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catholic.or.kr 성가게시판에 실린 김종헌 신부님의 글을 HWP로 편집한 것입니다>
차 례
1. 미사곡의 선곡 요령
2. 라틴어로 된 미사곡의 연주법
3. 라틴어 발음의 모든 것
4. 트렌트 공의회와 교회음악
5. 지휘자와 악보 연구의 순서
6. 성가대 역할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7. 사순시기 성가 선택의 요령
8. 성삼일 전례와 성가 선곡의 예
9. 자비송을 노래하는 법
10. 화답송(시편 응송)을 노래하는 법
11. 복음환호송을 노래하는 법
12. 환호송은 꼭 노래로
13. 대영광송을 노래하는 법
14. 봉헌성가를 노래하는 법
15. 거룩하시도다를 노래하는 법
16. 신앙의 신비여를 노래하는 법
17. 마침영광송과 아멘을 노래하는 법
18. 주님의 기도를 노래하는 법
19.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하는 법
20. 영성체 때에 성가 부르는 법
21. 감사침묵기도(영성체후 성가)를 노래하는 법
22. 퇴장 노래 부르는 법
23. 퇴장후의 가요 부르기
1. 미사곡의 선곡 요령
교회에서 가장 먼저 사용한 미사곡은 그레고리오 성가로 된 것이며, 우리가 그레고리오 성가집 (Liber Usualis)에서 볼 수 있듯이, Kyrie, Gloria, Sanctus, 그리고 Agnus Dei가 한 벌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Credo를 함께 넣어 우리는 이를 Ordinarium Missae(미사 통상문, Ordinary of Mass, 어느 미사에서나 변하지 않는 기도들을 말한다. 그러나 주일미사나 축일마다 변하는 기도문, 예를 들어 입당송, 화답송, 봉헌송, 영성체송, 영성체 후 기도를 Proprium Missae, 미사 고유문, Proper of Mass 라 한다). 14세기 때부터 몇 몇 작곡가들이 이 미사 통상문 중의 한 두 부분을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통상문 전체를 한 작곡가가 미사곡으로 작곡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작곡된 미사통상문의 음악들이 “Old Hall Manuscript”에 보존되어 있는데, 그레고리오 성가나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형태, 즉 한 벌로 이루어진 미사곡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이 사본에는 Kyrie가 한 곡도 없다. 당시에는 Kyrie 만큼은 그레고리오 성가로 부르는 것을 서양교회에서는 장려하였다고 음악사가들은 생각한다.
그러다가 15세기 되어(초기 르네상스 시대) 모든 작곡가들이 적어도 한 곡 이상의 미사곡들을 작곡하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모든 작곡가가 신자였기도 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음악적인 것으로서 미사라는 작곡형식이 서양 음악사에 나타난 최초의 다악장 형식의(the first large-scale multimovement form) 음악이었기 때문에 모든 작곡가들이 도전을 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사곡의 형태, 즉 다섯 개의 미사 통상문을 한 벌로 묶은 미사곡(이를 영어로 Cyclic Mass라 함)은 Dufay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약 1450년경). 전체 5개의 통상문의 미사곡에 일관성을 주기 위해 당시 작곡가들은 성무일도(Divine Office) 끝기도의 마지막 부분에 부르는 Marian antiphon(Salve regina, Alma redemptoris mater, Regina coelilaetare, Ave regina coelorum)의 선율을 차용해 작곡하였다. 그 후에는 전례문을 이용한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을 빌려와서 작곡하였다. 이렇게 빌린 선율을 정선율(Cantus firmus)이라 하였으며, 이를 이용해 만든 미사곡을 Cantus firmus Missa 라고 부른다. 또 선율은 늘 tenor part에 놓이게 되었기에 달리 Tenor Mass라고 한다. 작곡가들은 이 차용한 정선율, 가끔은 약간씩 변하는 경우도 있지만, 을 위의 5가지 기도문마다 꼭 한번씩 나오도록 작곡함으로써 하나의 미사곡으로서의 통일성을 주려 하였다. 참고로 미사곡의 이름을 살펴보면 그 정선율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잘 알 수 있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미사곡 이름이 “Missa Ave maris stella”라면 그레고리오 성가의 Ave maris stella라는 곡에서 정선율을 빌려왔다는 것이고, Missa Pange lingua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성체찬가에서 주제를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가끔은 Missa Sine nomine라는 미사곡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출처를 밝힐 수 없는 세속곡에서 정선율을 따온 경우라 볼 수 있다.
불란서 작곡가인 Dufay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세속음악의 선율이 정선율로 차용되기 시작하였다(Missa “Se la face ay pale”). 또 1500년 이후에는 Parody Mass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때까지 불려지던 그레고리안 성가나 어떤 세속노래에서 한 성부만을 빌려오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몇 몇 성부를 한꺼번에 빌려와서 작곡한 미사곡을 말한다. 그후 후기 Renaissance에 이르러 로마악파의 Palestrina, Lasso 등에 이르기까지 계속 발전하는 미사곡은 앞에서 말한 기법들과 각 작곡가들의 고유한 작곡 기법이 사용된다. 후기 고딕음악 시대에 작곡되기 시작한 다성 미사곡은 1600년경에 이르러 이미 절정에 이른 것이다.
이상 초기 미사곡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가장 초기의 성가가 지금 우리 교회의 음악관계자들이 생각하듯이 set로 작곡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교회에서 주일이나 대 축일에 미사곡을 고를 때 고려할 사항인 듯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Mozart 작곡의 어떤 한 벌의 미사곡, 아니면 이문근 신부님이 작곡한 창미사곡 II를 골랐다면 그날의 미사곡은 반드시 그 한 벌 안에 있는 것 중에서 노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작곡가의 미사곡의 일부는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이런 획일화된 생각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스럽게 미사곡을 선택했으면 좋겠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주일, 혹은 대 축일에 사용할 미사곡을 고를 때, Kyrie는 A의 곡, Gloria는 B의 곡, Sanctus는 C의 곡, Agnus Dei는 D 의 곡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본인이 참석하는 성당에서는 매 주 이런 식의 선곡을 하고 있다.
미사곡을 신자들과 함께 부르는 것은 한국 교회의 좋은 전통이다. 절대로 성가대나 합창단이 신자들 몫의 노래를 대신하거나 성가대만이 노래하는 법은 없어야 한다. 예를 들어 미사 중의 환호성 부분들, 주의 기도, 등등. 그렇다고 이런 미사 통상문을 노래 할 때 미사곡 전부를 반드시 신자들과 같이 노래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로 신자들의 적극적인 전례 참여의 한 방법으로써 개창을 많이 장려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미사곡을 전체가 같이 노래하지 않는다고 하여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 가능하면 미사곡 중의 “거룩하시도다” 만큼은 모든 신자가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라틴말로 된 미사곡을 노래부르더라도 “거룩하시다” 만큼은 한국말로 된 쉬운 곡을 연주하면 좋겠다는 제안이다. 왜냐하면 옛날부터 이 기도는 전체 신자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역시 옛 교회 전통을 따라 그레고리오 성가나 라틴말로 된 다성 음악도 이용 할 수 있겠다. 가끔은 이 기도는 노래로 하지 않고 참회예식 제2양식을 이용하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다. 왜냐하면 입당송, Kyrie, Gloria 등을 연속으로 부르면 신자들도 피곤하게 되고, 그보다는 위 세 곡 중에서는 Gloria의 비중이 가장 크다. 그래서 Kyrie를 노래하지 않는 것이 Gloria를 더 돋보이게 할 수 있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전례에 사용하는 음악을 선곡하는 기준에 대해 말씀드려 보겠다. 그 기준은 3가지로서 음악적, 전례적, 사목적인 기준이다. 아무튼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대로 어느 한 작곡가의 미사곡 전체를 한 미사 안에서 꼭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생각하고, 조금은 자유스럽게, 음악적으로 훌륭하고 전례적이며 그리고 사목적으로 신자들에게 유익한 여러 미사곡 중에서 다양하게 곡을 골라서 사용했으면 좋겠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평일미사 때나 주일 혹은 축일 때에 위에 언급한 미사곡 이외의 다른 찬미가들(입당, 봉헌, 영성체, 퇴장)을 고를 때에는 성가 선곡자들이 먼저 그 날의 독서와 복음을 읽어보고 그 주제에 맞는 곡들을 선곡하여야겠다. 그날 주제에 맞는 사제의 강론과 성가의 선택, 그리고 그날 주제에 맞는 신자들의 기도는 미사에 참여한 신자들에게 그날 미사의 주제를 명확히 기억하게 해 준다. 그렇게 되면 신자들이 그 주제에 맞추어 한 주간을 살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2. 라틴어로 된 미사곡의 연주법
전례 시기중 큰 대축일이 되면 많은 본당의 성가대들이 특별한 미사곡을 준비하는 것 같다. 성가대들은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미사곡을 연주하고 싶고 또 한편으로는 워낙 한국으로 된 미사곡이 부족하다 보니 고르게 되는 대부분이 라틴어로 된 미사곡이다(라틴어 미사곡의 사용이 과연 우리 한국어 미사에서 사용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는 토론실로 갈 문제이기에 여기서는 생략). 14세기 말엽부터 작곡되기 시작한 라틴어로 된 다성부 미사곡은 지금까지도 외국에서는 라틴어로 꾸준히 작곡되고 있다. 그러나 바티칸 제2차 공의회 이전과 이후의 미사곡의 구성이 다르다(Sanctus와 Benedictus의 구성). 공의회 이후의 미사곡은 현행 미사 순서에 따라 작곡된 것이기에 연주상 어려움이 없으니 생략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공의회 이전까지 Tridentine 미사 순서에 따라 작곡된 미사곡에 대해 설명하면서 한국어 미사곡의 사용에 대해서도 조금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미사곡의 종류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이 여러분의 이해를 도울 것 같다.
미사곡은 Missa brevis(짧은 미사)와 Missa Solemnis / longa(장엄 혹은 긴 미사)로 나누게 되는데, Missa brevis는 미사통상문의 각 요소가 한 악장으로 처리된다. 따라서 미사 한 곡이 Kyrie, Gloria, Credo, Sanctus(Benedictus), Agnus Dei의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연주 시간이 짧은 편이다(한국어 미사곡은 전적으로 이 짧은 미사곡 뿐이다). 그러나 Missa Solemnis는 미사통상문의 각 요소(기도문)가 한 악장으로서가 아니라 여러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상당히 긴 음악이 된다. 특별히 Credo(나는 믿나이다) 같은 경우 기도문의 매 절마다 특별한 악장을 요구하게 된다. 바하의 B 단조 미사같은 경우 25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연주용 미사곡이 여기에 속한다.
이제 라틴어 미사곡의 연주법과 한국어 미사곡의 사용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Kyrie :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Gloria : 선창 문제이다. 현행 한국어 미사곡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부분을 주례사제에게 강요할 필요가 전혀 없다(힘들어 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성가대원이나 신자 중 그 누구라도 선창할 수 있다.
Credo : 미사 때에는 연주하기가 힘들 것 같다. 시간적으로나 기도문의 성격상 한국어로 모든 신자들이 큰 소리로 외우는 것이 낫겠다. 참고로 한국어로 된 Credo는 최병철 작곡의 한 곡뿐인 것 같다.
Sanctus와 Benedictus : 이 두 부분은 상당한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다. 먼저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미사 구성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1565년 경부터 1963년까지 사용된 트렌틴 미사에서는 성찬 제정(성변화)을 전후하여 성변화 이전에는 Sanctus(거룩하시도다), 성변화 이후에는 Benedictus(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를 노래하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그때 작곡된 악보를 살펴보면 두 부분이 제목을 달리하여 따로 나누어져 작곡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행 미사에서는 이 두 부분이 합해져서 성변화 전례 전에 부르도록 되어있다. 따로 분리되어 있는 두 곡을 연달아 연주하도록 해야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사곡은 모두가 무반주로 되어 있어, 연주상의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그 후의 미사곡들은 반주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럴 경우 두 곡의 전후에 붙어 있는 전주와 후주의 연주가 문제가 된다. 성탄 때 한국 교회에서 즐겨부르는 Alfred Desauge의 “Noel”곡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게 될 것 같다. Bene-dictus의 Tenor 독창이 나오기 전의 오르간 독주는 미사 주례자 및 참석자들이 견디기 힘들만큼(?) 길다. 이럴 때의 권하고 싶은 연주법은 Sanctus 끝의 긴 반주부분 그리고 Benedictus 앞에 붙어있는 긴 반주부분을 생략한 채로 연주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보통 Sanctus가 끝나면 주례사제는 노래가 끝난 줄 알고 미사를 계속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에 Benedictus가 곧 따라 연주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면서 노래를 재빨리 이어나가야겠다. 어떤 본당에서는 노래가 길다고 Benedictus(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높은 데에서 호산나) 부분을 생략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기도문을 중간에 마치는 경우이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저는 이 ‘거룩하시도다’ 부분만큼은 한국말로 전 신자들이 노래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꼭 장려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합니다).
Agnus Dei : 먼저 제가 올린 “하느님의 어린 양을 노래하는 법”을 참조하시길 바란다. 101번(성가 게시판)에서 김종우님께서 르네상스 미사(Palestrina의 Missa Brevis라 하심)에서 Agnus Dei가 두 개인 경우가 있는데 이것 역시 빵을 나누는 시간과 관계가 있느냐는 질문을 하셨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악보를 분석해 본 결과 이 미사 이외에도 Palestrina는 자신의 거의 모든 미사곡에서 Agnus Dei I과 Agnus Dei II를 꾸준하게 사용하고 있다. 가사를 잘 살펴보면 Agnus Dei I은 언제나 “miserere nobis”로 끝나고 있으며 II는 “Dona nobis pacem”으로 끝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 I은 fraxio Panis의 시간에 따라 여러 번 반복될 수 있겠다. 보통 음악회에서 I을 두 번 연주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시대의 Orlando di Lasso는 언제나 “Mise-rere nobis”를 노래하여 “Dona nobis pacem”은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적어도 본인이 살펴본 많은 미사곡에서는). Victoria는 두 가지 방법으로 노래하는 데, 한 방법은 “Miserere nobis” 한 번으로 노래를 끝마치는 경우(이 경우 Lasso와 같이 여러 번 반복이 가능하다고 본다)와 또 다른 방법으로는 “Miserere nobis” 한 번과 “Dona nobis pacem” 한 번으로써 곡을 마치는 경우이다.
이와 같이 르네상스 시기 말기의 3대 작곡가들이 서로 다른 형식으로 Agnus Dei를 작곡한 것은 그들이 어디에서 음악 활동을 했는가에 달려있는 것 같다. 바티칸 2차 공의회 전까지 로마 전례에서는 성 목요일에는 “Dona nobis pacem” 없이 노래하였고, 라테란 대성전에서는 일년 내내 “Dona nobis”를 노래하지 않았다고 한다.
100번(성가 게시판)의 기사와 오늘 기사를 종합해 볼 때, 라틴어로 된 Anus Dei건 한국어로 된 “하느님의 어린 양”이든 “Miserere nobis” 한 번과 “Dona nobis pacem” 한 번으로 연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일 것 같다.
3. 라틴어 발음의 모든 것
비록 바티칸 제2차 공의회가 모국어의 사용을 허락했지만 아직까지도 교회의 공식 전례 용어는 라틴어이다(전례헌장 36항). 따라서 미사 중에 라틴말로 노래를 하는 성가대원은 이 말의 정확한 발음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여야겠다. 본인의 합창 지휘 경험을 통해서 몇 십 년간을 성가대원으로 활동했다는 분들도 엉터리 발음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가끔은 구제 불능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가르쳐도 못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 성가대원들은 외국어도 잘 하시는 만큼 이 기회에 제대로 배워 사용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먼저 라틴어의 모음을 두 가지 종류로 모아 익히는 것이 발음을 익히는 데나 사용에 편리할 것 같다.
1) a, o, u.
2) e, i, (y)
A : 단모음일 때는 문제가 없을 것이고, 다음에 e가 따라와서 중모음이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때는 우리말의 ‘ㅔ’로 발음한다. 예를 들면 caelum (coelum) = ‘첼룸’ aeternum = 에떼르눔.
그러나 e 위에 "이 붙으면 중모음이 되지 않고 독립된 두 개의 모음이 된다. 따라서 aër = ‘아에르’로 발음한다.
C : 위의 제 1군의 모음이 붙으면 약한 “ㄲ” 의 발음이 된다. casa = 까사; co = 꼬; cu=꾸. 위의 제2군 모음이 붙으면 ‘ㅊ’의 발음이 된다. Cicero = 치체로; civis = 치비스; caelum= 첼룸. 뒤에 ‘h’가 붙어 약한 ‘ㅋ’처럼 발음된다. Christus = 크리스투스; chorus; 코루스.
E : 한국말의 ‘ㅔ’와 같이 발음한다. Deum = 데움; Dies : 디에스.
F : 영어의 F와 같이 아래 입술을 물고 발음하는 것을 잊지 말 것. femina; fabula.
G : 모음 제 1군이 붙으면 약한 ‘ㄱ’ 소리가 나고; Gallia = 갈리아; Gasbal = 가스발. 모음 제 2군이 붙으면 ‘ㅈ’ 소리가 된다: Gemma = 젬마; Gemini = 제미니.
조심 : g와 n의 중자음은 뒤에 모음이 따라와 gna(냐); gni(니); gno(뇨)로 발음된다. Agnus = 아뉴스; magnum = 마늄; lingua = 링과. 그러나 독일권에서는 아그누스, 마그눔으로 발음한다. 우리 교회는 이태리식의 발음을 따른다.
H : 한국 말의 ‘ㅎ’로 발음하면 된다. 단 h 앞에 c, p, 혹은 r가 올 때도 있으며, 이 때 Ch는 ‘ㅋ’로 발음 Christus = 크리스투스. ph는 ‘f’로 발음. Philosophia(Ph와 f 발음은 아랫입술을 문다).
J : ‘l’로 발음. Jesu = 예수; justum = 유스뚬.
K : 드물게 사용하는 글자로 ‘ㄱ’ 혹은 ‘ㅋ’으로 발음, Kyrie = 기리에 혹은 키리에.
L : 반드시 혀를 입천장에 부친다는 것을 잊지 말 것. 그렇지 않으면 r 발음이 된다.
N : 우리말의 ‘ㄴ’과 같이 발음. 그러나 뒤에 c가 따르는 경우, 한국말의 ‘ㅇ’이 된다. sanctus = 상뚜스(상크뚜스가 아님).
