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 deutsches Requiem (German Requiem), Op. 45 | |
Conductor: Sergiu Celibidache Performer: Arleen Augér, Franz Gerihsen, Philharmonischer Chor München Orchestra: Münchner Philharmoniker Recorded : Live 1981 Label: EMI Classics | |
Ⅰ. Selig sind, die da Leid tragen (Zemlich langsam)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Ⅱ. Denn alles Fleisch es ist wie Gras (Langsam, marschmässig)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Ⅲ. Herr, lehre doch mich (Andante moderato)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시고
Ⅳ. Wie lieblich sind deine Wohnungen (Mässig bewegt)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Ⅴ. Ihr habt nun Traurigkeit (Langsam)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Ⅵ. Denn wir haben hie keine bleibende Statt (Andante) 이 지상에는 영원한 도성은 없고
Ⅶ. Selig sind die Toten (Feierlich)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이 곡은 라틴어 전례 가사를 따르지 않고, 독일어로 번역된 독일 성경에서 그 가사를 따왔다. 내용도 가톨릭 전례와는 관계가 없어서 연주회용으로 작곡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브람스가 이 곡을 쓰는 데는 10년이 넘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가 레퀴엠을 쓰려고 마음먹게 된 것은 바로 1856년이었으며,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슈만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레퀴엠을 쓰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브람스는 작품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그 실마리를 좀처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865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이를 계기로 독일 레퀴엠의 작곡을 다시 시작하게 되어서 1866년과 67년에 이 작품을 쓰는데 집중했다.
67년 여름, 이 곡의 악보를 받아 본 클라라는 '눈물 없이는 연주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절망과 고통의 시간 속에서 독일 레퀴엠이 쓰여졌으며 마침내 1867년 12월 브람스는 레퀴엠 중 3곡만을 비인에서 최초로 공개했다.
결과는 그리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듬해인 68년 4월에 6곡을 브레멘 성당에서 연주 했을 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브레멘 연주회 이후에 브람스는 제 5곡을 추가했고 1869년 2월에 현재의 모습을 갖춘 7곡의 독일 레퀴엠을 무대에 올리게 됐다.
이날 공연에서는 칼 라이네케Carl Reinecke가 지휘했고, 브레멘의 공연 때 처럼 강열한 감동으로 청중들을 압도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브람스: 교향곡 1번 C단조 op. 68, 독일 레퀴엠 op. 45* *Arleen Auger (아를린 아우거; 소프라노), Franz Gerihsen (프란쯔 게리센; 바리톤) *Philharmonischer Chor Munchen (뮌헨 필 합창단), *Members of the Munchen Bach-Chor (뮌헨 바흐 합창단 멤버) *Sergiu Celibidache, Conductor 세르쥬 첼리비다케 (지휘) *Orchestra: Münchner Philharmoniker 뮌헨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이 음반은 EMI에서 금년 7월에 출반한 첼리비다케/뮌헨 필의 실황녹음 에디션 vol.3 중 하나로 2 for 1 케이스에 2장의 CD가 들어있으며 첫번째 음반에 독일 레퀴엠 (1981년 녹음)중 1-6곡이 두번째 음반에 독일 레퀴엠의 종곡과 교향곡 1번 (1987년 녹음)이 실려있다. 이번 vol. 3은 베토벤의 교향곡 2-4,6-9번과 레오노레 서곡 3번, 브람스의 교향곡 전곡, 독일 레퀴엠, 하이든 변주곡과 슈만의 교향곡 2번이 모두 10장의 CD에 들어있다.
지난 4월에 DG에서 첼리비다케/슈투트가르트 라디오 심포니의 70년대 연주로 브람스 교향곡 전곡을 출반한 적이 있으니 당연 이번 EMI의 브람스는 그 음반과 비교가 될 필요가 있겠다. 첼리비다케의 애호가라면 그 때 구입한 슈투트가르트 라디오 심포니의 브람스와 이번 뮌헨 필의 브람스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궁금할 것이고 아직 첼리비다케의 브람스를 구입하지 않은 독자라면 DG와 EMI 두가지 녹음중 어느 것을 택할 지 혼란스러울 것이다.
먼저 평점은 브람스 교향곡 1번에 한한 것으로 지난 번 DG의 음반평과 비교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음반은 슈투트가르트 라디오 심포니와의 연주보다 많은 면에서 더 뛰어나다. 우선 DG의 1976년 녹음과 비교해보아 11년후에 행해진 이 음반의 음질은 같은 아날로그 녹음임에도 확연히 EMI쪽이 낫다. EMI의 지난번 첼리비다케 에디션들에서도 그러했지만 80년대에 뮌헨 필의 아날로그 녹음들은 디지탈 녹음 못지 않은 해상도와 다이나믹에 여타 순수 EMI 녹음들과 구분되는 자연스러움까지 품고 있어서 이 에디션을 아끼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는데 이번 에디션도 몇 곡을 제외하고는 고른 음질을 갖추고 있다.
