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가니니, 그 소리의 끝을 본다!
최근 음반점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수입 CD 가운데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으로 연주.녹음했다는 점을 내세우는 것이 몇가지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가운데 '살바토레 아카르도'의 것을 추천하고자 합니다.
아카르도는 '파가니니의 재래(在來)'라 일컬어지는 대가입니다. 1956년 15세의 나이로 제네바 콩쿨에서 우승한 뒤 58년 파가니니 콩쿨에서 우승해 세계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그의 레파토리는 바흐 이전부터 현대음악에 이르는 광범위한 것이지만, 역시 아카르도 하면 파가니니입니다.
DG에서 나온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전집 (지휘.샤를르 뒤트와)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TV의 클래식 음악방송에 파가니니 연주를 하는 바이올리니스트들 모습이 나오면 대개 오만상을 찌푸리고 젖먹던 힘까지 짜내는 모습이었는데, 아카르도의 파가니니협주곡은 너무도 수월하게 모든 패시지를 소화해내고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파가니니와는 떼어놓을 수 없는 이름인 그가, 파가니니 생전에 사용했던 바이올린으로 소품집을 냈습니다. CD의 제목은 "Salvatore Accardo plays Paganini's Guarneri del Gesu 1742" 입니다.
이탈리아 레이블로서 현악의 명가인 다이나믹(Dynamic.시리얼넘버 CDS 137)에서 나왔습니다. 파가니니의 적자가 파가니니의 악기로 연주한다, 즉 파가니니의 연주를 현대의 녹음기술로 되살려보겠다는 기획입니다.감상 포인트는 파가니니가 사용했던 그의 명기 "cannon(대포)"의 소리를 만끽하는 것입니다. 이 바이올린의 탄생년도는 1742년으로, 제노바 출신인 파가니니가 태어나기 정확히 40년전입니다. 리보르노(Livorno) 출신 사업가가 1802년에 파가니니에게 주었는데 이때 악기의 나이가 환갑이지만 현악기로서는 여전히 상당히 젊은 나이였습니다.
파가니니는 그 강건한 (robust) 사운드때문에 자기 악기를 '나의 대포(cannon) 바이올린'이라고 애칭하였습니다. 파가니니의 압도적인 연주기량과 맞물려 당시 청중이 들어본 적도 없는 강력한 음향으로 연주회장을 압도하였을 것임을 익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름의 뉘앙스 탓인지, 이 악기는 다른 명기들에 비해 많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동거녀가 창밖으로 집어던져 케이스가 박살난다든지, 영국 연주여행중 운반을 하던 사람이 마차에서 떨어뜨리는 등의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1833년 말, 파가니니는 병치료도 하고 바이올린 수리도 할 겸 파리에 들렀습니다. 이때 윗판을 떼어내 옛 접착제를 제거한 뒤 다시 접착제를 발라 고정시키는 대수술을 했는데, 전화위복이었는지 이로써 옆판과 앞판의 결합이 훨씬 강해졌답니다 .파가니니는 고장수리 말고도 자신의 초절적 기교를 더욱 잘 표현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가지로 악기에 손을 댔습니다.
현대의 활보다 더 크고 말총과 막대기가 평행을 유지하는 활을 썼고, 더 높은 음으로의 튜닝이 원활하도록 가는 현(string)을 썼으며, 브릿지도 보통것보다 덜 굽은 것을 썼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구조변경의 결과로, 그는 4개현을 한꺼번에 짚는 코드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파가니니는 이 시기, 그러니까 50을 넘긴 나이부터는 점차 연주활동을 줄이고 현악기 거래상으로 활동영역을 옮겨갔습니다. 후두 질환으로 점차 목소리를 잃어갔는데 이와함께 'cannon'의 소리도 점차 들을 수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1837년,파가니니는 자신이 죽은 뒤 바이올린을 제노바 시에 영구기증하도록 유서를 남겼습니다. 3년뒤 그가 니스에서 숨을 거두자, 바이올린은 아들 아킬레에게 넘어갔습니다. 당시 이 바이올린의 값은 제노바 화폐 백만 리라정도로, 금 3톤 값이었다는게 음악학자들의 연구입니다. 그러니 아들 아킬레가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했던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실제 기증은 파가니니 사후 15년 뒤에야 이뤄졌습니다. 1851년 7월 4일에 공식 기증식이 열렸습니다. 시 당국이 바이올린을 확보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바이올린을 대여하고 싶다는 요청이 줄을 이었고, 대여료로 제시되는 금액도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그러나 시 당국은 도난 또는 손상을 우려해 이런 요구를 모두 거절했습니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은 고고학적 유물이라도 되는 양 밀폐된 보관실에 갇혀 있었습니다.
스트라디바리 서거 2백주년이던 1937년, 제노바 시 당국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을 크레모나 시로 반출해 전시하는 방안을 승인했습니다. 체자레 칸티라는 악기장인이 상태점검을 맡았는데, 쇼케이스에서 꺼내자 모양만 바이올린이지 연주 불능의 상태였다고 합니다. 공기순환이 안되는 곳에 너무 오래두어 접착제가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던 것입니다.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여기저기를 통통 두드려보다가 악기가 산산조각나는 바람에, 이 악기는 칸티의 손에 의해 완전히 '재조립'되었습니다. 다행히, 원래의 강건한 소리를 되찾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공적 복원을 기념하기 위해, 그해 '지울리오 비냐미'라는 연주자가 이 악기로 콘서트를 가졌고, 이 공연은 단파라디오로 방송되었습니다. 이 방송을 들은 사람은 전세계적으로 2천만명으로 추산된다는데, 이 연주실황이 다이내믹 레이블에서 복각 CD로 나와있다고 합니다. 이후부터는 '연주가 최선의 보존'이라는 방침이 자리잡게 됩니다.
1954년부터는 파가니니 콩쿨이 열려 우승자에게 이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969년에는 다이내믹이 제노바 시의 허가를 얻어, <살바토레 아카르도>.로 하여금 이 악기를 연주토록 하고 아날로그 녹음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았던 "제노바 노래 바루카바 주제에 의한 60개의 변주"를 녹음한 것으로, 이것이 '대포'의 소리를 담은 최초의 하이파이 녹음이었습니다. 이 LP는 나중에 CD로도 복각되었습니다.
1982년, 아카르도는 파가니니 탄생 2백주년을 기념하는 연주자로 선정돼 또다시 이 악기로 기념연주회를 갖고 대통령으로부터 최고작위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파가니니와 아카르도의 인연은 길고도 질깁니다. 이 음반의 수록곡은 말만 소품이지, 파가니니가 시전하였던 격렬하고도 장엄한 바이올린의 모든 음향적 가능성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촛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물론 이런 곡들은 현대음악에도 여럿 있겠습니다만, 우아하고도 화려한 멜로디가 전곡에 살아있다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 아쉽게도 오늘 듣는 곡은 1962년 <살바토레 아카르도>가 연주한 곡은 아니지만, <Scott St John - Violin & Simon Wynberg - Guitar> 연주로 듣겠습니다. (옮긴 글)
여유로운 주말의 밤에,
차 한 잔과 함께 ~
파가니니,
그를 만나시지 않으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