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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추억일기 / 이해인

P a o l o 2008. 9. 22. 13:57



 
추억일기 / 이해인 1 "넌 그때 왜 그랬니? 온 식구가 찾아 헤맨 끝에 보니 어느 골방에서 베시시 웃으며 걸어나오더구나, 쬐그만 애가 말이야" 어린 시절 함께 지내던 고모님이 어느 날 불쑥 던지신 이야기 속으로 문득 걸어나오는 다섯 살짜리 아이 조그만 크기의 라디오 하나 들고 아무도 없는 구석방에 들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원리를 캐내려고 꽤나 고민했다 작은 라디오 안에 어떨게 큰 사람이 들어가서 말을 하고 있는지 하도 신기하고 경이로워서 밥도 굶고 앉아 있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 하루에도 몇 번씩 서랍을 열 때마다 문득 그리워지는 내 유년의 비밀서랍 비밀도 없는데 비밀서랍을 만든 것은 누군가 봐주길 바라는 허영심 때문이었을까? 인형의 옷을 해 입힐 색종이와 자투리 헝겊 미래의 꿈과 동요가 적힌 공책과 몽당연필이 가득 들어찼던 내 어린 시적의 서랍은 어둠조차 설레임으로 빛나던 보물상자였는데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내 서랍속엔 쓸모없는 낙서와 먼지 내가 만든 근심들만 수북이 쌓여 있다 3 하루 종일 종이인형을 만들며 함께 꿈을 키우던 동그스름한 얼굴의 소꿉친구가 그리운 날 노오란 은행잎을 편지 대신 내 손에 쥐어주던 눈이 깊은 소년이 보고 싶은 날 나는 색종이 상자를 꺼내 새를 접고 꽃을 접는다 아주 작은 죄도 지을 수 없을 것 같은 푸른 가을날 가장 아름다운 그림물감을 내 마음에 풀어 제목 없는 그림을 많이도 그려본다

출처 : 추억일기 / 이해인
글쓴이 : 메데이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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