전곡을 통해 뮌헨 필의 현은 그 음색의 부드러움과 결이 만져질듯한 높은 해상도에 힘입어 첼리비다케의 연주를 과거 슈투트가르트 라디오 심포니와의 것보다 한단계 높은 수준의 것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다른 악기들도 악기들 사이의 빈 공간이 깨끗이 처리되어서 순도가 더 높게 느껴진다. 그래서 팀파니와 같은 경우는 슈투트가르트 라디오 심포니쪽이 더 탄력있지만 이번 음반이 더 감상하기에 편하게 들린다.
곡의 해석면에서는 첼리비다케가 브람스 교향곡 1번을 대하는 태도는 11년전과 비교해서 군데 군데 작은 차이는 있으나 곡을 대하는 큰 흐름 자체는 변화가 없다. 단편적인 차이는 4악장(19:47)의 템포가 현저히 느려졌다는 점이지만 필자가 이 음반에 호감을 가지게 된데에는 1악장의 변화가 크게 작용했다. 1악장(14:57)의 서주부를 여는 팀파니의 강도는 DG의 것보다 좀더 절제되어있고 동시에 이 심장박동소리 같은 팀파니의 진행을 마무리하는 9번째 마디의 f가 제대로 표현되어서 DG음반에서 느꼈던 어색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DG음반의 경우 첫 시작은 더 강하지만 이 부분에서 어울리지 않게도 갑자기 약해져버렸다. 조금 느릿한 템포로 서주부는 담담하게 진행되고 첫 ff (2:13)도 조금만 더 화려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만족할 수준의 활력은 갖추고 있다.
서주가 끝나고 제 1주제가 시작하는 부분은 지난 번 DG의 음반과 같이 호른과 목관의 ff를 무시한 채 여리게 시작된다는 점은 첫번째 불만이 되겠다. 서주부의 마지막에 하강하는 뮌헨 필의 첼로가 정성스럽게 다듬어 놓은 바탕을 제시부 시작에서 금새 망쳐버리기 때문에 더욱 아쉽다. 여기선 깜짝 놀랄만치 힘차게 돌진하는 쪽이 맞지 않은가? 지난 번 DG음반에서 전체적으로 템포자체는 상식적인 수준을 벗어나는 곳이 거의 없었다면 이 음반에선 첼리비다케 EMI 에디션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느릿한 템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느린 템포가 결국 DG 음반과 해석의 다른 부분에선 큰 차이가 없음에도 매듭이 확실하지 못한 그의 이런 해석이 빠른 템포에서 보다 두드러지지 않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첼리비다케 특유의 조금 느린 템포가 제시부에선 강인함의 부족으로 느껴지는 순간도 있지만 뮌헨 필의 바이올린 파트가 워낙 나긋나긋하게 잘 다듬어져 있기에 그런 불만은 금새 잊어버리게 된다. 비록 제시부의 강인함은 조금 양보하더라도 슈투트가르트 라디오 심포니와의 연주에서도 확인됐던 데로 전개부의 클라이막스는 지극히 화려하게 처리되어 있다. 이는 푸르트벵글러의 1951년 북독일방송 교향악단 (TAHRA)연주를 빼닮은 것이긴 하지만 그보다 느린 템포에 슈투트가르트 라디오 심포니에 비교가 안될 만치 안정된 트럼펫 -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 의 화려한 어택 덕에 사뭇 신선하게 들린다.
그러나 재현부는 한껏 매력을 뿜어내는 뮌헨 필의 바이올린 파트와 앞서보다 템포가 조금 빨라진 점은 좋지만 팀파니와 트럼펫의 민첩함이 요구되는 코다직전의 클라이막스는 DG녹음보다 강조되어 있지 않고 앞선 전개부의 클라이막스와 비교해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462번째 마디부터 474번째 마디까지 줄곳 ff로 진행되어야하는 금관과 팀파니의 당당함은 마지막부분에 가서야 잠시 비춰질 뿐 브람스가 악보에서 원했던 곡의 클라이막스로서의 재현부의 중요성은 살려내지 않고 있다. 첼리비다케는 곡의 정점을 재현부가 아닌 전개부의 클라이막스에 두고 있음이 확실하긴 하지만 이는 필자로선 수긍하기 힘든 부분이다. 뮌헨 필의 음향이 아름답기 때문에 이 재현부의 클라이막스를 한껏 살려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더하다.
