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olin.Viola

[스크랩] 비에니아프스키 / 화려한 폴로네이즈 1번(Polonaise Brillante No.1 in D major) Op.4

P a o l o 2013. 6. 29.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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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onaise Brillante No.1 in D major, Op.4

 

비에니아프스키 / 화려한 폴로네이즈 1번

 

Henryk Wieniawski 1835~1880

 

 

 

 

 

 

 

Polonaise Brillante No.1 in D major, Op.4
Jascha Heifetz, Violin
Emanuel Bay, Piano

 

 


하이페츠 (Heifetz, Jascha, 1901~1987)
위음원은 '수진'님께서 올려주셨습니다.

비에니아프스키는 천재적인 바이올린스트로 여겨지고 있다. 두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포함해서 그의 작품은 어려운 기교를 가지고 있어 바이올린 레퍼토리로서 많이 연주되고 있다. 그는 사후에 얻은 명성이 많다. 1952년과 1957년, 폴란드 우편 직인에는 그의 얼굴이 도안되었다. 1979년 주화된 100 즐로티 동전에는 그의 얼굴이 있다. 체코브카 강에 있는 한 도시에는 비에니아프스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반면 "Russian bow grip"이라고 불리는 기법은 "Wieniawski bow grip"이라고 불리워야 한다. 비에니아프스키는 그의 학생들에게 악마의 트릴을 연주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그만의 stiff bowing을 가르쳤던 것이다. 첫회의 비에니아프스키 바이올린 콩쿨이 1935년 바르샤바에서 열렸고, 1952년부터 5년마다 국제 콩쿨이 열리고 있다. - WEB

 

 

바이올린의 낭만주의자 비에니아프스키

폴란드의 루블린 출생 비에니아프스키(1835~1880)는 온통 피아니스트로 가득한 유명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10세를 전후하여 그는 이미 동생 조제프 비에니아프스키와 함께 연주여행을 다녔는데, 그의 신동으로서의 연주여행은 8년 이상 계속됐다. 이 시기에 비에니아프스키는 혹평가 세로프로부터 “이들 형제는 어릴 때 잠시 스쳐가는 신동이며, 비르투오조적인 재주 뿐이다”라는 평을 듣기도 하는데, 그는 자신의 작곡을 통해서 이런 혹평들이 틀렸음을 증명했다. 13세부터 작곡을 시작한 비에니아프스키는 5년 후 자신의 작품번호 14번의 곡들을 출판한다. 이중에서 화려하고 낭만적인 콘체르토 1번은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다. 그 후 그는 실내악 음악가로서 또 독주회 연주자로서 빈번히 연주하게 되는데 24세 때부터 피아니스트 안톤 루빈스타인과 짝을 이뤄 연주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런던에서는 베토벤 콰르텟 소사이어티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연주하기도 했다.

1860년에 러시아의 음악 발전을 위해 루빈스타인이 그를 데리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12년 동안 러시아 황제의 솔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러시안 뮤직 소사이어티의 리더로서, 또한 상트 페테르부르크 콘서바토리의 교수로서 열성적인 활동을 했다. 비슷하게도 비외탕이 걸었던 길을 그도 따랐던 것이다. 이 활동은 러시안 바이올린 악파에 지대한 발전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비에니아프스키 자신의 음악 해석과 작곡에도 도움을 주었다. 1862년에는 콘체르토 2번을 초연하게 되는데, 악평을 하기로 유명한 꾸이마저도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1악장 알레그로의 신선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감탄할 정도로 훌륭한 곡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생애의 여러 기간 동안 계속되는 연주여행에 시달렸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직후인 1872년 또 세계연주여행을 떠났는데, 첫해에 북미에서만 215회에 다다를 정도의 무리한 연주 스케줄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1875년 유럽으로 다시 돌아와서 비외탕을 대신하여 2년간 브뤼셀 음악원의 교수로 있으면서도 연주활동을 계속했으며, 독일 연주 때는 사라사테와 라이벌이 되기도 했다. 1878년에 건강이 다시 크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자신의 콘체르토 2번을 연주하다 무대에서 쓰러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가 무대 뒤로 실려나간 사이 청중석에 있던 절친한 친구 요아힘이 비에니아프스키의 바이올린을 들고 올라와 “내 친구의 콘체르토는 연주할 수 없지만 대신 바흐의 샤콘느를 들려드리겠습니다”하며 연주했다.

 

 

연주가 끝난 후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무대로 나온 비에니아프스키와 포옹했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그의 건강은 같은 해 모스크바에서 크로이처 소나타 1악장만을 연주하고 멈추어야만 할 정도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몸 상태가 조금이라도 좋아지기만 하면 그는 변함없이 대단하고도 놀라운 연주를 들려주었다. 무대를 사랑한 비에니아프스키는 결국 이듬해 러시아 오데사에서 연주 도중 병원으로 실려 갔다. 마담 폰 메크(von Meck, 차이코프스키의 후원자)의 집에서 요양하는 비에니아프스키의 곁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 친구들은 병원과 보험비를 마련하기 위해 음악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그의 연주와 작곡 스타일은 프랑스 악파의 영향 위에 그의 열정적인 슬라브 기질이 더해진 것이었다. 그의 연주는 기교적인 패시지들을 불같이 해치워 버리고는 그다음 순간에는 듣는 이를 울게 만들어 버리는 서정적인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음색에 있어 서정적이면서도 열정적인 특징은 그 특유의 높은 긴장도를 가진 비브라토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는 보잉에 있어서도 특별했다. 그의 보잉은 “굳어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는데 그것은 후세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오른 팔꿈치를 높이 들고 두 번째 손가락으로 활을 눌러서 내는 보잉 스타일은 당대에는 전통에 위배되는 특이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이것을 ‘러시안 보잉’(Russian bow grip)이라고 부르지만, 그 보잉의 창시자는 바로 비에니아프스키이다. 작곡에 있어서 그는 파가니니적 초절기교에 낭만적 향기 그리고 슬라브적인 색채를 더했다. 그가 작곡한 조국의 폴란드 춤곡들(마주르카·폴로네이즈)에도 역시 이러한 색채가 가득 차 있다. 비에니아프스키의 두개의 콘체르토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는데, 1번은 다소 과장된 기교로 표현된 곡이며 사라사테에게 헌정된 2번은 서정적인 흐름과 표현으로 가득 차 지금까지도 바이올린 레퍼토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에튀드도 많이 작곡했는데, 에꼴 모데르네와 이튀드 카프리스는 파가니니 카프리스에 버금갈 만큼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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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관악산의 추억(e8853)
글쓴이 : 파도소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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