P : 이태리어와 독일어(미국)의 발음이 약간 다르다: 이태리식을 따른다. 이태리어에서는 가벼운 “ㅃ”으로 발음하고 영어나 독일어에서는 ‘ㅍ’으로 발음. Panis = 빠니스; pange = 빤제 ; apostolus = 아뽀스똘루스.
Q : Q는 항상 뒤에 u가 같이 따른다. usque = 우스꿰; qua = 꽈; quo vadis? = 꿔 바디스.
R : 영어에서와 같이 절대 혀를 입천장에 부치지 말라.
S : 우리말의 초성으로서의 ‘ㅅ’ 소리와 같이 발음; Sabula = 사불라; sane = 사네. 이 발음을 독일에서는 ‘ㅈ’로 발음하는 경우가 있는 데 우리는 이를 피하자. 예를 들면 Bizet의 Agnus를 들으면 ‘미제레레 노비스’라고 발음한다. S 다음에 c가 따라오고 모음이 붙을 때(이 때의 발음은 C의 발음을 참조)조심해야 한다. schola = 스콜라; scala = 스깔라; scu = 스꾸. 제 2군의 모음이 따라오면 Sci = 쒸; sce = 쒜; scientia = 쒸엔씨아; Scena = 쒜나.
아마 라틴말 성가 노래에서 가장 무시당하고 있는 발음일 것이다. 제일 마지막 음절에 ‘s’가 오면 거의 발음하지 않고 있다. 언제나 발음해야 한다. Deus meus = “데우스 메우스”를 “데우 메우”로 발음하는 성가대원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러나 마지막 음절의 이 발음, 즉 ‘스’ 소리는 나야 하지만 강하게 발음하면 절대로 안 된다. 왜냐하면 강하게 발음할 경우 ‘스’라는 음절이 하나 더 생기기 때문이다. 마치 “데웃스 메웃스” 하듯이 마지막 음절에서 입을 다물고 발음하면 절대로 마지막 ‘스’에서 입을 열 수도 없고 강하게 발음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런 식 아니면 이런 느낌으로 발음하도록 하자.
T : 이 발음도 독일어군, 이태리어권이 다르게 발음한다. 이태리식의 약한 “ㄸ”으로 발음하자. toccare = 똑까레; tono = 또노; tonsura = 똔수라. T 다음에 모음이 따라올 때 조심해야 한다(지금 성가 게시판의 179 혹은 180의 질문이기도 하다). 한국말로 설명이 약간 곤란하지만(왜냐하면 발음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씨’로 발음하기로 하되 이 ‘씨’는 입을 조금 다물고 혀로 아래 이빨 뒤에 대고 발음하면 되겠다. gratia = 그라씨아 그러나 그랏씨아 같은 기분; scientia = 쒸엔씨아. 문제는 또 한 가지. 그러나 ti의 i가 액센트를 받거나 그 앞에 s, x, t가 오는 경우 이 때에는 원래 발음인 ‘ㄸ’로 한다. 예를 들면 짐승이라는 bestia는 베스띠아이다. hostia = 호스띠아(성체). 따라서 곽일수님의 질문의 답은 지휘자가 아닌 곽일수님의 답이 옳다. 그 다음, 180번(성가 게시판) 이주상 님의 질문. 철자는 맞는 데 tibi는 또 다른 단어인고로 띄워 쓰셔야 하겠다. “Gratias agimus tibi”의 경우에 위의 S 발음에서와 언급한 바와 같이 마지막 음절에 붙은 s도 발음해야 한다. 그러나 절대 강하게 발음하면 안 된다. Gratias agimus의 이 가사에서 ‘스’를 발음하면서는 절대로 ‘아지무스’의 ‘아’ 발음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만약 그라씨아에서 숨을 쉬고, 아지무스를 다시 시작한다면 몰라도(그러면 악보와는 다른 쉼표가 생긴다) 그냥 연결시켜 노래하면 자연스럽게 ‘그라씨아사지무스’가 될 것이다. “그라시아스 아지무스” 내지는 “그라시아스 사지무스”가 아닌 것을 살펴 주셔야겠다. ‘스’와 ‘아’가 합해져서 ‘스아’ 내지는 ‘사’로 변했다. 틀림없다.
그 다음의 글자들은 여러분이 다 아시리라 믿는다. U는 ‘ㅜ’로, V는 영어의 v(따라서 아래 입술을 물어야), Y는 ‘ㅣ’로, Z는 우리말의 ‘ㅈ’을 강하게 발음하면 된다.
<라틴말 성가(그레고리오 성가 포함)의 연습법>
라틴말 가사에는 언제나 단어 위에 액센트가 있는 것을 아시는지? 말의 액센트와 멜로디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이 라틴말 성가라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1) 성가대는 제일 먼저 이 액센트 부분을 최대한으로 강조하면서 라틴말 가사를 몇 번이고 읽어본다(노래하는 것이 절대 아님).
2) 다소 과장되리 만큼 액센트 부분을 강조하여 읽어 가다보면 금방 선율선이 머리 속에 떠오르게 되고, 읽을 때의 기분으로 노래하게 된다.
3) 그 다음 멜로디를 익힌 뒤 가사를 부치면 상상을 초월한, 효과있는 음악을 만들 수 있다.
액센트를 살려 가사 읽기를 많이 하지 않고 연주하는 라틴말 성가는 제대로 될 리가 없다. 한 마디로 엉터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 주시라.
한국노래이건 외국노래이건 간에 음악을 만들 때 모음은 최대한으로 길게, 울리는 목소리로 노래하고, 자음은 음악의 싯가 마지막에 어쩔 수 없이 부치는 기분(안 그러면 뜻 전달이 불가함)으로 노래해야 하는 것을 잘 아시리라 믿는다. 한국 가곡을 예로 들어보겠다. “초여니 쓰을고가안 기이픈 계곡” 비목의 앞부분이다. 이런 기분의 발음으로 노래를 불러 보자. 발음을 똑똑히 한다고 하면서 한 음, 한음을 노래하면 모음 발성이 다 부서져 버린다.
그 다음, 일단 모음을 노래했으면 그 모음에 ‘ㅎ’ 소리를 섞지 않도록 노력하라. 다시 말하면 모음의 색깔을 달리하지 말라는 말이다. 산들바람의 마지막 부분이다. “아 아하 너허도 가며헌 이히 마흠 어이히해”라고 노래하지 말라. “아 아아 너어도 가아며언 이이 마음 어어어이 해” 같이 노래해 보자.
4. 트렌트 공의회와 교회음악
Martin Luther로부터 시작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설립된 후, 교황 바울로 3세는 갈려나간 교회와의 마찰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 교회와의 화해를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양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1541년의 회의가 허사로 돌아가자 교황께서는 방향을 돌려 가톨릭 교회 안에서의 개혁을 시도하게 된다(Counter-Reformation). 1542년 교황께서는 트렌트공의회의 첫 회합을 소집하셨다. 1545년에서 1563년까지 열린 이 공의회에서 다룬 교회 음악에 관한 것은 아주 작은 분량이었지만 1564년 Pius IV 교황에 의해 공포되었다.
교회 음악으로 다룬 주제들은 당시 교회음악의 문제점 모두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 교회 음악의 세속화 문제이다. 성가 게시판 93번에서도 잠깐 다루었지만 음악사상 처음으로 미사통상문 전체가 작곡되기 시작하면서 유럽의 유명한 작곡가들은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을 이용하거나 심지어는 세속노래, 특히 샹송을 미사곡의 정선율로 선택하여 미사곡으로서의 통일성을 이루려 하였다. 특히 Josquin desPrez에 이르면 그는 대부분의 정선율을 세속곡으로 대치하였고 이제는 한 선율뿐만이 아니라 세 성부 모두를 빌려와서 작곡하게 된다(이를 Parody 미사라 한다). 물론 당시의 한 작곡사조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런 과도한 세속곡의 이용은 교회음악의 속화를 초래하였다.
2) 많은 성부를 이용한 다성음악은 신자들로 하여금 가사를 알아듣지 못하게 하고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3) 너무나 많은 전례음악들의 변형들이 등장하였다. 그 예를 우리는 Sequences(부속가, 성가게시판 121번 참조)들에서 보게 된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부속가들이 지방마다 다르게 등장함으로써 교회 음악의 혼란을 주게 되었다.
4) 교회 전례 안에서의 과도한 악기사용, 특별히 “시끄러운 악기”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5) 전례 때에 취하는 가수들의 불경스러운 태도, 빈약한 발음이나 창법이 교회음악의 문제점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공의회의 즉각적인 대응은 다분히 전례적이었다. trope의 사용을 금하고(성가 게시판 104번 참조) 부속가의 사용도 단지 네 개만을 허용하였다(성가게시판 121번 참조). 그 외의 조치는 각 교구마다 시행하도록 권한을 주었다. 또 공의회는 성가의 작곡 때에 외설적이고 세속적인 소재의 사용을 금함으로써 진실로 “하느님의 집이 기도의 집이 되도록” 조치하였다. 이때 지시되고 이루어진 음악 형식, 제정된 트렌트미사는 1963년 바티칸 제2차 공의회 때까지 사용되어왔다.
Palestrina를 포함한 작곡가들은 이제 자신들이 작곡하는 미사곡 내지는 작품의 서문에 ‘트렌트공의회 정신을 따라 작곡한 것’임을 밝힐 정도로 교회음악의 순수성을 간직하려고 노력하였다. 아래의 사항들이 많은 작곡가들이 순수한 교회음악을 위해 고려한 사항들이다.
1) 멜로디 선율과 일치하는 음악 형식을 살리는데 노력하였다. 다시 말해 도약적인 진행을 피하고 근접 진행을 함으로써 노래부르기 쉽고 자연스러운 언어의 흐름을 강조하였다.
2) 가식없는 대위법적인 음악을 구사하였다. 과도한 장식이나 선율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대위법적인 음악으로 한 곡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중간 중간에 화성적인 음악(Homophonic music)도 포함시켰다.
3) 반음계 사용의 금지. 화성학적으로 꼭 필요한 musica ficta를 제외한 반음계의 사용은 금하였다.
4) 복잡하지 않고 규칙적인 리듬의 사용
5) 이해하기 쉬운 가사의 구성
이런 노력으로 인해 이제 교회음악은 음악의 미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에서 벗어나 전례와 관련된 음악으로서의 기능을 생각하는데 그 강조점을 두게 되었다. Palestrina와 당시대 로마학파의 작곡가들은 이러한 규범들을 잘 수행하였다. Palestrina의 음악은 그 당 시대에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트렌트 공의회가 바라는 교회음악의 진수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특별히 세속적인 것과 완전히 절연된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위의 글을 적으면서 언뜻 생각하게 되는 것이 지금 우리 한국 교회음악의 현실이다.
당시 교회가 문제로 삼았던 교회음악의 세속화, 잦은 반음계의 사용, 가수들의 엉터리 발음내지는 발성법, 난해하고 잦은 리듬의 변화, 전문 성악인들도 초견으로 부를 수 없을 정도의 도약적인 선율들, 등등의 현상이 작년부터 부쩍 우리 한국 교회 음악에 들어온 듯하다.
다음에 한국 교회음악, 특별히 복음성가에 대해 한번 더 연재를 하고 여러분을 토론실로 초대하여 의견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많이 생각해 두시고 좋은 토론의 장을 만들어 보십시다. 감사합니다.
5. 지휘자와 악보 연구의 순서
요사이 조금 바빠서 옛날에 써 두었던 기사를 그냥 올립니다. 조금 쉽게 풀어 쓰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성가대 지휘자들의 건투를 빕니다.
어떤 음악 작품에 잠재되어 있는 감정을 목소리나 악기를 통해 유용하고도 효과적으로 표현하도록 하기 위해서 지휘자는 반드시 악보의 이해에 그 첫번째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음악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의 판단은 악보 자체에 대한 완전하고도 창의적인 연구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따라서 지휘자의 첫번째 임무는 악보의 연구에 있다.
1) 악보 연구의 특성과 원칙
지휘자는 악보 연구를 할 때 단순한 음표에 대한 해독자로서가 아니라 창조적이고도 독창적인 예술가로서 접근해야 한다. 연주가는 어떤 음악을 표현할 때에 자신 만의 개인적인 표현을 하겠다는 강한 욕구가 있어야만 한다. 작곡가는 자신의 창조적인 음악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는 한 수단으로써 악보로 표기하는 것이며, 지휘자의 도전은 그 악보를 표현 풍부한 이미지로 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효과적인 악보에 대한 연구 과정이 이런 해석을 창조적인 지휘자를 통해 가능하게 해 준다.
음악을 창조하는 그 기초로써 지휘자는 악보를 완벽하게 알아야 하며 그 악보에 대해 자신의 마음속에 명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지휘를 할 때에 머리 속에 그려진 음악의 구현이 우선되어야 하지, 작곡가의 음표를 단순히 연주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휘자가 악보 연구를 통해 그 악보를 완전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지휘자가 음악에 전적으로 자신을 투신하지 않는다거나 해석을 조직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그 지휘자는 자신의 기초를 세우지 못하는 것이고 단순히 음표의 소리만을 연주자들에게 지휘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지휘자를 만드는 과정은 가장 기본적인 음악적인 기술과 지식에 기반을 둔다. 그리고 악보에 대한 연구에 전제되는 조건들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음악에 대한 애정과 창조하려는 원의가 요구된다.
악보를 연구하는 동안 지휘자로서의 자세와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음악 자체에 집중해서 행동과 마음으로 도전해야 한다. 악보 연구는 상당한 정신 집중을 요구하는 외로운 작업이다(악보 연구의 과정 중에는, 누구나 그 음악을 연주단 앞에서 기계적으로 지휘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거부해야만 한다).
지휘자는 정신이 산뜻하고 자신이 악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될 때에 악보 연구를 시작할 것이다. 악보 연구를 하는 동안 정신집중을 잘 할 수 있다면 음표를 자신의 마음속에 소리로 바꿀 수 있도록 큰 도움을 받게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음악이 주는 이미지를 계속 간직하게도 도와준다.
악보를 연구할 때, 지휘자는 조용한 악기로 해야 한다. 그 악기란 바로 자신의 마음이다. 자신의 조용한 악기로써 악보에 대한 지식이나 감정적인 이미지를 얻는 기술을 터득하지 못한 지휘자는 심각한 장애자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악보에 대한 지식이나 이미지 없이는 그 사람의 지휘 기술(지휘 동작)이 얼마나 완벽한가에 관계없이 그 사람은 지휘대에서 효과적인 음악 지도자로서의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조용한 가운데 악보 연구를 하는 지휘자에게 외적인 또 신체적인 소리의 반응은 결여되어 있겠지만 정신적인 과정은 절대로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지휘자의 정신은 악보 연구 내내 반드시 민감하여야 하고 활기차야 한다. 여기에는 예리한 음악적인 상상력 내지 창작력의 연습이 중요하다.
악보 연구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주어진 악보를 공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음악의 길이, 복잡성, 예술적 질, 그리고 각자의 축적된 음악적 지식, 경험, 기술, 특별히 악보를 읽어내는 능력과 비례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건들은 악보마다 또 지휘자마다 크게 다를 수 있다.
젊은 지휘자들이 매일 매일 악보 공부하는 것을 습관으로 삼는 것은 상당히 현명한 일이다. 연주가들이 매일 악기 연습을 하듯이 지휘자들도 악보를 연구해야 한다. 지휘자들은 언제 어디에서 공부할 것이며, 악보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위해서 또 만들어 내고자 하는 소리를 위해서 얼마만큼의 시간을 소비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적어도 지휘자는 연주자들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규칙적인 공부와 연습이 필요하다.
결국 주제는 음악이며 음악은 바로 악보이다.
따라서 지휘자는 자신의 정신, 시간, 주의력을 음악에 집중하여야 한다.
새로운 음악을 매일의 규칙적인 악보 연구를 통해서 공부하는 것은 지휘자로 하여금 악보 읽는 기술을 발전시키고 음악적인 성장을 촉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야만 침체의 함정에서 피할 수 있다. 각 지휘자는 새로운 악보를 연구하는 것과 관련해서 개인적인 목표를 설정해야만 한다.
2) 지휘자에게 요구되는 지식과 기술
기악 지휘자들은 아래와 같은 음악의 규칙에 대해 정확한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다. 음악사, 음악문헌, 음악형식, 서양음악에 대한 역사와 음악문헌에 대한 지식, 특별히 작곡형식의 발전, 연구 형태의 발전사은 지휘자로 하여금 시대적인 전망을 제공한다. 이런 광범위한 주제에 대한 꾸준한 연구를 위해서는 연구하는 기술(research skill)이 필요하다. 동시에 외국어를 아는 것도 권장된다.
음악 이론과 분석: 다양한 형태의 음악이나 작풍을 분석할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을 모든 지휘자들이 갖추어야 한다. 19세기에 이르는 음악의 많은 형태, technique, style 등과 친숙한 것 이외에, 현존하고 있는 많은 기악곡을 차지하고 있는 20세기의 작품에 대해서도 상세한 지식이 필요하다.
작곡 : 악보는 작곡자의 창조적인 생각이나 음악적인 창조력의 신체적인 표현이다. 지휘자의 주된 임무는 작곡가와 상당하는 창조성, 통찰력, 이해로써 작곡가의 악보를 공부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각 지휘자는 음악적인 작품들이 어떻게 작곡되는지 그 과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작곡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작품을 쓰는 과정에 관계되는 통찰력을 얻게 된다. 작곡의 경험을 통해 지휘자는 외부에서의 관람자의 위치에서 내적 관람자의 위치로 옮아간다. 그렇게 되면 그 지휘자는 작곡가의 정신의 내적인 작업을 더욱 충분하게 이해하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젊은 지휘자들은 선천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작곡 능력 때문에 작곡을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느낄 필요가 없다. 작곡 공부, 그것이 어느 만큼의 기본적인 것이든, 적어도 음악분석의 능력을 키워준다. 그리고 악보를 더욱 완전하고 쉽게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줄 것이다.
청음과 시창 : 지휘자는 그의 예술과 기술을 위해 두 가지 형태의 청각적인 기술을 이용한다. - 내적인 듣기와 외적인 듣기이다. 악보를 공부하는 동안 발달되는 내적으로 소리를 듣는 기술은 성취될 목적을 제공해 준다. 외적인 듣기는 지휘할 적에 무엇이 이루어져야 할지를 평가해 준다.