2악장(10:58)은 독주 바이올린에 답하는 호른의 울림을 악보와는 달리 꽤나 두텁게 강조한 점은 특이한 개성이라 하겠다. 비슷비슷한 2악장 연주가 많은 상황에선 이런 파격은 반갑게 여겨진다. 3악장(5:44)은 조금 더 빨라도 좋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고 기대만큼 뮌헨 필의 호른이 두드러지지 않는 점은 의외다.
4악장 서주 1부의 클라이막스인 28번째 마디의 sf들은 도드라지게 들리지 않아서 2부인 유명한 호른 파트로 넘어가기 직전의 긴장감은 그 느려진 템포와 함께 시시하게 느껴진다. 이런 불만은 곧이은 호른의 선율이 두텁고 정성스러워서 이내 잊어버리게 된다. 트럼본이 가세하면 남성적인 울림은 늠름함까지 갖추어서 4악장의 멋은 한껏 더해진다. 서주가 끝나고 바이올린에 의해 제 1주제 - 한때 베토벤의 9번 교향곡 4악장의 주제와 닮았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던 -가 느릿하지만 안정되게 흐르고 목관이 이를 받은 다음 다시 바이올린이 자신있게 sf로 이 선율을 힘차게 노래할 때가 되면 이 음반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부분이 된다. 화성적, 대위법적으로 비올라와 첼로가 합세하면서 더욱 두터워질 수록 뮌헨 필의 현파트는 부드러우면서도 화려해서 4악장 제 1주제를 이토록 감칠 맛 나게 연주했던 음반이 있었던가 사뭇 흐뭇해지는 순간이다. 그들의 현소리는 빈 필이나 베를린 필과도 달라서 첼리비다케/뮌헨 필하면 떠오르는 그 유려한 현소리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기에 이 부분 때문이라도 이 음반은 브람스 팬이라면 소장가치가 높다 하겠다.
제 1주제가 베이스의 피치카토로 연주되면서 시작되는 재현부는 앞선 뮌헨 필 현의 장점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긴 하지만 제 2주제가 재현되기 직전의 클라이막스는 절제되어있다. 코다 역시 앞선 1악장 전개부의 클라이막스 수준에도 못미치는 절제된 밸런스를 취하고 있어서 고급스런 현파트에 화려한 금관까지 폭발했으면 금상첨화일 것을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결국 4악장 현의 유려함은 최고의 수준이라 이 곡의 다양한 연주를 모으시는 분껜 서슴치 않고 일청을 권하겠으나 지엽적인 재미보다는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강인하면서도 화려한 남성미를 뽑내는 연주를 원하시는 분껜 '조금만 더'라는 불만이 남는 연주다. 조금만 더 연소도가 높은 연주였다면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커플링된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은 자세한 리뷰는 생략하지만 교향곡 보다 일단 음질이 많이 떨어진다. 팀파니의 울림은 뒤로 많이 물러나서 흐릿해져있고 트럼펫의 화려한 울림은 많이 아끼고 있다. 이런 미사곡에서 트럼펫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금관에 의한 투티의 최정상이 화려하게 수놓아지지 못함으로 해서 결국 독일 레퀴엠의 죽음의 공포와 영생의 행복이 교차하는 급변하는 분위기를 살리기엔 역부족이되 버렸다. 특히 대곡인 제 2곡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의 제 1부의 ff에서 합창 사이 사이를 뚫고 밝게 비춰줘야할 트럼펫의 부재와 라틴어 레퀴엠의 "분노의 날"에 상당하는 제 6곡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는 곡의 성격에 맞지 않게 연주의 진폭이 좁아서 실망스럽다. 다만 브람스 독일 레퀴엠만이 가지는 교향곡적인 큰 스케일이 아니라 일반적인 레퀴엠으로서 갖추어야하는 비애는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Sergiu Celibidache (세르쥬 첼리비다케)
세르쥬 첼리비다케는 녹음을 극도로 싫어하고 혐오한 이색적인 지휘자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져 동양철학 전반을 자신의 지휘세계에 끌어들여 색다른 지휘해석을 보이기도 했다. 어떠한 타협도 모르는 고집불통에 완벽주의자인 그는 내면적인 정신세계에 큰 비중을 두었다.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1912년 6월 28일 루마니아의 로만에서 태어났다.
