛볼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슬픈 이야기를 안다면 누가 그 연주를 눈물없이 들을 수 있을 것인가.
40년 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았던 피아니스트가, 부두의 노동자로 굳어져버린 손끝으로, 외로움에 지쳐 스스로의 몸을 지탱하기도 어려운 노구로 어떻게 이런 연주를 들려줄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지상에는 간혹 기적이 있다. 그리고 니레지하치의 이 연주야말로 바로 그 기적의 소산, 기적의 구원(救援)이다. 니레지하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사람들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곧잘 이렇게 묻고는 한다.
"그후 그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아직도 살아 있는가."그러면 필자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한다."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는 그후 또 다시 세상을 등지고 사라지고 말았으니까."필자는 아무래도 "몇년 전(1987년 4월 8일) 그는 쓸쓸히 숨지고 말았다"고 말하기가 싫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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