악보를 정확하게 능숙하게 읽는(즉, 악보를 쉽게 읽고 동시에 마음속으로 그 소리를 듣는 것) 능력은 많은 경우에 개인적인 내적 듣기의 기술에 달려있다. 음악에서 내적 듣기와 외적 듣기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지만, 내적 듣기의 기술을 발전시키는 기초를 확립시켜 주는 것은 바로 외적 듣기이다. 대학 학부 과정에서 시창이나 청음이라는 과목으로 외적 듣기의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시창이나 청음에 약한 지휘자들은 피아노나 음반의 도움없이 악보를 읽거나 마음으로 음악을 듣기에 힘든 것을 느낄 것이다. 어떤 부족함이든지 그것들은 극복할 수 있고 극복해야 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관현악법, 조옮김 그리고 조표읽기 : 지휘자들은 악기의 조옮김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건반 악기 기술 : 비록 건반악기를 쉽게 연주할 수 있는 것이 모든 지휘자들에게 요구되는 꼭 필요한 기술은 아니라 하더라도, 건반 악기를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은 상당히 유익하다. 건반악기는 지휘자를 포함한 모든 음악가들이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악기이다. 모든 지휘자들은 가능한 최대한의 건반악기를 다루는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기악기의 연주 : 적어도 한가지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기술을 발전시키는 이외에, 지휘자는 가능하면 여러 형태, 여러 규모의 연주 단체에서 연주해 보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좋다.
3) 악보 연구의 순서
1 단계 : 악보 안내
A. 악보 표지 혹은 악보 머리말 페이지에 적힌 정보를 읽는다.
B. 악보 첫 페이지를 살핀다. 아래 질문에 답하라
1. 전조된 악보인가? 아님 C조?
2. 악기 편성이나 악보 기재하는 데 이상한 점들이 있는가?
C. 악보를 넘기면서 ...
1. 모든 빠르기, 박자의 변화, 조표를 살펴보라.
2. 친숙하지 않거나 잘 모르는 음악 용어, 음표, 표시 등을 명확히 하라.
3. 다소 늦더라도 다음 단계를 위해 똑 같은 속도로 악보를 읽어 나간다.
2 단계 : 악보 읽기
1. 중간에 끊어지는 일없이 악보를 읽고 들을 수 있는 빠르기를 정한다
2. 이 단계에서는 음악을 분석하지 말 것. 상세한 것에 대해 신경 쓰지 말 것
3. 자신의 직감이나 음악적인 상상력을 이용하라. 악보를 보면서 자연적으로 떠오르는 느낌 등을 생각해 보라.
4. 음악을 외우려고 하지 말 것.
5. 피아노를 사용하지 말라.
6. 음반을 사용하지 말 것.
7. 마음으로 그 마음에 대해 느끼는 과정을 평가해 보도록 하라. 악보를 보면서 내적으로 듣는 이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P.S. 지휘자는 악보 읽기의 이 과정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여야 하며, 악보를 읽기에 전념할 수 있는 좋은 분위기를 마련해야 한다. 마음이 맑을 때 악보를 읽을 것이다. 높은 차원의 정신 집중은 음악에 빠져들게 하고 기억하도록 도와준다.
3 단계 : 악보 분석
1. melody :
a) 중요한 멜로디 아이디어, 주 선율, 부주제. 주제, 대선율 등을 찾아본다.
b) 각 멜로디의 특성을 아래의 관점에서 분석
- 형식, 스케일, 음역, 진행방향
2. Harmony : 작품의 전체적인 화성의 구조를 파악
3. Form : 전체적인 형식
4. Rhythm(tempo, meter, rhythm)을 살펴볼 것
5. 관현악법을 살펴본다.
6. Texture (homophonic? Polyphonic? Antiphonal? Responsorial? Etc.)
7. Dynamics(셈, 여림 등)
4 단계 : 작품의 해석
1. 작곡가, 작품, 작품시기에 대한 연구를 끝낸다.
2. 여러 빠르기로 시도해 보고 올바른 빠르기를 정한다.
3. Phrasing을 정한다. 어디에서 음악을 끊을 것인가. 그러나 화성을 고려하지 않고 멜로디만으로 phrase를 정하지 않도록 할 것, 종지형을 살펴볼 것
4. Dynamics를 정한다(세게? 점점 여리게?).
5. Color / texture( vibrato 없이 선명한 소리? 부드러운 소리? 강한 소리?).
6. 휴지 : 어디에서 얼마만큼 쉴 것인가?
7. 연주 때 중요한 passage에 신경쓸 것
6. 성가대 역할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1) 머리말
전례음악의 목적은 “하느님의 영광과 신자들의 聖化를 지향”(전례헌장 112항)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례음악은 그 선율의 움직임과 음악 고유의 힘을 통해서 신자 일동의 기도를 보다 생생하고 열정적인 것으로 만들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신자들이 보다 힘있게, 보다 열심히 또 보다 효과적으로 찬미와 기도를 바칠 수 있게”(비오 12세의 성음악의 원리, 28-29조, 1955. 12. 25 발표)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신자들의 성화를 꾀하게 한다. 이렇게 전례음악을 포함한 전례 式典은 거룩한 천상 예루살렘 도읍에서의 전례를 신자들에게 미리 맛보게 한다. 이런 전례를 위하여 전례 봉사자들이(주례자, 조례자, 독서자, 해설자, 성가대, 성체 분배자, 안내자 등등) 자신들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하느님의 백성인 신자들 역시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성가를 부르며 전례에 참여하게 된다면 전례의식은 더욱 숭고한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성가대는 전례 안에서 음악을 통해 신자 모두를 결합시키는 임무를 가지고 있는 만큼 성가대 역시 전례 안에서 맡은 소임을 다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노력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한국 교회 곳곳에서 성가대의 해산이라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인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잘못 이해한 우리는 성가대 없이 전 신자가 개창하는 것만이 이를 실현시키는 것이라 생각하여 한국 교회 200년 역사 안에서 한번도 제대로 꽃 피워보지 못했던, 한국 가톨릭 교회 음악의 명맥을 그나마 간신이 이어오던 성가대를 해체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는 근본적으로 교회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이다. 전례 헌장 114항이나 1967년 3월 5일에 발표된 성음악에 관한 훈령 19항은 “성가대의 역할은 보다 중요하게 되었고 그 책임이 무거워졌다”고 가르치고 있다. 공의회는 성가대의 역할이 공의회 이전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반해 공의회에서 발표된 전례 헌장이나 훈령을 받은 한국 교회는 많은 성가대를 해체시켜 버렸으니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물론 훈령이 나오기 전의 외국 교회 모습도 한 때는 이와 비슷하였었다.
진실로 전례가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전례헌장, 10항)이 되기 위해서는 “전례의 필요 불가결한 구성 요소인”(전례헌장, 112항) 음악을 제외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신자들에게 음악을 지도하고 그들의 노래를 도와줌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전례 중에 보다 쉽게 기도하고, 보다 의식적으로 참여하도록 돕는 성가대 역시 제외시킬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 글에서는 로마 교회 안에서 성가대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간단히 살펴보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성가대에 대해 가르치는 바를 전례헌장과 1967년의 성음악 훈령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성교회의 귀중한 음악적 유산”을 보존, 발전시키는 성가대의 역할과 자리 매김을 시도하고자 한다.
2) 간략한 성가대 변천사
성가대의 기원은 교회음악의 기원과 같으며, 그 기원은 구약성서 안에서 발견된다(집회 17,6-10; 레위 23,23-25 참조). 유대인들의 생활에서 음악은 특별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례 안에서 음악을 사용하도록 그들에게 요구하셨기 때문이었다(레위 23,23-25 참조).
다윗 시대에 이르면, 그의 지도로 전례음악이 나름대로 완성되고 전례 안에서 성가의 위치가 매우 향상된다. 다윗은 전례를 위해 4천명으로 구성된 성가대를 조직하였으며(1역대 23,3-5; 6,16 참조), 그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다(1역대 15,27-29 참조).
교회음악이 구약시대에 이미 하느님의 명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율법의 일부가 된다. 따라서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고 오직 완성하러 오신”(마태 5,17) 예수의 뜻대로 교회 음악 역시 율법 전체의 완성과 함께 완성되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실상 예수께서도 당신 생애의 극적인 순간마다 율법에 정해진 시편을 충실히 노래하셨다(루가 2,41-42, 4,17; 마태 11,29; 마르 14,36 참조).
초대 교회에서는 유대교의 회당 음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사도 5,12; 5,20, 5,24 참조). 신약에서 음악의 위치는 구약의 그것만큼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엄연히 존재했으며, 사도들은 예수께서 기도에 대해서 특히 성가에 대하여 가르쳐주신 것을 그대로 따랐으며(사도 2,46-47), 전례의식 안에서 성가에 중점을 두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렇게 초대 교회에서는 모든 신자들이 다 함께 성가를 부르는 것이 일치의 특별한 표시로 간주되었었다. 아침, 저녁에 - 특별히 주일에 - 모든 신자들이 함께 모여서 찬미와 환호로써 그들 공통의 신앙을 ‘한 소리’(Una Voce)로 노래했던 것이다. 참석한 모든 신자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힘을 지닌 전체 회중의 노래에 대한 깊은 애착에도 불구하고, 4세기말에 여성 성가대와 소년 성가대가 등장하게 된다. 많은 개종자들을 확보하려는 몇몇 이단자들의 야심으로 태어난 여성 성가대는 겨우 명맥을 유지한 정도에 불과했던 데 반해, 소년 성가대는 계속 성장해 갔다. 동, 서방 교회의 증언에서 미사 때 Kyrie eleison을 노래한 소년 합창단의 활동을 많이 엿볼 수 있다.
신앙의 자유를 허락 받은(313년) 교회는 전례적으로나 음악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화려하고 장엄한 예식을 집전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음악교육을 받은 성가대가 필요하게 되었고 성가 대원들의 교육은 로마의 성가학교(Schola Cantorum)에서 이루어졌다. 이 성가학교를 그레고리오 1세(Gregorio I) 교황(재위 590-604) 혹은 비탈리아노(Vitaliano) 교황(재위 657-672)이 설립하였다는 두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최종 구성은 7세기말에 이루어졌다고 음악가들은 본다. 이 성가학교에는 4명의 차부제가 있었는데, 네 번째 위치의 차부제, 즉 제 4 Precentor는 Archicantor(수석 가수)이라 하여 성직자들, 복사들, 성가학교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맡았었다. 또 그들은 로마 교회 음악의 사도로서 성가보급을 위해 해외로 파견되기도 했었다.
성가학교 학생들은 교황의 미사 중에 시편 등을 노래하였는데 그들은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던 만큼, 그들의 노래는 상당히 예술적이었다. 그러나 교황 미사에서 그들만이 따로 노래를 부르기는 했으나 그때까지도 미사의 통상부분(Ordinarium Missae) 만큼은 신자 모두에 의해 제창되었다는 증거가 많이 남아 있다. 이곳 출신 교사들은 서유럽으로 나가 Metz나 Chartres 그리고 Soisson 같은 도시에 새로운 성가학교를 세웠다.
이러한 성가학교에서 교육을 많이 받은 젊은이들이 나중에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어 교회음악에 이바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부터 음악 기보법이 나타나 차츰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口頭傳承으로 내려오던 성가에 대한 애착심과 열정이 서서히 식어지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성가학교의 쇠퇴를 가져오는 큰 원인이 되고 만다.
이미 7세기 후반에, 모든 신자들에 의해 불려지던 Sanctus가 성가학교의 차부제에 의해 독창으로 불리어지게 되고, 중세기에는 주교가 부르던 여러 가지 노래도 옆에서 조례하던 다른 성직자들이 부르게 되었다.
15세기부터는 미사통상문의 노래, 즉 Kyrie, Gloria, Credo, Sanctus, Agnus Dei가 한 벌로 묶여 다성 음악으로 작곡되기 시작하였다. 원래 회중의 노래였던 미사통상문의 노래마저 점점 성가대에 의해 불려지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전례를 보다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욕구와 처음으로 등장한 다악장의 미사곡 형식을 모든 음악가들이 작곡하고자 하였던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일반 신자들은 라틴어를 몰랐고 곡의 예술성만을 추구한 나머지 전문 음악인이 아닌 신자들은 노래부를 능력이 없어 침묵을 지키기에 이르면서 모든 노래를 성가대에게 빼앗겨 버렸다.
이렇게 발전한 성가대는 20세기초까지 자신들의 기능 내지는 일차적인 역할을 좋은 음악을 연주하여 전례를 더 풍요롭고 또 품위있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상 간단히 살펴 본 성가대의 기원과 변천에 관한 역사에서 보아, 전례와 음악은 그 성질상 상호 보충하면서 원칙적으로 일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20세기초에 이르기까지 서로 별개의 것으로 독립을 이루고 있었다. 전례나 성가, 두 가지 모두가 훌륭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더 이상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깨달은 비오 10세는 전례음악이 전례의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임을 깨닫고 전례 부흥을 위한 결정적 개혁을 시작했다(1903, Motu proprio, Tra le sollecitudine, 목자의 역할을 다 함에 있어서).
그 이후 전례 부흥 운동은 다만 “과거에 있었던 전례를 그대로 답습하고자 하지 않고, 오히려 전례 그 자체를 전면적으로 쇄신”하고자 하였고 전례헌장, 21항 참조) 그 쇄신의 일환으로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헌장 114항을 할애하여 성가대의 모든 것을 새롭게 밝혔다.
교회음악을 위한 수많은 곡들이 수 백년 간에 걸쳐 만들어졌으며 전례헌장은 이 음악들을 가리켜 “성음악의 귀중한 유산”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귀중한 유산은 그레고리오 성가, 다성음악, 대중성가, 파이프 오르간을 위한 음악들이며, 이 음악들이 “교회의 귀중한 유산”이라 생각된 것은 널리 인정된 예술적 가치와 함께 실용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 성가대의 의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역대 교황의 교서와 과거의 공의회 문헌에 따라 성음악의 귀중한 유산을 보존하고 육성하기 위해서는 성가대를 만들어 이들 음악을 유지, 발전시키는 일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말하고 있다(전례헌장, 114항; 훈령 19, 20항 참조). 비오 10세 교황은 자의교서 “Tra le Sollecitudini”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적어도 주요 성당에는 성가대를 조직하는 것이 좋다. … 될 수 있으면 많은 성가대를 만들어 다성음악이나 전례음악을 노래 부르게 하면 좋겠다”(27항). 또 비오 12세는 Musicae Sacrae Disciplina에서 교구장들에게 교구의 대성당이나 큰 성당에 성가대를 조직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와 같이 교황들은 한결같이 전례 안에 신자 회중의 노래가 없어서는 안되겠지만, 성가대의 노래도 대단히 바람직한 것이며 또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훈령 20항). 교회의 새로운 요구에 응하여 각 교회마다 성가대를 창설하고 늘릴 필요가 있으며 또 활발하게 활동하도록 사목자들은 각별히 유의하여야 한다.
전례헌장은 주교 및 그 밖의 사목자들에게 신자 회중의 노래뿐 아니라 성가대가 부를 노래도 “열심히 육성해야 한다”(114항)고 가르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4) 성가대의 역할(훈령 19항)
다성음악을 연주하고 신자 일동으로 하여금 주의 깊게 듣도록 하는 것만이 아니라 교황들의 교서에서도 말했듯이 “신자 일동을 지도하고 고무하여, 전례 안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기도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전례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전례에 더욱 친근해지고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것”이 성가대의 역할이라고 헌장은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성가대는 “교회성가가 전례에 봉사하는 것이지 전례가 음악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우르바노 8세, 경신성성교령, 1943. 2. 21)라는 말을 상기하여, 제대에서 진행되는 거룩한 의식을 무시하고 쉴새없이 노래부르는 일이 없어야 하고, 신자들 역시 “노래로써 거행되는 모든 의식에서 자신들에게 부과된 부분”(전례헌장, 114항)을 열심히 노래하여야 한다.
5) 성가대와 회중과의 관계
교회의 성가대는 연주회에 참석한 청중을 마주보고 노래하는 단체가 아니다. 성가대는 자신들과 함께 기도, 노래하면서 동작하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성가대의 노래는 그 중요성으로 보아 “사제 및 신자 일동의 노래 다음가는 것”(훈령 7항)이기는 하지만 “신자 일동을 대신하여 모든 것을 노래해서는 안되며”(훈령 16항), “신자 일동이 자기에게 속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훈령 20항; 30항) 항상 주의할 필요가 있다.
또 어떠한 경우에도 신자들이 노래와 동작과 기도를 통하여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할 기본 권리를 언제나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노래의 전부가 결코 성가대에 의해 독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6) 성가대의 배치(훈령 23항)
성가대와 신자 공동체와의 위와 같은 밀접한 관계는 성가대의 역할에서 뿐 아니라 성가대의 자리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성가대 역시 전회중의 일부분이라는 점이 뚜렷이 나타날 수 있도록 자리를 잡아야 한다.
성가대는 각 성당의 구조와 아래 사항을 고려하여서 배치되어야만 한다.
- 성가대의 성격(성가대가 전 회중의 일부분이면서 또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 뚜렷이 드러나야 한다.
- 성가대가 전례의식에서 보다 쉽게 그 구실을 해낼 수 있는 자리라야 한다.
- 대원들이 쉽게 미사에 참석할 수 있도록 즉, 쉽게 성체를 영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1967년의 훈령은 성가대의 비치에 관해서는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성가대가 회중석과 제단의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할 것을 요구하며, 신자 일동의 노래를 지도한다는 구실로 신자 일동 속에 파묻혀 버리는 일은 없기를 바라고 있다. 신자의 노래를 지도하기 위해서는 성가대가 회중의 선두, 즉 제단과 신자석 사이에 위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7) 성가대의 의무
전 회중을 유기적으로 이끌기 위하여 성가대에는 다음과 같은 의무가 부과되어 있다.
- 성가대는 신자 일동의 성가를 이끌고 도와준다. 이 의무는 회중이 노래할 때 더욱 활발해진다. 즉 신자 일동이 주례자나 부제 및 시편 가창자의 노래에 답하며 대화구나 응송의 노래 때와, 봉헌(Offertorium)이나 연송(Invocationes)을 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성가대는 온 회중이 전례에 일치하도록 어느 부분, 즉 미사 통상문의 노래, 시편이나 성무일도의 노래 - 저녁 기도(Vesperas)나 끝기도 (Completorium)의 노래 - 를 신자들과 교대로 부른다.