그는 겨우 6세 때부터 피아노와 작곡 공부를 시작했는데, 타고난 음악성으로 빠른 성장을 보이며 실력이 향상되어 갔다. 이후 20대쯔음 파리에 가 음악 유학을 떠나기에 이른다. 그리곤 1936년에는 베를린으로 가 베를린 고등음악학교에서 음악 이론을 익히고 이어 베를린 대학에서 아르놀트 셰링으로부터 배우기도 했다. 그는 이 기간동안 음악은 물론 철학, 고등 수학, 음향 심리학 등 여러 방면을 공부해 내면적 성숙을 기하기도 했다.
1945년에 첼리비다케는 지휘자 콩쿨에서 우승해 주목을 끌었고,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도 지휘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결국 1947년에 그는 드디어 베를린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로서 등극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가 베를린필하모니를 맡아 영속적인 지휘를 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카라얀의 등장으로 그는 그 자리에서 밀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느 1953~1954년동안 ‘최고의 지휘자’로 뽑히며 독일 비평가 대상을 받아 다시한번 그 능력을 입증해 보였다.
이후 첼리비다케는 스웨덴 국립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1963년), 덴마크 방송교향악단, 그리고 프랑스 국립관현악단의 음악감독,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 등을 거치며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한편으론 이태리의 키지 음악원 교수로 일하며 후진 약성에도 신경을 썼다. 1978년 4월부턴 런던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뮌헨 필하모니를 이끌며 감동적인 명연주를 들려주어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내기도 했다. 1996년 8월 14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철저한 완벽주의자, 자기 주장이 강한 지휘계의 아웃사이더
1912년 세르주 첼리 비다케는 루마니아의 로만의 검소한 그리스 정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였다. 루마니아 대학에서는 철학과 수학을 공부하면서도 관심은 차츰 음악으로 기울어져 부카레스트의 발레 학교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후, 20대에 단신 파리로 가서 고학을 하였고 1936년부터 베를린 음악원에 입학하여 대위법과 자곡, 지휘법등 본격적인 음악 공부을 했고 베를린 대학에서는 철학과 수학, 음악학을 공부했다.
1945년 첼리비다케에게는 뜻밖의 돌발적인 행운이 찾아오는데, 당시 베를린필하모닉의 지휘자였던 보르하르트가 미군 보초병에 의해 오인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그를 대신하여 역사적인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로 그 해, 8월 29일 첼렌도르프 야외 무대에서 데뷔 콘서틀을 가졌다.
1946/47년 시즌에는 128회나 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를 맡게되나 나치와의 연류때문에 활동이 금지된 푸르트벵글러가 수석 지휘자로 복귀하는 1947년 전후로 그의 활동이 급감하게 된다. 1952년 푸르트벵글러의 사망후, 그 후임자리에 캬라얀이 임명되자 켈리비다케는 베를린 필을 떠나 객원 지휘자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3/54년의 시즌에는 유럽뿐만 아니라 멕시코 남미등의 넓은 지휘 활동으로 "올해 최고의 지휘자"로서 독일 비평가 대상을 받았고, 1954년에는 독일예술상을 받았다.
1962/63년 시즌에는 런던 필하모닉 객원지휘자로 활동 하다가 한 시즌을 채우고 1963년부터는 스웨덴 국립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와 덴마크 방송교향악단의 지휘자도 역임하게 되었다.
1975/76년 시즌에는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하여 한 시즌을 활동하였고 이듬해, 1977년에는 18년 동안 맡아왔던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 자리도 사임하였다.
사임후, 그는 그의 업적중에 간과해서는 안되는 후진 양성에 힘쓰게 되는데 오케스트라를 훈련 시키는 트레이너로뿐만 아니라 음악제나 강습회에서 많은 젊은 학생을 가르쳤다. 특히 지휘법 강습회 등은 선발도 까다로왔지만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6천여명 이상을 배출할 정도로 정열적으로 그는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78년 4월부터는 런던 교향악단에서 횟수를 거듭하여 객원 지휘를 하게 되었고, 이 악단의 스페인, 일본 공연에도 동행하였으며 1979년부터는 뮌헨 필하모니 관현악단 상임 지휘자로 다른 오케스트라에 비해 오래 장기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첼리비다케는 누가 머래도 자기 방식을 철저하게 관철해내는 독재자형의 지휘자로 이런점이 다수의 오케스트라와 원만한 관계를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 결과도 나았다. 하지만 이런 자신만의 고집스런 철학과 미학관이 음악에 있어서는 완벽주의자로의 모습과 융합되어 그가 지휘하는 브람스도 브루크너도, 혹은 베토벤까지도 그때까지 들었던 연주와는 다른, 거의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독창적인 매력을 지니고 나타나게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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