- 성가대만이 노래할 때도 있고, 신자들이 노래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을 대신 노래해 줄 때도 있다. 또 신자 일동이 노래를 부르며 행동을 수반할 때(미사 중의 행렬 노래 즉 입당, 봉헌, 영성체, 퇴장 때의 노래)에 신자들을 대신하여 노래부를 수 있다. 이런 행렬을 수반하는 경우 신자들은 후렴만이라도 같이 노래하면서 의식에 참여할 수 있으면 더욱 더 좋다.
8) 성가대의 중요성
위의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전례의식 진행에 있어서 성가대는 절대로 필요한 것이고, 성가대를 통해서 전 회중은 하나로 굳게 결합된다. 따라서 성가대가 그 명칭이나 조직 또는 가창 실력의 유무에 상관없이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전례의식에서 회중 전체를 결합시킨다는 역할이다. 그러나 이 역할의 수행 방법은 각 성가대의 능력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모두가 목소리를 합쳐 단성부로 노래하던가 아니면 다성음악의 풍부한 형식으로 노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성음악에 관한 훈령은 여러 군데에서 성가대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는데 19항에서는 “성가대의 구실이 전보다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고 하며, 성가대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한 만큼 “작은 성가대라도 조직할 수 없는 경우에는 적당한 교육을 받은 선창자들이라도 적어도 한두 사람 둘 필요가 있다”(훈령 21항)고 한다.
9) 성가대의 편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성가대를 구성할 수 있다. 각 나라의 습관이나 사정에 따라서 만들 수 있는데, 성인 남자와 소년, 혹은 성인 남자 또는 소년만으로 성가대를 조직할 수 있고, 또 남성과 여성 혹은 사정에 따라서는, 가령 수녀원 같은 곳에서는 여성만으로도 성가대를 조직할 수 있다.”(훈령 22항).
10) 성가대원을 위한 교육
훈령은 24항에서 “성가대원에게는 음악 교육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적절한 전례 교육과 영적 교육이 베풀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전례의식 안에서 그 구실을 올바르게 해낼 수 있으니 의식은 한층 더 아름답게 되고, 신자들은 성가대를 본받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 성가대원들이 이런 교육을 통해서 “자신들의 역할을 옳게 수행할 때 그들 자신이 영적으로 진보하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교육을 위한 계획이 사목자에 의해서 수립되고 추진되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전례 교육이 되어 있지 않은 성가대의 경우, 노래는 잘 부를 수 있겠지만 전례 각 부분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몰이해로 전례 거행에 방해가 되는 수가 많으며, 영성 교육이 잘 되어 있지 않을 경우에는 즉 “진정한 마음”(골로 3,16)에서 우러나오는 찬미의 노래가 아닐 때, 기도하러 온 신자들에게 음악 연주 이외에 아무런 영적인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사목자들은 우선 성가대원 자신들이 ‘전례의 봉사자요 지도자이며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함’을 깨닫도록 성가대원들에게 전례 교육과 영성 교육을 시킬 제일차적인 의무를 가지게 된다. 아울러 훈령 25항은 “성가대의 이러한 교육(음악, 전례, 영성)의 목적을 보다 쉽게 달성하기 위하여 성음악에 관한 교구적인 협의회, 국가적이며 국제적인 협의회, 특히 교황청에서 인정하고 수차 추천한 바 있는 협의회들이 서로 협력”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11) 맺음말
신자들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꾀하고 공동체 의식을 굳게 하기 위하여 신자들은 자신들에게 배당된 노래를 다같이 부르도록 초대받고 있다. 따라서 성가대는 더 이상 자신의 일차적인 기능이 음악을 통하여 전례를 더 풍요롭고 품위 있게 만드는 데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전례 안에서 신자 전체를 결합시키는 데 그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회중의 행동과 함께, 회중을 위하여, 회중과 더불어 노래하는 자신들도 회중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음악이라는 예술을 통해 회중들의 공동기도와 전례에 봉사하는 성가대원들의 재능은 회중들의 예배에 생기를 더하게 된다. 그리하여 공동체의 기도가 성가대의 아름다운 노래에 의해 인도, 고양되어 모든 신자들을 하나된 마음으로 일치시킬 때, 이 공동체의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강력한 친교의 표현이 될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는 성가대의 사명은 성가대원들의 끊임없는 노력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 당국의 끊임없는 배려와 교회 음악가들의 봉사적 활동 그리고 전례음악과 성가대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공동체의 각성과 분발이 한데 어우러질 때, 성가대의 활성화, 한국 교회 음악의 활성화 및 토착화를 위한 기본 바탕이 마련될 것이다.
P.S. 이 글은 ‘사목’지에 발표했던 것을 약간 수정한 것임을 밝힙니다. “성가대원의 영성”에 대해서는 따로 준비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7. 사순시기 성가 선택의 요령
사순시기 때 성가를 선곡해야 하는 사람은 이 전례 시기의 신학적인 의미와 전례적으로 알 맞는 성가를 골라야 한다. 예를 들면 사순 시기라 하여 성가가 부정적인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는 가사는 피해야 한다. “나는 죄인이고 그래서 교회와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없는 인간” 식의 가사를 가진 성가는 비록 사순절 성가로 분류되어 있더라도 선택해서는 안된다. 이 시기의 주제가 참회나 자기 비하, 고행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마 미사경본의 총지침” 27항에서 말하는 것처럼 참회의 실천은 어디까지나 각자의 세례 성사에서 유래되는 것이야말로 적합하다.
이 시기의 가장 바람직한 성가를 선택하려면, 성가의 가사를 살펴보아 세례, 화해, 참회의 주제를 표현하는 성가를 찾는 것이다. 단순히 사순절 노래라고 성가집에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선택하는 것은 올 바른 선곡이 될 수 없으며, 선곡자들은 이런 안이한 작업을 피해야 한다. 사순 시기로 분류되어 있는 성가 중에서만 곡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부활시기나 성령강림으로 분류되어 있는 곡들 중에서도 세례, 화해, 참회의 주제를 잘 살리는 성가가 있다면 그 곡을 선택해서 사순 시기에 이용하도록 하자. 선곡자들은 가사를 이해하고 주제에 맞추어 선곡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 꼭 필요하다.
<사순시기 성가의 선곡을 위한 몇 가지 제언>
1) 이 시기의 성가는 특별히 단순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순 시기의 전례 동안에는 대영광송을 노래하지 않는다. 통상문을 작곡한 것 중 가장 화려하고 장중한 형식의 곡이 대 영광송이리라. 선곡자들은 우선 신자들이 노래부르기 쉽고 단순한 형식의 성가를 찾는데 신경을 써야 한다. 사순 시기 동안의 전례는 기도, 단식, 자선, 등등의 주제를 가진 노래들을 요구하지 않는다. 먼저 신학적으로 건전하고(세례, 화해, 참회를 나타내는 가사들) 전례적으로 맞는 일련의 성가들을 선택하도록 하고 이 성가들을 어느 정도 정기적으로 사용하도록 하자. 매 주 새로운 곡으로 바꾸어 노래부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잘 선택된 소수의 성가 혹은 후렴이라도 사순 시기, 그리고 더 나아가 부활 - 성령강림 시기로 공동체를 잘 인도해 줄 것이다.
위와 같이 선율이 단순한 성가를 고른 다음에는 성가의 반주 역시 단순한 것을 찾도록 노력해 보자. 화려한 반주로 된 성가는 피하는 것이 좋겠다. “주교 예식서” 252항에서는 “사순 시기 때의 기악의 사용은 신자들의 노래를 도와줄 때에만 허용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런 가르침에 따라 사순 시기의 전례 중에는 오르간을 포함한 모든 악기의 독주를 금하고 있다. 다음으로 선곡자들은 전례중 어떤 곳에서 어떤 성가를 반주 없이 부르면 더 좋을지도 공동체의 크기와 성가 개창의 참여도, 신자들의 성가 부르는 능력 등을 고려해서 살펴보면 좋겠다. 가능하면 성가를 적게 부르고 화려하지 않은 반주의 성가를 택함으로써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그리고 심적으로 그리 소란스럽지 않은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겠다. 사순 시기에는 기악의 연주를 가급적 자제하는 것이 부활 시기와 성령강림 혹은 연중 시기와 구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사순 시기를 위해 잘 선택된 소수의 성가와 미사 중의 침묵이 신자 개인이나 공동체를 더 깊은 묵상과 회개에로 나아가도록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사순 시기의 성가들이 사순 시기의 전례적인 의미와 그 중요성을 모두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사순 시기의 의미와 중요성을 들어내는 것으로는 성가 이외에도 다른 많은 방법이 있다.
2) 이 시기동안 전례에서 과도한 “주제 만들기”를 피해야 한다. 이 전례시기의 기본적인 주제는 전례 안에 이미 마련되어 있다. 미사에 맞는 주제를 찾기 위해서 성가 선곡자들은 성가집을 먼저 살펴보지 말고 “미사 경본”이나 “전례 성서”를 먼저 참조하도록 한다. 특별히 입당노래와 영성체 노래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입당송과 영성체 송에 포함되어 있는 후렴을 살펴보아야겠다. 이런 참조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이 사순 시기가 포함한 주제는 아니더라도 부수적인 주제를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 역시 전례에서 성가를 통해 나타나야 한다.
3) 사순 시기의 성가를 선택할 적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전례시기의 근본적인 일관성이다. 즉 사순 시기만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순 시기는 바로 부활시기 그리고 성령강림 시기로 연결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사순 시기는 적당하게 할 수 있는 준비의 시기라고 생각하거나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의 부활, 성령강림 시기는 부활 50일 뒤에 있는 성령의 내림만으로 생각할 수 없는 서로 연결되는, 일관성을 가진 시기이다. 그 일관성에 맞추어 성가책의 “부활” “성령강림” 등 어떤 시기의 성가 분류에 구애받지 않고 선택할 수 있겠다. 어떤 성가들은 주제로 보아 사순 시기에만 적합한 것들도 있는 반면 다른 성가들은 오히려 부활이나 성령 강림에 어울리는 성가들도 있다. 이를 잘 살펴서 사순 시기 - 부활 - 성령강림으로 이어지는 일관성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해 보자. 사순 시기의 전례 음악의 규칙으로 선곡자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바로 이 시기들이 일관성 있게 또 전체적으로 계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가집에 제공된 성가 분류에 전혀 구애받지 말고 항상 선곡자 자신이 직접 가사와 음악을 살펴 전례 정신과 신학적으로 옳은 곡을 가리는 안목을 기르도록 노력해야겠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전례음악에 종사하는 사람은 성서와 함께 반드시 전례에 관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반 평신도들이 전례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는 슬픈 현실이다. 신학 대학에서 이들을 위해 전례 및 성서 등의 과목을 개방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것도 불가능할 때 적어도 일년에 한 두 번씩의 연수를 통해서라도 일반 음악가들에게 전례 등 전례음악가로서 필요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리라고 굳게 믿는다. 아직 한국교회는 이런 필요한 혜택들이 제공되지 않고 있는 만큼 전례 음악 봉사자들은 최소한 “로마미사 경본의 총지침” 이나 사목지 2, 3호에 나오는 성가대 훈령(최명화 신부 역) 그리고 “전례 헌장”만이라도 꼭 숙독할 것을 간청하는 바이다.
8. 성삼일 전례와 성가 선곡의 예
몇 년전에 준비했던 것인데 있는 줄도 몰랐군요. 너무 늦었죠? 제가 이것을 준비할 당시만 해도 나와있는 성주간 예절 몇 권 중, 대구 대교구의 “성주간 전례” 책자의 음악이 제일 좋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대구 대교구에서 발행한 “성주간 예절”을 구하기가 힘드실 수 있으니 같은 전례문으로 된 어떤 성가든 사용하실 수 있겠습니다.
1) 부활의 성삼일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과 하느님의 완전한 영광을 드러내는 사업을 당신의 빠스카 신비를 통해서 완성하셨다. 40일동안 빠스카축제를 향한 우리들의 준비는 마침내 교회 전례주년의 핵심을 이루는 성삼일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성삼일의 전례는 주일미사의 고정적인 전례의식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롭게 전례정신을 살려서 시도할 수 있다.
2) 주의 만찬 저녁 미사
교회는 성목요일에 주님의 만찬미사로 사랑과 봉사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당신 친히 빠스카 제사의 어린 양이 되시어 수난하신 기념제를 재현한다. 오늘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 선포된 저녁이며, 새 계약이 체결된 저녁이다.
환경 : 성당 안은 꽃과 조명, 휘장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사랑에 관한 표지를 부착한다(예 : “친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 개회식과 말씀의 전례
- 입당송 : 성주간 예절(대구 대교구 : 11쪽)
- 대영광송 : 이때에 종을 치고 부활 전야 대영광송 때까지 종을 치지 않는다.
- 화답송 : 시편성가(손상오, 60쪽)
- 복음전 노래 : 성주간 예절(대구 대교구 14쪽)
- 강론 후 세족례가 있을 경우 형제애, 사랑, 봉사에 관한 성가를 부른다.
- 성가 46번(사랑의 송가)
- 사랑의 찬가(윤용선 신부 편곡)
(2) 성찬의 전례
- 예물봉헌 : 성주간 예절(대구 15쪽)
- 영성체송 : 성주간 예절(대구 15쪽)
- 영성체 성가 : 334번(사랑의 성체성사)
(3) 성체를 옮김 : 만찬미사 후 전통적으로 십자가를 치우거나 가리웠으나, 상징적인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오히려 보다 더 큰 십자가를 제대 위에 안치하고 공경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 성체 옮길 때 : 시편성가(손상오 17쪽)
(4) 밤조배(성시간) : 오늘이야말로 주님과 한시간이라도 함께 깨어있는 시간을 가짐이 마땅하다. 성체를 모셔둔 제단 앞에서 교우들은 적당한 수난성가를 부른 다음 “올리바산의 예수님”을 묵상하고 침묵중에 조배한다. 이 밤조배에 낭독되는 복음으로는 요한 복음 17장에서 18장 11절까지의 말씀을 이용한다.
3) 성금요일
성금요일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인류를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그리스도 자신을 바치는 속죄의 제사를 이루신 날이다. 전통적으로 이 날은 말씀의 전례와 십자가의 경배가 중심을 이룬다. 죄악을 걸머진 십자가의 표시아래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인류 구원을 위한 주님의 수난을 상기한다.
- 입당송없음
- 일반적으로 긴 독서의 반복과 수난복음, 장엄기도 등으로 신자들이 피곤하고 지루하게 느낄 수있다.
- 오후 3시에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장엄예절은 저녁에 거행함이 좋다.
(1) 제 1부 : 말씀의 전례
- 화답송 : 손상오, 시편성가 62쪽
- 복음전 노래 : 성지주일과 같음
(2) 제 2부 : 십자가의 경배
- 십자가 경배의 권고 : “보라, 십자나무”(성주간예절,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126-127쪽)
- 십자가 경배 때 부르는 노래 : 십자가 경배 때 부르는 노래(대구 성주간 예절, 20쪽)
Crucem tuam (Taize 노래)
비탄의 노래: 성주간 예절 (대구, 20-21쪽)
- 성시: 대구, 22쪽
- 거룩한 고상나무 : 하나되리 55, 99쪽 혹은 비슷한 곡을 고름
(3) 제 3부 : 영성체
- 특송 : Galus의 “Ecce Quomodo Moritur”(보라, 의인의 죽음을)
4) 성토요일
성토요일에 교회는 주님의 무덤에 머물러 주의 수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며 제단을 벗긴 채 미사도 드리지 아니한다. 장엄한 부활성야의 예식을 거행한 다음에야 부활의 기쁨이 올 것이고 그 기쁨은 50일간 넘쳐흐르게 된다.
부활성야 : 부활성야는 생명의 축제요, 살아계신 빛의 축제로서 생명의 말씀을 들으며 재생의 세례와 빠스카 잔치 가운데 “주님께서 살아나셨습니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만 천하에 울려퍼지는 복된 구원의 밤이다.
(1) 제 1부 : 빛의 예식
- 불 축성과 초 준비
- 행렬 : “그리스도의 광명”(성주간 예절, 천주교 중앙협의회)
행렬하는 동안 신자들은 가지고 있는 초에 점화하고, 성당의 모든 전기불은 끈다.
- 부활찬송 : 부활찬송 중간에 부제가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면 신자들은 “또한 부제와 함께”라고 대답해야 한다.
(2) 제 2부 : 말씀의 전례
- 독서가 부활 성야의 중심요소임을 잊지 말 것.
- 구약에서 7, 신약에서 2, 모두 9개의 독서를 한다. 적어도 구약에서 둘, 혹은 셋의 독서를 읽어야 하지만 제 3독서인 출애급기 14장은 절대로 생략할 수 없다.
- 주로 1, 3, 7 독서와 서간 및 복음만 낭독하는 본당이 많다.
- 1, 3, 7독서와 화답송
- 1독서 화답송 : 손상오, 시편성가 63쪽
- 3독서 화답송 : 손상오, 시편성가 65쪽
- 7독서 화답송 : 손상오, 시편성가 69쪽 혹은 성가 58번 (이 몸은 애타게 당신을 찾습니다)
- 구약의 마지막 독서와 응송과 기도가 끝나면 제단의 불을 켜고 사제는 대영광송을 시작한다. 지방 지방관습에 따라 종을 친다.
- 사제의 본기도
- 사도들의 서간낭독과 알렐루야 : 서간낭독이 끝나면 모두 일어서고 사제(혹은 부제)는 성대하게 알렐루야를 시작한다. 그 다음에 모든 이가 이를 되풀이한다. 이어서 성가대는 시편을 노래하고 교우들은 알렐루야로 매절마다 응답한다. 필요하면 성가대원이 [사제대신] 알렐루야를 시작할 수도 있다. 알렐루야 : 손상오, 시편성가 70쪽
(3) 제 3부 : 성세 예식
- 성수축성 때 : “샘들아 주를 찬미하고, 세세에 주를 기리며 높이 받들어 모셔라”(성주간 예절, 천주교 중앙협의회)
- 성세서약 갱신 : 서약 갱신식후에 사제가 교우들에게 성수를 뿌리는 동안 성가 1번(나는 믿나이다)
(4) 제 4부 : 성찬의 전례가 계속된다.
9. 자비송을 노래하는 법
희랍어로 된 “Kyrie eleison”(“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이 기도는 상당히 길고도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4세기 초엽 동방에서 사용된 이 환호성은 원래 도문(litany)의 매 청원 끝에 연결되어 있던 신자들의 응답이었다. 부제가 기도의 지향을 발표하면 신자들은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통상적으로 대답을 하였는데(마치 현행 미사의 “보편 지향기도” - “신자들의 기도” 때에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하듯이) 이 대답은 도문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교황 젤라시오(492-496)는 동방 교회의 이 기도 형태를 말씀의 전례의 결론으로 사용하던 오래된 중재 기도의 한 형태로 바꾸면서 중재 기도의 끝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대답을 덧붙이도록 지시하였다. 이렇게 교황 젤라시오에 의해 바뀐 새 도문과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환호성은 이때부터 미사의 시작 부분에 자리를 잡게되었다. 거의 100년이 지난 후 미사 전례가 너무 길다고 생각한 교황 대 그레고리오(590-604)는 미사를 좀 짧게 만들기를 원하여, 특별한 날에는 대답(“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만을 노래로 하고 앞에 연결되어 있던 도문의 지향을 생략할 수 있도록 허락하게 된다. 이렇게 생략된 형태의 도문이 결과적으로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정형화 되어 버렸다. 우리가 바티칸 제2차 공의회 이전에 사용하던 세 번의 Kyrie, 그리고 세 번의 Christe, 또 하나의 세 번의 Kyrie의 형태는 불어권 나라에서 고정되었으며, 이렇게 세 번씩 세 번을 기도하는 근거는 바로 삼위일체 신학의 해석에 있었다. 신약성서, 특별히 사도 바울로에 의한 서간들에서 Kyrios는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그분의 신성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이 Kyrie가 참회 예식의 한 부분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을 경우, 참회 예식 후에 이 Kyrie는 이어진다. 주님을 찬양하고 그 분의 자비를 구하는 이 환호성은 일반적으로 모든 신자 즉, 성가대나 선창자와 함께 노래부른다. 경우에 따라서는 성가대만이 노래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에게 언급되는 각 환호성(“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은 일반적으로 두 번씩 중복되고 있지만 각 나라의 언어의 특성이나 음악적인 고려, 혹은 다른 환경에 따라 세 번씩 할 수도 있다. 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앞에 짧은 말을 덧붙힐 수도 있다(이를 음악 용어로는 Trope라 하며, 그 예를 한글로 된 미사 통상문에서 살펴 본다면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들을 용서하러 오신” 혹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성부 오른 편에 중개자로 오신” 등의 표현이 이에 해당한다).
이 “자비송”은 위에서 말한 여러가지 방법으로 노래할 수 있지만, 노래로 할 경우 이 기도는 반드시 짧고 간단한 곡으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거창한 곡을 노래하게 될 경우 시작예식이 지나치게 중요해 지기 때문이다. 실지로 시작 예식에서 가장 비중이 큰 노래는 ‘대영광송’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부분인 ‘대영광송’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Kyrie’는 짧고 간단한 곡이 되거나 그냥 낭송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사순 시기에는 ‘대영광송’이 없기 때문에 조금 길거나 다성음악도 괜찮으리라 생각한다(참조. 미사곡 선곡의 요령). 노래로 하지 않을 경우 모든 신자들이 부제(부제가 없으면 사제)의 지향 다음에 응으로 기도문을 외운다.
몇 가지 생각해 보자.
주례 사제가 참회 예식을 시작하고 나서 잠시 침묵을 지킨 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 하는 기도를 하게 되면 신자들은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노래로 혹은 말로 하게 되지만, Trope가 달린 다른 양식, 다시 말해서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들을 용서하러 오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하고 사제가 청원기도를 이끌어 간다면 성가대는 이 자비송을 노래해서는 안 된다(이렇게 되면 자비송을 두 번 하는 결과가 된다. 여러 본당에서 가끔 목격할 수가 있었다). 청원기도가 끝나면 곧장 “대영광송”을 노래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미사곡들은 원래가 세 번씩의 환호성으로 되어 있던 곡들이었는데 (적어도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이문근 신부님의 창미사곡들) 모두 두 번씩으로 바꾸고 말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 번씩도 응답을 할 수 있다(로마 미사경본의 총지침 30항).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두 번의 응답으로 노래를 바꾸었고 더구나 1997년 새롭게 미사 통상문이 바뀌면서 새로운 기도문에 따라 음의 길이가 바뀐 것도 있고 어떤 부분은 몇 소절씩 잘려나간 부분도 있다. 이건 웃기는 이야기이다. 글과 말에는 문법이 있듯이 음악에는 화성법이라는게 있다. 선율의 진행에 따라 어떤 화음은 다른 어떤 화음으로 진행하는 것이 정상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필수적이다. 이런 흐름을 완전히 무시하고 바뀐 기도문의 글자 수에 따라 음악을 맞추고, 심지어 몇 소절을 자르다 보니 글에서의 문법이 틀려지듯 어색한 음악이 되고만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본당에서 미사곡을 부르면서 느끼는 혼란스러움은 반드시 기도문을 새로 바꾸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또 한가지, 새 기도문의 대영광송 중간부분에는 “하느님의 어린 양 …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되어 있는데 “하느님의 어린 양”에서는 왜 “저희에게”라는 말을 생략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원어는 똑 같은데도 말이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자비송”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 볼 수 있겠다. 이것 때문에 “자비송”과 “하느님의 어린 양” 노래가 짤려나가게 되었고 이상스런 음악이 되었다고 본다.
미사 때 노래로 이 “자비송”을 하게 될 경우 선창자와 신자들, 성가대와 신자들이 번갈아 할 수 있다. 필요하다면 성가대만이 노래하는 것도 장려할 만하다. 만약 노래로 하지 않을 경우에는 청원기도가 같이 딸려 있는 자비송(“진심으로 뉘우치는 …”)을 사제와 신자들이 번갈아 하며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 같다. 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 청원기도는 원래 주례사제의 몫이 아니고 부제의 몫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제가 제대에서 주례사제를 돕는 미사에서는 이 청원기도를 반드시 부제가 하여야 한다. 미사 중 부제에게 할당된 부분이 겨우 네 군데 있는데(“자비송”의 청원기도, 복음 낭독, “보편 지향기도”,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부제의 몫을 주례사제가 대신 하여서는 월권 행위가 된다. 만약 부제가 없고 혹시 공동집전 하는 사제가 있다면 그 사제는 부제의 몫까지도 대신하게 된다.
10. 화답송(시편 응송)을 노래하는 법
1) 역사적 배경
유대인들의 회당 예식을 계속 이어가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전통적으로 성서 낭독에 시편이나 찬가를 노래함으로써 하느님 말씀에 응답하였다. 로마에서는 독창자나 차부제가 제1독서가 끝난 후 독서대에 다가가서 독서대의 한 계단(gradus = 층계 혹은 계단) 아래에 서서 시편을 노래하였는데 이를 ‘층계송’(Graduale)이라 하였다(그래서 옛날에는 한국에서도 이 노래를 ‘층계송’이라 하였다). 시편 구절은 독창자에 의해 불리어졌고 신자들은 주로 시편 자체에서 가져 온 짧은 후렴으로 응답하였다(지금은 선창자의 시편 구절 낭송을 신자들이 후렴으로 받는다 하여 한국 교회에서는 이를 ‘화답송’이라 개명한 듯 하다). 한 때는 매우 화려한 선율이 발전하였고, 시편 자체는 생략되기도 하였으며 시편의 노래는 잘 훈련된 성가대에 의해 연주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시편 응송은 특별한 중요성을 가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복구되었다. 원칙적으로 시편 응송은 노래로 불리어져야 한다. 그리고 모든 회중이 환호적인 후렴을 노래하면서 참여하게 되어 있다. 시편은 독서들 중의 하나와 문맥상으로나 영성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다. 많은 경우에 어떤 전례 시기를 위해서는 전통적인 시편을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시편 118편이나 66편은 부활절에 사용된다. 특별한 주제나 전례적인 연관성이 없는 성서 본문이나 시기가 나타날 때에는 ‘전례 성서’는 회중이 시편 전체를 접할 수 있도록 다른 특별한 시편을 배당하기도 한다. 시편의 노래를 쉽게 하기 위하여 ‘전례 성서’는 많은 수의 공동 시편이나 다른 전례시기에도 사용할 수 있는 후렴들을 배당하기도 한다.
말씀 전례는 첫 번째 독서 후의 이 노래가 불리어질 때 더 큰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시편 독창자는 시편 구절을 아주 단순한 선율로 읽더라도 노래로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만약 음악을 구할 수 없거나 노래할 마땅한 사람이 없을 때에는 시편 구절을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감정을 넣어 잘 읽어야 할 것이다. 이 노래(화답송)는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기능을 가진다는 것을 우선 생각하고 노래하거나 낭송해야 한다. 시편 선창자 혹은 낭송자가 잘 읽는다면 신자들은 그 문제 많은 ‘매일 미사’를 보지 않고서도 금방 후렴을 익히고 따라갈 수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신자들이 시편 구절이 끝나는 지를 느낄 수 있고 후렴을 손쉽게 따라 할 수 있을는지 연구해 보라.
2) 시편 성가의 사용
시편 응송이나 구절은 대구 대교구의 손상오 신부가 전례시기 가, 나, 다해 전부를 작곡해 놓은 “시편성가”가 있으니 이를 구입해서 사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혹시 ‘공동체 성가집’ 등에 알맞는 시편이 있다면 이것도 필요한 주일이나 축일에 이용할 수 있겠다(그러나 시편 전부가 작곡되어 있지는 않다). 경제적 사정으로 구입에 어려움이 있다면 신자들이 노래부를 후렴만 주보에 실리면 충분히 모든 신자들이 이 부분을 노래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주일에 필요한 시편을 미사 직전에 배우는 데에는 5분도 걸리지 않는다. 이 노래의 중요성을 아는 여러 본당에서 이와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실지로 매주 다른 시편 후렴을 본당에서 배우고 사용하기에는 어려울 수 있음으로 ‘전례 성서’에 준비되어 있는 주기적인 시편 후렴 몇 가지로써 이를 대신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위에 말한 바와 같이 부활절에는 시편 118편이나 66편을 노래로 만들어 부활절 내내 사용하는 방법이다.
3) 시편 응송의 적응
미사 때 시편을 사용하는 것은 시편 응송 때뿐이며 이 노래는 행동을 수반하는 노래는 아니다. 시편 응송 혹은 층계송은 아주 중요하고 유일한 노래로서 방금 들은 하느님 말씀에 대하여 하느님의 말씀인 시편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시편 응송 (화답송) 때에는 시편 이외의 다른 성가로 대신하지 못한다.
또 한가지 어떤 본당에서는 이 화답송을 남녀 신자들이 번갈아 하거나 성당 좌석 좌우의 신자들이 교대로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교대로 기도문을 외우는 “교송”(antiphona)과는 전혀 기도의 형식이 다른 것이므로 이 방법은 지양되어야 한다.
화답송의 노래하는 법을 정리하겠다. 먼저 선창자가 후렴을 노래하면 신자들이 이를 받아 노래하고 그 다음 선창자가 시편 구절을 노래한다. 이 시편 구절의 노래가 끝나면 신자들은 다시 후렴을 노래한다. 이런 식으로 다음 시편 구절을 노래하고 후렴을 노래한다. 물론 이 때 선창자의 자리는 해설자 석이 아닌 독서대이다.
참조 문헌 : “로마 미사경본”의 총 지침 36항, 90항; “전례 성서” 20항, 21항.
11. 복음환호송을 노래하는 법
알렐루야 / 복음 환호송 : 부속가(Sequence)
히브리어로 된 알렐루야는 ‘야훼를 찬미하라’ 혹은 ‘하느님을 찬미하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구약 성서에서는 이 기쁨의 환호가 히브리인들의 성전 의식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어떤 시편들을(“알렐루야 시편”이라 한다) 시작할 때나 끝날 때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알렐루야 시편 106-108, 111-114, 116-118, 135-136, 146-150).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요한 묵시록(19,1-9)에 딱 한번 나타나고 있는데, 천상에 있는 구원받은 자들의 개선 찬가의 한 부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알렐루야가 어떻게 전례 안에 도입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이 환호성을 어떤 곳에서 사용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어려운 문제로 대두된다. 성 아우구스틴(354-430)에 따르면 이 환호성은 매 주일에 노래 불리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5세기 경 로마에서는 이를 부활 때에만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러다가 로마의 이러한 관습은 결국 모든 부활 시기에 걸쳐 사용되기에 이르렀고 사순절을 제외한 모든 전례 시기를 통해서 사용되기 시작되었다. 이 환호성은 복음 낭독과 연결되어 있었고 가끔은 복음서를 들고 독서대를 향하여 행렬할 때에 수반되는 노래였다. 이 관습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지금의 전례에 복구되었다.
초기에는 이 환호송을 시작하는 독창자들이 알렐루야의 마지막 모음, 즉 “야”를 길게 그리고 장식하는 것에 익숙하였음을 우리는 서양음악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렇게 마지막 모음을 길게 장식하여 노래부르는 창법을 서양음악사에서는 “Jubilus”라 한다(그레고리오 성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쉽게 감이 안 오겠지만 … 본당 부활 성야 예절 때를 잠깐 생각해 봅시다. 만약 복음 읽기 전에 전통 그레고리오 성가의 알렐루야를 사용했다면 마지막 ‘야’에서 길게 장식되는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음악적으로 이렇게 길게 장식하는 Jubilus를, 성 아우구스틴은 “가사없는 기쁨”(Joy without words)라고 묘사하였다. 중세 초기에는 이 모음 위에 가사를 붙이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더욱 발전해 독일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는 수많은 Sequence(부속가)를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부속가는 어느 정도 독립된 음악 작품으로서 가끔은 운문 (韻文)의 가사를 가지면서 알렐루야에 잇따라 불리어졌다. 거의 5,000여 개에 이르던 부속가들은 16세기 트렌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거의 없어지고 지금 전례에서는 오직 4개의 부속가들만 사용하도록 되어있다. 즉, 부활 대축일, 성령강림 대축일에는 의무적으로 부속가를 사용하여야 하고, 성체 성혈축일 그리고 고통의 성모 축일에는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알렐루야 노래가 부활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순시기에는 사용할 수 없었으며, 대신 ‘연경’이라고 알려진 시편 노래로 이 자리를 메 꾸었다. 연경은 반복이 없는 독창곡이었다. 지금의 전례에서도 사순시기에는 알렐루야를 노래하지 못하며, 대신 “몇 가지 지정된 [찬미] 환호 가운데 하나를 사용할 수 있다”(한국어 미사 통상문, 전례법규 10).
- 복음환호송을 부를 때 유의할 점
1) 알렐루야는 전례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노래하거나 성가대에 의해서 혹은 선창자에 의해 시작된다. 그 다음 이를 모든 신자들이 받아서 한번 더 노래한다. 그 다음에 ‘전례 독서’ 책에 있는 시편 구절을 선창자가 노래하고, 이 노래가 끝나면 모든 신자들은 알렐루야를 한 번 더 노래한다(로마 미사경본의 총지침, 37항 a). 위 조항의 권고를 따른다면 알렐루야를 처음 시작할 때에는 두 번의 알렐루야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많은 본당에서는 한 번의 알렐루야로 끝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권고할 만한 방법으로는 선창자(혹은 성가대)가 먼저 알렐루야를 시작하고 신자들이 이를 받아 노래하고 시편구절을 선창자(혹은 성가대)가 노래하고, 끝에 전 신자들이 알렐루야를 노래하는 것이다.
2) 위의 문헌 39항에서는 복음 읽기 전에 알렐루야를 노래로 하지 않을 경우에, 읽기보다는 아예 빼버리는 것이 좋다고 권고하고 있다(이 경우 미국주교회의 전례위원회는 침묵을 장려하고 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노래는 복음에 대한 환호송이다. 곧 듣게 될 복음,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다시 말해 복음 환호송은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는 노래이다. 환호하며 그분을 반기는 표현은 말로써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평일미사에서도 반드시 노래로 하도록 할 것이다. 만약 알렐루야 다음에 오는 시편구절을 노래할 사람이 없다면 이 부분은 한 사람이 기쁘게 큰 소리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알렐루야는 전 신자들이 노래로 하면 되겠다. 거듭 반복하지만 평일에도 알렐루야를 노래로 하자.
3) 그 다음 문제는 우리들이 알렐루야를 노래할 적에 어떤 빠르기와 느낌을 가지고 노래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즐거운 일이 있고 기쁠 때 우리는 말씨가 빨라지고 소리가 높아지는 것을 느낀다. 하느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기쁨과 말씀에 대한 사랑이 여러분의 노래를 듣고서 느낄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 한없이 느려터지고 맥없는 알렐루야, 그레고리오 성가를 잘 못 부르면 배 아픈 사람이 신음하는 것 같이 들린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는가? 성가 365번을 여러분은 어떻게 노래하는가? 알렐루야 (쉬고) 알렐루야 (쉬고) 알렐루야 (끝낸다). 한 숨에 끝내야 되는 곡이다. 어떤 알렐루야를 노래하든지 생기있고 빠르게 알렐루야를 노래하라. 그리고 그런 곡이 아니면 절대 선택하지를 말아야 한다.
4) 마지막으로 알렐루야 다음이나 화답송에서 시편구절을 노래하는 법을 생각해 보자. 선창자나 성가대의 발성이 나빠 가사를 알아듣지 못하게 노래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말도 안되는 곳에서 숨을 쉬거나 말을 끊는 것도 상당히 문제다. 먼저 한국말이 되도록 하라는 충고를 드리고 싶다. 여러분이 시편구절을 노래할 때, 우리가 한국말을 할 때와 같이 끊을 곳에서 과연 끊고 있는지, 그리고 말의 길이를 짧게 하고 있는지 생각하며 미리 숨을 쉴 곳을 정한 다음 노래하도록 하자. 물론 신자들이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똑똑하게 발음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알지도 못하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흉내 낸다고 마지막 쉼표 앞의 말을 길게 늘리는 것은 한국말이 아닌 듯 한다.
이런 낭송을 위해서는 소리가 곱고 그렇게 큰 목소리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면 좋겠다. 어느 본당에서 성악가가 이 시편을 노래하는 것을 들었는데 오페라의 무슨 ‘아리아’를 노래하는 줄 알았다.
이제 우리 성가대원들도 네 성부에서 소리내고, 소리지르기(!) 에서 벗어나 음악을 만들 줄 알았으면 좋겠다. 3년 전 어느 본당 신부님 은경축 미사 때의 성가대의 노래는 성가가 아니고 완전 행진곡이었음을 지금도 기억한다. 얼마나 씩씩하고 우렁찬지 … 먼저 성가 가사를 음미하라. 어떤 마음가짐으로 노래해야할지 그리고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가 못 부르는 성가대일수록 신앙심을 강조한다. 신앙심은 모든 신자가 지녀야할 기본적인 것이기에 성가대원이 자랑할 것은 못 된다. 신앙심 위에 음악적인 기술이 함께 할 때 그 성가대는 제 구실을 하는 것이다.
12. 환호송은 꼭 노래로
한국의 각 성당에 비치되어 있는 성가 안내판에는 예외없이 입장, 봉헌, 영성체, 퇴장 성가의 번호만(!) 게시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이 네 가지의 성가들은 노래로 해도 그만, 기악으로 해도 그만인 성가이며 심지어는 생략할 수 있는 성가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전례음악적으로 볼 때 행렬을 수반하는 기능을 가진 노래(찬미가)이기 때문이며, 성가의 중요성을 따져 볼 때에도 이런 행렬성가는 환호성이나 미사곡보다 우선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원래 우리 가톨릭의 전통은 찬미가(hymn, 우리는 무엇이든지 성당에서 부르는 노래는 모두 성가라 한다)를 성직자나 수도자들의 아침, 저녁기도(성무일도)의 첫 부분에서만 노래하였다. 성무일도의 다른 부분이나 미사를 위해서는 그레고리오 성가가 “Liber Usualis”라는 책에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더구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의 미사에는 그레고리오 성가가 성직자와 성가대에 의해 불리어졌으며, 신자들은 미사 때 성가를 부를 기회조차 없었기에 지금 우리가 성가집에서 보는 찬미가 형태의 노래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개신교는 태어날 때부터 신자들이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회중찬미가 (Congregational Hymn)를 모국어로 노래하도록 장려하였다. 이런 독일의 개신교 전통이 가톨릭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가톨릭에서는 미사 간간이, 그것도 미사의 기도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가사를 노래하였다. 그러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각 나라의 모국어로 된 전례성가를 장려하게 되지만 전례문에 맞춘 성가를 미쳐 준비해 두지 못하였던 우리 나라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런 찬미가 형태의 곡을 차용하기 시작하였다. 공의회가 끝난지 벌써 35년이 흐른 지금,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새 전례가 요구하는 전례문을 바탕으로 한 성가들을 많이 준비하였지만 우리 한국교회는 아직도 이 네 가지 행렬성가 중심의 전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행 미사가 가장 우선적으로 노래부르도록 요구하는 성가는 바로 환호성(acclamation)들이다. 즉 복음 환호송(알렐루야), 거룩하시도다, 신앙의 신비여, 주의 기도 직전의 마침 영광송(아멘)이다. 그 중에서도 “거룩하시도다”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만일 미사 전체를 통해 성가 한 곡만을 노래한다면 단연코 “거룩하시도다”를 노래해야 한다. 또 “알렐루야” 같은 경우, 이 복음환호성을 노래로 하지 않을 바에는 아예 침묵을 지키라고 교회는 가르친다.
우리 한국교회에는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행렬성가와 신심성가가 미사 때 주로 불리어지고 있다. 성가집에는 복음 환호성 3곡, 신앙의 신비여 4곡, “Amen”이 6곡이 실려 있는데 비해 예를 들어 성모신심 노래는 30곡이 넘고 있는 실정이다(게다가 미사 때는 사용하지도 못하는 성체찬미 내지 흠숭의 노래 ‘Tantum ergo’ 등도 상당수가 실려있다. 이 정도 이야기하면 교회음악 작곡가는 무엇부터 작곡해야 하며, 어떻게 성가집을 편집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후에 한번 다룰 것임).
전례가 우선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성가는 우리 한국 교회에서 보물로 여기는 행렬을 위한 노래들이 아니고, 매일 미사 때에도 반드시 노래로 불러야 하는 바로 환호성이다. 국가의 행사 때 애국가를 노래하지 않고 그냥 읽는 법은 없지 않은가? “지금부터 애국가를 다같이 외우겠습니다” 하는 법은 없다. 생일축하식 때 “생일 축하합니다”라는 노래가 꼭 불리어지듯이, 미사 전례자체가 노래로 요구하는 것들이 바로 환호성이다. 또 이 환호성은 모든 신자가 환호, 기쁨 중에 노래하는 것이기에 조금 빨리 노래하여야 하며, 그 작곡은 신자들이 부르기 쉬운 선율이어야 하고 경쾌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도 미사 전례 때 환호성들부터 먼저, 꼭 노래로 하도록 하자.
13. 대영광송을 노래하는 법
대영광송이라 불리어지는 “Gloria”는 성서의 시편과 찬가를 모델로 하여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만들어 사용한 찬미가(Hymn)의 보고(寶庫)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하나의 유산이다. 이 찬미가는 기쁨의 찬미가이며 그 내용 역시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찬미의 노래는 처음으로 희랍과 시리아의 자료들에서 발견되는데 원래는 부활절 새벽 기도의 찬미가로 사용되었고, 점차 동방 교회의 아침 기도의 결론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찬미가는 Gaul을 통해 서방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6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Roma 미사 안에서 발견된다. 이 노래는 본래 주교만이 불렀던 것으로 그가 주재하는 주일미사 때나 순교자들의 축일 때에 사용되었다. 사제는 일년에 단 한번 즉 부활 전야 미사 때에만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는데 11세기 때부터 사제들도 주일에 거행되는 모든 미사와 축일 때 대영광송을 노래하게 되었다.
대영광송은 원래 모든 회중들의 노래였기 때문에 단순하게 작곡되었었다. 그러나 이 찬미가가 화려한 음악작품으로 꾸며지면서 성가대에 의해서 불리어지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우리는 이 찬미가를 부르는데 기본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어떻게 노래할 것인가?
이 찬미가로써 신자들은 성령 안에 함께 모여 하느님 아버지와 하느님의 어린양을 찬미한다. 이 노래를 부르는 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회중에 의해 불리어지거나, 성가대와 백성들이 교대로 노래할 수 있다. 그러나 특별한 기회에는 전적으로 성가대에 의해서도 불리어질 수 있다. 만약 노래로 부르지 않을 경우 모든 신자들에 의해 낭독되거나 신자들이 서로 교대로 낭송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본당에서 하고 있듯이 사제와 신자들이 교대로 낭송하는 것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제일 중요한 문제는 노래로 부르지 않고 외우게 될 경우, 이 대영광송은 이미 찬미가의 기능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대영광송은 축일을 위한 축제의 성격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제는 그 정의도 모호한 “창미사”라는 이름으로 주일의 중심 미사 한 대만을 미사 통상문(Kyrie, Gloria, Sanctus, Agnus Dei)를 노래하고 마는데 이것은 편의주의로만 미사 거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한 번 다룰 수 있겠지만 미사 통상문을 노래하는 것은 평일 미사 때에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모든 주일 미사에 Gloria를 노래하도록 해야 한다.
입당노래, 자비를 구하는 노래에 이은 대영광송의 노래는 입당 예절을 너무 비대하게 만들며 신자들이 피로(?)를 느낄 수도 있겠다. 따라서 Kyrie를 노래하는 법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주여 자비를 구하소서”는 참회 어구를 가진 세 번째 양식으로 외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다.
이 대영광송은 대림시기와 사순시기를 제외한 모든 주일미사, 장엄미사, 축제 그리고 지역 공동체의 장엄한 예식 때 노래 불리어지거나 낭송됨으로써 이 노래의 특별한 장엄한 성격을 나타낸다. “라틴어 미사곡”을 노래하는 법에서도 한번 언급했었지만 이 대영광송의 선창은 반드시 사제에 의해 이루어질 필요는 없으므로 노래하기 힘들어하는 사제에게 무리하게 선창을 요구하지 않으면 좋겠다. 이 노래는 “사제, 혹은 선창자 아니면 모든 이가 함께 시작할 수도 있다”고 “로마 미사경본의 총지침 87항”은 가르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대영광송의 새로운 전례문은 신자와 성가대의 교창으로 노래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가능성을 주고 있다. 어떤 형태의 음악으로든지 이 대영광송을 작곡할 수 있지만(단순한 음악, 화려한 음악, 다성음악, 합창, 단성 등) 선율이나 화성 그리고 리듬이 축제의 분위기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종종 무척 아름다운 선율을 가졌지만 리듬감이 떨어짐으로써 우유부단한 노래가 되고, 반면에 리듬감은 살아 있지만 아름다운 선율이 없는 평범한 대영광송을 볼 수 있는 것은 작곡하는 사람들이 이 노래의 기능을 생각하지 않은 탓이다.
참고 문헌 : 로마 미사 경본의 총지침 31항, 87항; 미국 주교회의 전례 위원회 발행 “가톨릭 예배 음악” 66항
14. 봉헌성가를 노래하는 법
먼저 성가 게시판의 “환호성은 꼭 노래로”하는 기사(성가 게시판 133)를 참조해야 하겠다.
예물봉헌 행렬 때 노래를 부르는 관습은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것으로 아우구스틴 성인(354-430)에 의해 알려졌다. 로마에서는 두 개의 성가대(혹은 한 성가대가 양쪽으로 나누어져)가 교대로 시편 구절과 그리고 시편의 시작과 끝에 교창(交唱, antiphona, antiphon)을 노래하였다(antiphona는 라틴어 동사 antiphonare - 한 옥타브로 교대로 노래하다 - 에서 나온 말로 남성과 여성이 교대로 노래를 부른데서 유래된 것이다. 왜냐하면 남성과 여성 성부의 음정은 8도, 즉 한 옥타브의 차이가 난다. 초대 교회에서 시편을 2개의 성가대가 교대로 노래했는데 아마 제2의 성가단이 여성 내지는 어린이로 구성되어 이들에 의해 노래가 불려졌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주어졌다고 본다).
- 본당에서 봉헌 노래하는 법
우리가 미사 중, 예물 봉헌 행렬 때 노래를 부를 때 이 노래는 적어도 예물이 제단 위에 놓여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봉헌 노래의 규칙은 입당 노래의 규칙과 동일하다. “환호성은 꼭 노래로”의 기사(성가 게시판 133)에서 밝힌 바와 같이 행렬을 수반하는 이 노래가 언제나 필요하고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미사가 시작된 이래로 신자들은 입당 노래, Kyrie, 대영광송, 두 서너 개의 독서, 화답송, 알렐루야, 강론, 그리고 신자들의 기도 등으로 인해 이제 어느 정도의 휴식이 필요하며, 이 때 신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 위한 침묵 시간을 가지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이다. 만일 전례가 계속해서 신자들의 정신 집중을 요구하고 그로 인해서 신자들이 계속적으로 긴장을 풀지 못하게 한다면 그 전례의 구성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전례는 긴장도 풀 수 있고 매력적이며 평온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때와 영성체 후 묵상시간이 성가대들이 잘 준비한, 특별한 곡을 연주하기에 가장 좋은 때인 것 같다. 그래서 성가대에 의해 불리어지는 노래가 전례 공동체에게 평화스러운 마음을 만들어 주며, 묵상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면 이 음악의 봉사적 기능은 충분히 완수되는 것이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이 때 오르간 등 기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오르간과 좋은 오르가니스트가 필요하다. 좋은 오르가니스트는 단순히 음표만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고 신자들이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런 연주는 신자들에게는 하나의 축복이며 연주자 자신에게는 하나의 기도가 된다. 정말 이런 오르가니스트를 가진 본당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저 공짜로 봉사할 사람들만 찾다니….
- 우리가 예물 봉헌 행렬을 위한 성가를 선택할 때에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봉헌 노래의 올바른 기능은 봉헌 행렬을 수반하는 것(음악)이다. 따라서 봉헌 노래라 하여 노래말(가사)이 꼭 빵과 포도주, 혹은 봉헌에 대해 언급할 필요는 없고, 전례 시기에도 맞으면서 찬미와 기쁨을 나타내는 내용이라면 어떤 성가라도 가능한 것이다(미국 교구들을 위한 로마 미사경본 총지침의 부록, 50항; 미국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발행의 Music in Catholic Worship, 71항 참조). 그러나 피해야 하는 성가는 그리스도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봉헌에 대해 말하는 가사를 가진 것이다.
행렬하는 신자들(봉헌 때와 영성체 때)은 성가책을 들고 나가기가 거북스럽다. 따라서 이런 성가들은 다소 짧은 것이 좋으며, 후렴을 가진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성가대가 시편이나 성가의 구절 등을 노래하고 신자들은 간단한 후렴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예식의 중요성은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의미에 기초한다는 것을 생각하자.
참조 : 로마 미사경본의 총지침 50항; 미국 교구들을 위한 로마 미사경본 총지침의 부록 50항; Music in Catholic Worship(미국 주교회의 전례 위원회 발행) 71항
15. “거룩하시도다”를 노래하는 법
“거룩하시도다”의 이 기도문은 이사야서 6장 2-3절의 환영에서 영감을 받아 쓰여진 것으로 초대 교회는 회당(Synagogue) 예식의 아침 기도 때에 이 기도문을 노래로 불렀다. 아마 이 기도는 유대 - 그리스도교 신자의 영향을 받아 동방 교회의 성찬 기도에 사용하게 된 것으로 추정되며, 5세기 중엽에는 서방 교회에서도 이 기도문을 일반적으로 받아드려 노래로 불렀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부르던 환호송에서 그 전례문을 취한 것이다(마태 21,9 참조). 6세기 중엽부터 Gaul 지방에서는 이 문장이 ‘거룩하시도다’에 이미 합쳐졌고 그로부터 일세기 후에는 로마에서도 하나의 기도로 이루어져 사용되었다.
원래는 ‘거룩하시도다’가 전체 신자들에 의해 불려졌지만, 중세기 초에 이 기도의 노래는 성가대에 일임되었다. 그 이유는 다른 성가들과 마찬가지로 평민들은 라틴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며, 예술적인 작품을 전례에 도입하려는 교회와 작곡가들의 노력으로 신자들이 노래부르기에는 너무 힘들었기에 입을 다물게 되고 잘 훈련받은 성가대가 이를 노래하게 되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전례 중에 성가대가 계속해서 이 기도를 노래하는 동안, 사제는 혼자서 성찬기도를 계속했었다. 지금과 같이 사제와 신자들이 함께 ‘거룩하시도다’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고, 사제와 성가대는 각자 다른 기도를 계속한 것이다. 성변화가 이루어진 후에 부르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Bene-dictus)이 노래되기 시작하면서 더욱 복잡한 멜로디를 가진 것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6-7세기에는 하나의 기도문으로 통합되어 있던 것이 중세기부터 두 개의 기도로 나누어져 ‘거룩하시도다’는 성변화 전에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는 성변화 후에 노래하게 되었다. 이런 증거는 오늘 우리가 큰 축일에 주로 사용하는 라틴말 미사곡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이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거룩하시도다’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다시 한번 원래의 모습을 찾아 하나의 환호송으로 결합되었으며, 감사 서문경의 결론으로서 천사와 일치하여 사제와 신자들에 의해 노래 불리어지거나 낭독된다. 우리 모두는 천사와 일치하여 ‘거룩하시도다’를 노래하거나 외운다(로마 미사경본의 총지침 55항). 회중들은 이 환호송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천주 성부께 찬미를 드리는데 일치하라는 초대에 응답하게 된다. 하나의 목소리로 성인들과의 모든 통교 안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
‘거룩하시도다’는 그 자체로 성찬 공동체의 탁월한 일치의 노래이기에 1967년 3월 5일에 발표된 교황청의 성음악 훈령 34항은 이 기도를 모든 전체 신자들에 의해 노래로 불려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고 아울러 이렇게 전 신자가 노래하는 것이 바로 전통을 따르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감사송의 마지막 환호인 거룩하시도다는 원칙적으로 모든 사제와 신자가 노래한다.” 따라서 이 노래는 백성들 전체를 위한 것이기에 비록 성가대가 ‘미사 통상문’ 전체를 노래한다고 하더라도 이 노래만큼은 신자들도 함께 노래할 수 있는 친숙한 것으로 곡을 선정함이 마땅하다.
미사 중에 부르는 노래의 가치를 성찬기도와의 연관성 그리고 그 근접성으로 정의를 내린다고 한다면 성찬기도의 심장에 위치하고 있는 ‘거룩하시도다’야말로 미사 중의 가장 중요한 환호송이다. 만약 회중이 미사 중에 성가를 한 곡만 부른다면 그것은 ‘거룩하시도다’이다. 또한 매일미사에서조차도 반드시 노래로 불리어져야 할 것은 바로 ‘거룩하시도다’라고 한다.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평일미사 때 꼭 부르는 입당, 봉헌, 영성체, 퇴장 노래 대신 ‘거룩하시도다’를 비롯한 환호송을 노래부르는 것이 정착되어야겠다. 미사 전례문 자체가 노래를 요구하는 환호송을 노래하지 않고, 부수적인 것을 노래하는 것은 올바른 미사 거행을 위해서도 개선되어야 한다. 이런 올바른 전례와 전례음악의 실천은 무엇보다도 앞으로 사목 현장에서 일하게 될 사제와 수도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와 수련소에서 우선적으로 그리고 필수적으로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신학교와 수도회에서는 이런 점에서 매일 거행되고 있는 전례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작품의 다양성이 요구되는 한국 교회
“대축일이나 기타 필요한 때에 사용하는 음악 작품은 화음 그리고 descant를 가진 것이 적합하지만 이 성가는 사제와 백성들에게 속하는 것이기에 성가대는 신자들이 노래부르는 부분을 쉽고 그리고 효과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가톨릭 예배 속의 음악’ 56항). 위의 문헌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어떤 성가라도 다양한 방법으로 작곡, 연주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작곡되는 ‘미사통상문’을 살펴보면 언제나 성가대와 신자들이 교창하는 것으로 작곡되어 있어 다양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에 이문근 신부님이 작곡하신 미사곡의 한 예를 현재의 어떤 작곡가들도 극복하지 못하고 많은 작곡 방법 중의 한 가지인 이 신부님의 작곡 형식만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16. 신앙의 신비여를 노래하는 법
Memorial Acclamation(신앙의 신비여, Mysterium Fidei)
"기억 환호송" 노래하는 법
성찬 제정과 축성문에 뒤따라오는 백성들의 환호성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로마 전례에 새로이 도입된 것이다. 이와 유사한 관습은, 성찬 제정과 축성 기도문이 끝날 때마다 백성들이 “아멘”을 노래한 동방 교회의 어떤 성찬 기도문에서 발견된다.
성찬 제정과 축성문이 끝나면 사제와 부제는 성체와 성혈에 깊이 절하고 부제가, 부제가 없을 때에는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 하고 초대의 말을 한다. 이 초대의 말은 여러 성찬 기도문에 삽입된 아주 오래된 것으로, 포도주 축성시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삽입된 로마 교회법의 가장 오래된 사본 안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표현의 올바른 의미는 이러한 논란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이제는 성찬 제정의 말에서 백성들의 환호송을 유도하기 위한 초대의 부르심으로 변형되었다. 이 말의 의미는 회중의 응답으로써 뚜렷해진다. 신앙의 신비는 부활의 신비이여, 그리스도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 안에 현존하시는 신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려는 사랑 안에 구체화된 하느님의 모든 계획이다.
우리는 우리 믿음의 가장 중심되는 신비인 부활의 신비 안에서 서로의 신앙을 도와준다. 이 환호송은 주님의 고통받으심과 영광받으심을 그분의 재림에 대한 신앙의 표현과 함께 정확히 기억하는 환호송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의 기도문과 음악이 바람직하다.
기억 환호성은 단순히 신자들의 주의력을 ‘거룩하시도다’의 끝 부분에서부터 ‘마침 영광송의 아멘’ 대답까지 집중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성찬기도에 온 회중을 능동적으로 참여시키려는 하나의 의도를 가진 표현이다. 미사 안에서 그들이 세례성사로 받은 사제직을 나눔으로써 신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전례 거행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는 모든 신비에 대해 표현하고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다(Music in Catholic Worship, 57항 참조).
라틴어와 한국어 기억 환호송은 세 개의 응답을 주고 있다(영어 기도문은 네 개로 되어 있음). 첫번째 응답 (가)는 시리아 예식에서 빌려온 형식에 기초한 것으로서 죽음,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두 번째 재림을 상기시킨다. 두번째 형식 (나)는 코린토 전서 11장 26절을 거의 자구마다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다)형식은 그리스도의 최후의 재림은 언급하지 않는 유일한 환호송이다. 이 환호송은 누차 말씀드린 대로 반드시 평일에도 노래로 하도록 해야겠다.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는 전례 시기나 축일의 성격에 상관없이 언제나 (가)양식만을 노래하거나 외우는 경향이 있다. 우리도 전례시기에 따라 맞추어서 노래하면 안 될까? 지금 가톨릭 성가집에는 (가)양식을 위해서 두 곡이 준비되어 있으며, (가) (나) (다) 양식 모두를 위해 4곡이 실려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양식을 위해 작곡된 것들은 성가집이 처음 출판될 때(1985년)에는 모두 (가) 양식만을 위해 작곡되었다가 개정판을 내면서 (나) (다) 양식에 가사만을 맞춘 것이기에 전례문과 선율 사이에 조금 무리가 있다고 보아진다. 아직도 이 환호성은 많이 부족한 상태이기에 많은 작곡이 나와야겠고, 그래서 각 본당마다 사용하기 쉬운 것들을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어야겠다. 그리고 노래 속도를 조금 빨리 잡아서 너무 질질 끌지 않았으면 한다.
또 노래하는 방법에도 “마침 영광송과 아멘”에서와 같이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이 환호송을 노래할 수 있다. 사제가 하는 ‘신앙의 신비여’는 성가집의 악보대로 즉 작곡자가 원하는 대로 노래할 수 없다면 사제는 그냥 음을 약간 높여 평탄하게 ‘신앙의 신비여’ 하고 외우면 될 것이다.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성찬 제정과 축성문을 외울 때 즉 거룩한 변화 때의 신자들의 태도이다. 옛날 트렌트 미사에서는 이곳에서 의심많던 토마 사도가 예수님의 부활 후 발현 때에 한 고백 즉 “내 주시요 내 하느님이시도다”를 외우도록 한 습관 때문에 지금도 이 부분에서 나이많으신 어른들이 이 기도를 외우고 있다. 아니면 옛 풍습대로 어떤 본당에서는 오르간 독주를 하는 경우도 있고, 더욱이 성령기도회에서는 성체를 축성하고 나서 그리고 성혈을 축성하고 난 다음에는 매번 심령기도를 바치는데, 지금 전례에서는 모두 지양되어야 할 것들이다. 이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 세우신 그 신비로운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17. 마침영광송과 아멘을 노래하는 법
성찬기도의 전통적인 결론은 찬미와 감사의 장엄한 언급으로 끝났으며, 이 결론은 주로 삼위일체의 영광송의 형태로 되어 있었고 신자들은 이에 아멘으로 응답하였다. 이 마침 영광송과 아멘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2세기 중엽 유스티노 성인에 의해 잘 증명되었다. 성인은 이 영광송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요구하면서 “감사의 기도가 끝날 때, 예절에 참여한 모든 신자들은 아멘으로 자신들의 동의를 나타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호교론 1, 65: 3).
옛 교황 전례에서는 수석부제가 기도문의 결론 부분에서 성작을 높이 들었으며, 교황은 축성된 성체를 그 성작에 대고 있든지 아니면 성체를 단순히 들어올리고 있었다. 이러한 동작은 백성들의 마지막 환호가 끝날 때까지, 즉 이 아멘 환호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중세기에는 성체와 성혈을 거양하는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십자가 표시를 도입하여 이 행동을 짧게 만들었다. 14세기 때부터 사제는 성작을 제단에 놓고, 장궤한 다음, per omnia saecula saeculorum(세세에 영원히 …)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결론의 기도는 곧 뒤따라 올 주의 기도의 도입부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종종 ‘작은 영광송’이라 불리던 이 기도 형태는 16세기의 트렌트 전례에서는 사라졌다가 바티칸 제2차 공의회 이후에 그 본래의 아름다움과 중요성이 다시 복구되었다. 빵과 잔은 마침 영광송이 사제에 의해 노래되거나 낭독될 동안 봉헌의 동작으로 높이 들어 올려진다. 만약 부제가 있다면 성작은 부제가 들어올리게 된다. 이 때 모든 신자들은 찬성과 지지의 표시로 아멘으로 환호한다. 이렇게 신자들은 이 장엄한 아멘 기도를 통해 사제에 의해 낭독된 성찬기도에 동의하며 이 기도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다.
이 응답을 더욱 효과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아멘을 반복하고 증가시킬 수 있다. 성가대는 백성들의 환호에다 화음을 더 할 수 있고 이를 계속해 전개시킬 수 있으며(Music in Catholic Worship, 미국 주교회의 58항) 다른 장식의 성부를 덧붙일 수 있다.
감사 서문경에서부터 주의 기도의 영광송까지 계속되는 대 성찬기도는 미사성제의 가장 핵심 부분이다. 따라서 이 마침 영광송은 가장 중요하고 장엄하게 노래되어야 한다. 이 기도의 분위기 역시 영광스럽고 장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주례자는 감사를 드리고 백성들은 자신들의 ‘아멘’ 혹은 감사를 노래함으로써, 두 가지 행위는 하나의 감사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이 성찬의 전례는 사제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온 백성에게 속하는 행위이며 기도이다. 교회는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희생의 기념 안에 실지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당신의 지체인 신자들을 위해 성체 성사 안에 자신을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린다.
- 마침 영광송에 대한 우리의 응답 : 아멘
아멘이라는 두 개의 음절로 사제가 외운 긴 성찬기도를 우리가 동의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옛부터 동방의 전례들은 아멘을 세 번 노래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바로 이렇게 세 번 노래함으로써 환호송의 풍성한 가치를 나타내었고, 이 해결책은 전례적으로나 음악적으로 근거가 확실하고 합법적인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의 가톨릭 성가집에도 10개의 ‘아멘’ 환호송 모두가 이렇게 세 번 반복함으로써 그 의미와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지만 과연 각 본당에서 여러 가지의 아멘을 이용하는지 의문이 간다. 매번 바꾸는 것은 좋지 않지만 시기와 축일의 등급에 관계없이 일년 내내 같은 곡을 사용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하겠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이 환호성을 유도하는 ‘마침 영광송’(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사제에 의해 노래 불리어질 수 있도록 한 곡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참으로 다행입니다. 새 미사 통상문에 따른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곡 I, II, III, IV에 이 마침 영광송이 작곡되어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성가집에는 들어가 있지 않으니 아무래도 사용도가 떨어질 것 같습니다). 작곡가들은 우선적으로 미사 거행에 필요한 이런 전례문을 바탕으로 한 작곡을 하는데 신경을 써야 한다. 입당, 봉헌, 영성체, 퇴장 등의 찬미가는 지금 성가집에 있는 것으로도 충분할 정도이다. 우선 시급한 것은 많은 환호송과 전례문을 작곡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전례문을 만들 때는 미사의 흐름을 깨뜨리지 않는, 즉 말하는 속도의 노래 (Speech - song)가 적합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곡의 음악성이나 신자들의 반응만을 생각하여 쓸데없이 곡을 길게 장엄하게 만드는 것은 적어도 전례문을 바탕으로 한 노래로는 알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가진 성가집의 ‘아멘’ 10곡도 2/2박자의 곡으로 단축시켜 노래한다면 미사의 흐름을 깨뜨리지 않고도 장엄한 환호성을 노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환호성을 이렇게 4성부로만 천편일률적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아멘이 끝나는 부분에서 성가대가 discantus를 노래하는 등 아멘을 확장, 증가시키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이렇게 ‘아멘’ 환호가 길게 장식되어 노래되더라도 미사를 주례하는 사제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성체와 성작을 들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아울러 밝힌다. 마치 영성체 때에 사제가 성체를 들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 …” 하고서는 신자들이 쳐다볼라치면, 금방 내려 버리기 때문에 기도와 동작이 맞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전례를 연출하는 것과 같다.
18. ‘주님의 기도’를 노래하는 법
‘주님의 기도'가 미사에 처음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4세기 말엽이었다. 빵, 용서, 그리고 상호간의 평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바치는 이 기도는 영성체를 준비하는 이상적인 기도였으며, 보통 “빵 나눔” 의식 직후에 이 기도를 바쳤다. 그러나 성 아우구스틴(354-430)의 영향을 받은 교황 대 그레고리오(590-604)께서는 이 주님의 기도를 성찬기도에 밀접히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였기에 “빵 나눔” 의식 이전으로 그 자리를 옮겼다. 동방 교회에서는 모든 신자들에 의해 이 기도가 노래로 불리어졌는데 반해 서방 교회에서는 이 기도를 사제만 드릴 수 있도록 했으며 신자들은 각 청원 끝에 혹은 로마 전례에서와 같이 이 기도의 끝에 바치는 아멘을 바치도록 하였다.
관습적으로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에는 주님께 완전한 평화를 청하는 확대된 기도가 뒤따랐다. 부속기도(Embolism : 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한 평생 평화롭게 하소서 …)라고 알려진 이 추가된 청원 역시 주의 기도가 미사 때에 처음으로 도입된 4세기 말엽이라고 추정된다. 로마 전례서의 부속기도는 성모님과 로마에서 특별히 공경하던 성인들을 불러 기도하였다.
비쟌틴 전례는 전통적으로 이 주의 기도를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라는 환호송으로 끝마쳤는데 이 영광송은 외형적으로 볼 때 “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라는 기도보다는 더 적극적인 고백으로 주의 기도를 끝내려는 데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환호송의 증거는 상당히 오래되고 확실한 것으로 몇 군데의 성서적인 사본에서 발견된다.
현재 우리가 미사 때에 사용하는 주님의 기도는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르면서 이 기도를 모든 회중이 노래로 하거나 낭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주님의 기도에 뒤따르는 부속 기도는 상당히 축소되었지만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라는 구절을 추가함으로써 더욱 풍요로워졌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거행하는 로마 전례의 미사통상문에 소개된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라는 환호송으로 가기 전의 교량 역할을 한다.
주님의 기도로 죄의 용서를 청함으로써 거룩한 것을 실제로 거룩한 사람들에게 제공되게 하는 것이다. 사제는 먼저 기도하자고 권고하고, 모든 신자들은 사제와 함께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계속해서 사제는 부속기도 (Embolism)를 바치고 교우들은 영광송으로 끝맺는다. 부속기도는 주님의 기도 마지막 청원을 발전시켜 온 공동체를 악의 권세에서 구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권고, 주의 기도, 부속기도, 영광송 등은 모두 노래로 하든지 큰 소리로 외운다(로마 미사경본의 총지침 56a).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전례 음악적으로 볼 때 꼭 노래로 불러야 하는 부분인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냥 큰 소리로 모든 신자들이 같이 외웠으면 좋겠다. 축축 늘어진 노래로 그렇게 오랫동안 장엄하게 노래할 만큼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영성체 예식의 시작부분으로서 신자들로 하여금 죄의 용서를 청하고 성체를 영할 준비를 시키는 것이 이 기도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만일 주님의 기도를 노래로 하기를 원한다면 첫 번째로는 사제와 신자들이 다 같이 부를 수 있는 쉬운 곡이어야 한다는 것과 아울러 여러 글에서 본인이 주장한 대로 전례기도문을 노래로 할 때 그 속도는 말하는 속도와 같아야 바람직하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본다면 그레고리오 성가를 노래하는 빠르기가 가장 적당할 것 같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가톨릭 성가집에 있는 네 곡의 주님의 기도(318, 323, 387, 388)를 생각해 보자. 말하는 속도로 노래하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기본 음표를 현대악보로 음악가들이 고쳐 적을 때에 8분 음표을 이용한다. 이럴 경우 이문근 신부 작곡(318, 323)의 주님의 기도가 가장 전례음악답다고 느껴진다. 다른 두 곡, 특히 최병철의 곡(388)은 수준있는 합창단이 연주곡으로 사용하면 좋을 듯하고, 이종철 신부의 곡 (387)은 2/4의 기분으로 노래 부른다면 모든 신자들이 쉽게 노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사 때에 사용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러나 끝 부분에 있는 가사의 변형 “악에서 저희 구하소서”는 좀 더 연구해 보아야 할 부분이지만, 미국 주교회의 전례위원회의 문헌인 “Music in Catholic Worship” 67항의 가르침은 “전통적인 기도문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성가 담당자들에게 권해본다. 처음에는 어색하겠지만 “악에서”의 한 소절을 “악”으로 이어가고 “저희”라는 말 위에 “에서”를 넣으면 선율상으로나 전례문의 원형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무리가 전혀 없는 것 같다. 딴 분들의 생각은 어떠한지? 단 목에 힘을 주고 질질끌게 노래부르게 되면 “악”이라는 말이 “아아악”이 되는 점에 주의하여 무리없이 그리고 전체를 조금 빨리 부르면 될 것 같다.
위의 ‘주님의 기도’ 빠르기와 관련해서 성가의 빠르기에 대해 한 마디만 언급하고 싶다. 어떤 사람은 악보에는 4/4로 되어 있는데 왜 빠르게 혹은 2/4를 노래하는 기분으로 노래하라고 하는지 의아해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4/4에는 빠르기 120정도의 행진곡도 있다. 따라서 가사와 전례 행위의 중요성 그리고 전례의 흐름을 생각할 때 빨리 부른다고 해서 음악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Waltz의 경우는 3박자의 노래이지만(한 소절 전체를) 1박으로 연주하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을 잘 알고 계시리라 믿는다. 그리고 아마츄어 음악인들이 가장 잘 틀리는 박자로는 복합박자(Compound Meter)가 있다. 6/4, 6/8, 9/4, 9/8. 12/4. 12/8 등이 그것들이다. 예를 들어, 244 성모의 성월, 245 맑은 하늘 오월은, 59 주께선 나의 피난처 같은 노래는 느린 6박으로 노래해서는 안 된다. 한 소절을 두 박으로 나누어 노래해야만 한다.
부속기도가 끝난 후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라는 찬미의 이 말은 특별히 주님의 기도를 노래했을 경우 모든 신자들에 의해 적절하게 노래로 불리어져야 한다. 이 때 성가대는 이 환호성을 화음으로 강화시킬 수 있다(Music in Catholic Worship, 59항).
이제 마지막으로 주의 기도로 초대하는 사제의 권고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사제가 보는 미사 경본의 서문에는 축제의 성격과 공동체의 환경에 적응시켜 만든 초대의 말이나 설명 혹은 권고는 백성들로 하여금 거룩한 행위를 더욱 심오하게 이해하도록 해 주는 동시에 전례 참여의 올바른 정신으로 백성을 인도해 준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로마 미사경본의 총 지침은 사제들에게 미사 때의 이러한 권고를 자신이 준비하고 사용하도록 그 권한을 위임해 주고 있다. 어떤 전례 행위에는 이미 미사통상문이 마련해 준 것들도 있지만 사제들은 미사 예식의 부분, 예를 들면 주님의 기도 직전, 에 권고할 수 있다. 이 짧은 권고들은 그 본성상 미사경본에 나오는 형식을 모든 사제가 똑 같이 사용할 의무는 없다. 공동체 환경의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하여 여러 가지 권고를 만들어 준비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권고의 성격을 가져야 하며 이를 강론이나 설교에 삽입하지 말아야 한다. 또 이런 권고는 장황해서는 안 되고 짧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은 지루하게 느끼게 된다.
이제 미사 때에 하는 사제들의 주님의 기도 권고는 좀 달라져야 한다. 따라서 어느 미사에서건 상관없이 미사 경본에 있는 대로 천편일률적으로 “… 삼가 아뢰오니” 혹은 “… 정성 들여 바칩시다” 하는 권고에서 탈피하여 그날 축일의 성격, 공동체의 성격에 맞는 권고로써 신자들의 마음에 찡하니 닿을 수 있는 권고를 해 보자. 또 사제가 신자들과 함께 주님의 기도를 노래로 하고자 할 적에는 “… 정성 들여 노래합시다” 등으로 바꾸어야 신자들이 기도문을 낭독하는 실수를 줄일 수도 있고, 노래하는 권고로 알 맞는 것 같다.
19.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하는 법
평화의 인사 뒤에 하는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는 일종의 연도(도문, litany)로서, 사제가 영성체를 위해 성체를 쪼개고(fraxio panis) 성혈에 작은 성체 조각을 넣을 때 하는 기도이다. 쉽게 말하자면, 사제들의 영성체를 위해 성체를 나누는 동안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기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기도는 전적으로 신자들의 몫이다.
이 기도는 교황 세르지오 1세(687-701)에 의해 로마 미사에 들어오게 되었고, 신자들에 의해 노래로 불리어졌지만 장엄하고 화려하게 전례를 꾸미려는 교회와 작곡가들의 노력으로 전례에 사용되는 음악들이 더 이상 신자들이 따라 부르기에는 너무 어렵게 되자 이 기도 역시 성가대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그 당시에만 해도 큰 도시에 성당이 그리 많지 않았었고 주일마다 도시의 모든 신자들이 주교와 함께 한 성당에 모여 다 같이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때 많은 사제들도 같이 미사를 봉헌하였기에 fraxio panis의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다. 그래서 이 기도를 노래하는 방법은 지금과 같이 세 번만 노래부른 것이 아니고, 성체 나누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몇 번이고 계속해서 노래불렀던 것이다(교구 신앙대회나 서품식 때, 많은 신부님들이 성체를 나누어 가지는 시간을 상상해 보면 조금 이해가 쉬울까요?). 처음엔 이 기도의 응송이 지금 우리가 미사에서 하듯이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이 마지막 응답이 “저희에게 평화를 주소서”로 바뀌게 되었다.
이 마지막 응송은 10세기부터 삽입된 것으로 9세기 때부터 빵의 나눔 뒤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한 평화의 인사와 연결되다 보니 “저희에게 평화를 주소서”라고 바뀌었다고 전례 음악가들은 생각한다.
이 기도는 성가대만 노래해도 좋고, 선창자(성가대)와 신자들 간에 교대로 계응을 노래로 부를 수도 있다. 또 노래로 하지 않을 경우에는 큰 소리로 낭독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 노래 혹은 기도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사제들이 성체를 나누는 동안에 신자들이 부르는 노래이기에 기도의 시작을 사제가 하지 않아야 한다. 이 기도 내지는 노래의 기능이 빵을 나누는 사제의 동작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신자들(성가대)에 의해 시작되고 노래 불리어지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또 한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현재 각 본당에서 봉헌되고 있는 미사는 거의 대부분이 주례 사제 한 분에 의해서 진행되어지고 있기 때문에 성체를 나누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이다. 이 성가의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 성체 나누는 시간이 오래 걸리면 수십 번이고 계속해서 불렀고(그래서 연도 내지 도문이라는 표현을 쓴다), 시간이 덜 걸릴 때에는 몇 번으로 끝났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꼭 악보에 있는 대로 세 번을 다 노래로 해야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지금은 사제 혼자서 성체를 나눈다. 그래서 전례 음악자들은 두 번 노래하고 끝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이 때 물론 마지막 응송은 꼭 해야한다. 악보대로 생각한다면 중간의 “하느님의 어린 양”은 생략하자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악보대로 세 번을 노래했을 때에는 사제는 벌써 성체를 다 나누고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전례 중의 이런 시간은 굉장히 길게 느껴지고 또 동작을 수반하는 노래이기에 동작이 완료된 상태에서 더 이상 노래는 필요하지 않다. 만약 사제 여럿이서 합동미사를 드리는 경우, 성체 나누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첫번째 내지 두번째 “하느님의 어린 양"을 몇 번이고 계속할 수 있겠다. 아니 계속해야만 한다. 빵을 나누는 동작이 끝나지 않았는데 성가가 이미 끝나서는 안 된다. 다만 이 때 끝나는 마지막 응송은 ”평화를 주소서“로 끝내야 한다. 그리고 이 기도 하는 방법을 위에서 말했지만 꼭 노래로 하지 않아도 된다.
참고 문헌 : “로마 미사경본의 총지침” 56항
20. 영성체 때에 성가 부르는 법
이미 아우구스틴(354-430) 성인의 시대 때부터 영성체 행렬 때에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교회의 관습이었다. 가장 사랑을 받던 시편은 34편으로 특별히 9번째의 구절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때문에 영성체 성가의 가사로 많이 애용되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어린 양’ 노래의 길이가 길어짐에 따라 그리고 아마도 영성체자 수의 감소로 말미암아 시편의 구절들은 삭제되기에 이르렀고 후렴만이 영성체 후에 노래불리어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새로운 미사통상문은 이 성가를 영성체를 배령할 때에 부르는 노래로 다시 복구하였다. 사제와 신자들의 영성체는 하나의 예식임으로 영성체 성가는 사제가 성체를 영할 때부터 시작하여 적당한 때까지 계속된다. 비록 다른 적합한 성가들이 일치를 표현하고 주님과의 만남, 그리고 기쁨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교회는 시편 본문을 가사로 사용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만약 영성체 때에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미사 경본에 나오는 후렴(영성체송)을 신자들이나 독서자 혹은 사제 본인이 신자들에게 성체를 분배하기 전에 낭독한다.
사제와 신자들이 영성체 하는 동안 영성체송을 노래한다. 이로써 영성체자들의 영신적 일치와 마음의 기쁨을 소리 맞춰 표현하며, 영성체 행렬을 더욱 형제답게 만든다(로마 미사경본의 총지침 56i). 영성체 동안의 성가로는 로마 성가집의 응송이나 시편을 사용할 수도 있고 주교단에서 인준한 다른 성가를 사용할 수도 있다.
만약 영성체 동안의 성가의 가사를 시편에서 취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1969년 11월 미국 전체 주교회에서 정한 아래의 기준을 참조하면 좋겠다. 즉 영성체 노래는 일치의 느낌을 강화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이 노래는 단순하여야 하며 신자들이 이 성가를 노래부르기 위해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이 노래는 그리스도 지체 안에서의 일치의 기쁨에 대한 표현을 나타내고, 미사에서 거행되고 있는 신비의 완성을 표현한다. 대다수의 성체 강복 때의 찬미가들은 통교보다는 성체에 대한 흠숭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영성체 노래로 사용할 수 없다(공의회 문헌 Instruction on music in liturgy 36항에서 지시하는 바임, 미국 주교회의가 각 교구에서 로마 미사경본 총지침에 관한 부록 56i 항에서 지시).
일반적으로 교회 전례력의 가장 중요한 시기인 부활시기, 사순절, 성탄시기 그리고 대림시기 동안의 영성체 때에는 그 전례 시기에 적절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사실상 바람직하다. 이 시기를 제외한 전례시기에는 전형적인 성가를 영성체 행렬 때에 사용할 수 있고 준비된 이러한 가사들은 매 주일의 파스카적인 특성과 상반되지 않는다(전례헌장 102항, 106항).
위의 기술한 사항들이 하나도 적용되지 않거나 영성체 노래가 없다면 미사경본에 있는 후렴을 외운다.
주님의 명령에 따른다면 영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 신자들은 미사에 완전하게 참여하는 것이 된다. “너희는 이 빵과 포도주를 받아 먹고 마셔라. …”(마태 26,26-27). 만약 누가 미사에 참여만 하고 영성체를 하지 않는다면 그는 미사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것이 못된다. 그러나 옛날에는 이렇게 참석만 하는 것이 상당히 일반적인 것이었다. 신자들은 가끔 미사 전에 영성체 하였다. 그리곤 미사 동안에 그들은 마음 속으로 상징적인 영성체를 하였으며 사제는 그들 대신으로 영성체 하였다. 이런 대리 영성체는 ‘독송미사’(low Mass)에서는 상당히 흔한 것이었다. 즉 반드시 노래로 하여야 할 독서를 사제가 성가대 대신 읽고, 독서자를 대신하여 주례석에서 사제가 독서를 하였으며, 신자들을 대신하여 사제가 영성체를 하였다.
이런 상태가 영성체 노래에 상당히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즉 신자들의 영성체가 없었기에 영성체 노래는 사제의 영성체 후의 노래가 되고 말았다. 모든 신자들이 앉아 있는 동안, 사제는 성직자의 사각모자를 쓰고 그레고리오 성가 후렴을 불렀다. 영성체 성가의 의미를 다 상실하고 말았다. 이런 역사적인 변천을 생각하면서 영성체를 함으로써 미사에 적극적이고도 완전한 참여를 하여야겠고, 다시 찾은 영성체 노래를 다 같이 부르도록 노력하여야겠다.
무엇보다도 본당의 성가대 지휘자 혹은 음악지도자는 우선 영성체 노래를 선택하는 데 가장 신경을 써야 한다. 위에서 말한대로 영성체 노래는 영성체자들의 하느님과 그리고 영성체자들과의 “영신적 일치와 마음의 기쁨을 소리맞춰 표현하며, 영성체 행렬을 더욱 형제답게 만든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노래를 선택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가진 ‘가톨릭 성가’에는 주님과의 일치와 통교, 하느님을 영접하는 기쁨을 나타내는 영성체 노래 이외에 성체 강복 때에나 사용할 수 있는 성체 흠숭, 찬송의 노래가 너무나 많다. 영성체 때에 노래할 수 있도록 성가집에 분류되어 있는 모든 라틴어로 된 성가들(성가 번호 183-198까지. 여기에는 O Salutaris Hostia의 가사를 가진 성가와 Tantum Ergo의 가사를 가진 성가 그리고 Panis Angeliscus의 가사를 가진 성가들이 모두 포함된다)은 미사의 영성체 행렬 때에는 절대(!!!!!) 사용할 수 없다. 이런 성가들 모두는 성체 강복 때에 사용하는 노래들이기에 성가집에서는 삭제되는 것이 바람직하고 대신 성가대를 위한 합창곡집에 삽입하기를 바란다. 한국 교회는 다시 한번 교회의 가르침을 상기하기 바란다.
그 다음 한국어로 된 영성체 성가 중에서도 이런 성체 흠숭과 찬미의 노래들은 노래하지 말아야 한다(152 오 지극한 신비여; 161 성체를 찬송하세; 162 성체 성혈 그 신비; 163 생명의 성체여(?); 164 떡과 술의 형상에(?); 167 생명이신 천상 양식; 168 오묘하온 성체(?); 169 사랑의 성사(?); 176 믿음 소망 사랑(?); 178 성체 앞에; 180 주님의 작은 그릇; 181 신비로운 몸과 피(?)). 한국어로 된 성가들은 시인들과 함께 각 성가들의 주제들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느끼지만 적어도 라틴말로 된 영성체 성가 모두와 한국어로 된 성체 흠숭, 찬미의 노래를 영성체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사용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 모두가 성체 강복 때에 부르는 노래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노래들만큼은 절대로(!!!!!!!!) 영성체 행렬 중에 신자들이 노래부르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목자들, 교회음악가들은 명심해 주기 바란다.
영성체 노래와 관련해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시편들을 그 가사로 사용하기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교회음악가 작곡가들은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애용되어온 시편들을 가사로 하여 작곡하도록 권고한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한국어로 된 성가들 중 성체 흠숭과 찬미의 노래를 미사 중에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영성체 노래 역시 상당히 부족한 것을 느낀다. 시편 34(33)는 이미 4세기에 온 세계 교회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특별히 구절 6과 9는 영성체 예식에 아름답게 사용되었다. 시편 145(144) 역시 영성체 때 사용되었음을 요한 크리소스토무스(354 - 407)가 증명하고 있다. 이 두 개의 시편은 일년 내내 사용되었다고 한다.
위의 두 시편 이 외에도 교회 전통과 전례는 아래 시편들을 사용하여 성체 성사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시편 23(22) 특별히 구절 5; 시편 42(41) 특별히 구절 2; 시편 43(42) 특별히 구절 4; 시편 84(83) 특별히 구절 2-3; 시편 104(103) 구절 14-15 그리고 27-28; 시편 116(115) 구절 12-13; 시편 128(127) 구절 3; 시편 136(135) 구절 25; 시편 147 (147B) 구절 12와 14. 위의 시편들을 잘 연구하여 많은 영성체 노래가 작곡되기를 바란다. 이렇게 가사의 중요성을 생각하노라면 청소년성가집과 청년성가집의 많은 성가들의 가사들이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말씀 드린대로 이 성가는 신자들이 영성체를 위한 행렬을 하면서 불러야 하기 때문에 선율이나 가사 모두를 기억하기 쉽고 노래부를 수 있도록 후렴을 가진 노래가 가장 바람직하다. 예를 들면 35번의 ‘나는 포도나무요’(비록 연중성가로 분류되어 있고, 후렴이라고 악보에 적혀있지 않지만, 이 노래는 아주 좋은 영성체 노래이며 앞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라”하는 부분을 후렴으로 이용할 수 있다) 같은 노래이다. 이런 종류의 성가를 이용하면 신자들은 영성체하러 가는 행렬 중에서도 신자들은 성가책 없이도 그 후렴을 노래할 수 있다.
영성체하는 동안 신자들이 한 곡을 연주하고 성가대가 특송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신자들은 노래부르기 위해 성당에 오는 것이 아닌 만큼 좋은 방법이라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실상 이 때에 부를 노래가 거의 전무하다는 것이 한국 교회의 문제이다. 그래서 개신교의 노래들을 성가대들이 많이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개신교에는 성체성사를 인정하지 않는 만큼 가사에 문제가 많다. 우리 교회음악 작곡가들이 분발해야 한다. 미사곡과 찬미가 style 말고는 거의 작곡을 하지 않기에 그런대로 그럴듯한 대곡의 합창곡을 구경하기가 힘들다(본인이 너무 과문해서인가? 물론 몇곡 알고 있지만 작곡가를 밝힐 수 없는 심정을 이해해 주시 바란다). 동요 비슷한 4성부의 찬미가들 말고 합창단을 위한 합창곡을 구경하고 싶다. 오늘도 각 성가대 지휘자들은 이 부분 혹은 영성체 후 묵상시간에 부를 성가를 찾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음을 작곡가들은 아는가?
21. 감사 침묵 기도(영성체 후 성가)를 노래하는 법
이 부분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하니 대신학교 때 생각이 난다. 우리가 신학생일 때 나와 또 한 명의 신학생이 매일 미사 때에도 전체 신학생들의 성가를 지휘하여야 했다. 어느 해인가 부제품을 제외한 직수여식이 학교 교정에서 거행되었으며 많은 수직자들의 부모, 형제, 친지들이 참석을 하였다. 영성체가 끝나고 나는 성가대를 데리고 특송으로 준비한 ‘사랑의 찬가’를 지휘하기 시작하였다. 노래가 중간쯤 진행되었을 때 학장신부님이 공지사항을 하시려고 마이크 앞으로 나오시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공군 군악대 출신(?)답게 음악 소리를 최소한으로 줄여서 조용히 연주를 계속하였다. 성가를 중간에 끊기도 곤란하였고, 그 정도의 작은 소리라면 충분히 공지사항도 전달되리라고 생각되었었는데 …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학장 신부님이 “성가대 노래 그만!!!!”이라고 역정을 내셨다. 그야말로 기분 꽝이었다. 정말 꽝이었다. 그 자리는 공지사항을 할 자리도 아니며 성가가 끝날 때까지 조금 기다리시면 안 되는가? 아직도 이런 일들이 본당에서 심심찮게 일어나는 것을 듣노라면 꽤나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영성체 후의 개인 기도는 상당히 오래 동안 권장되어온 관습이다. 성 알퐁소 리고리는 성체를 영한 후 적어도 30분 동안은 개인적으로 기도할 것을 권장하였다. 비오 12세 교황은 “거룩한 전례에 관한 회칙”에서 “사제와 신자들은 … 영성체가 끝난 후 짧은 시간이나마 거룩한 구세주에게로 마음을 집중하여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하였으며, 교회법은 미사 후의 적당한 감사를 잊지 말도록 경고하였다. 그래서 당시 사용하던 로마 미사 경본은 이 신심을 육성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도들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여러 가지의 이유로 미사가 끝나자마자 교회를 빠져나갔으며 오직 소수의 신자들만이 이 개인적인 기도를 위해 교회에 남아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미사 경본에서는 영성체 분배가 끝나자마자 즉시 침묵의 기도를 위한 시간을 제공하고 있다(로마 미사경본의 총지침 56항). 이것은 로마 전례로서는 처음으로 도입한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에서는 해설자가 영성체 후 묵상이라고 하여 묵상기도를 읽거나 아니면 성가대가 특송을 하게 된다. 영성체 후에 해설자가 묵상을 인도하는 것은 한국 교회만이 실시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미사의 구성으로 보아 침묵 역시 한 부분으로 지정되어 있느니 만큼 꼭 지켜져야 한다(위 총지침, 23항). 본인 생각에는 특송이 없을 경우 개인이 침묵 중에 찬미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이런 침묵은 미사 전체의 리듬을 위해서도 상당히 중요하다. 침묵 기도의 또 다른 선택으로 찬미가, 시편 혹은 찬미의 노래를 회중이 부를 수 있다(위 총지침 56항).
아마 이 부분은 181번 박정희님의 뽀다구있는 질문의 답이 될 것도 같다. 음악을 통해서, 음악의 도움으로 신자들은 마음이 더 쉽게 묵상에로 움직여야 되는데 오히려 성가가 분심이 된다면? 분심이 된다는 것이 혹시 몇 분의 별난 생각인지도 모르겠고 … 아니면? 죄송하지만 분심이 안 될 정도의 음악을 만들면 어떨까 쉽기도 하고 … 신자들은 노래부르기 위해 세례를 받은 사람이 아닌 만큼 전례 때의 성가의 사용은 “가능하면 적은 곡을, 잘 부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조용한 침묵 시간을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잘 준비된 곡으로 찬미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도 좋겠다.
잠깐 요약해 본다면 침묵 시간은 개인의 감사 기도를 바치기에 적합하며, 전체 신자가 노래하는 것은(성가대도 신자들을 대신해서 노래한다) 집단적인 감사의 표현이 될 것이기에 이를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겠다.
이 기도와 관련된 것으로 한국 교회의 아주 그릇된 관습은 사제들이 이 시간에 공지사항을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그렇게 권장하고 있는 침묵이나 찬미의 노래를 바칠 시간은 주지 않고, 영성체가 끝나기가 무섭게 공지사항을 해야만 미사를 일찍 마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미사가 오래 걸리는 것은 사제의 강론이 너무 길고 봉헌시간과 영성체 분배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준비된 강론을 적당한 시간 안에 끝내고 어떤 식으로 하면 봉헌과 영성체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지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공지사항은 영성체 후 기도를 마친 다음 하는 것이 옳다. 주보에 있는 공지사항을 사제가 다시 읽어 전달하고, 그래서 신자들은 주보의 공지사항은 건성으로 읽는 지금의 관행은 개선할 점이 많은 것 같다.
187번 김종우님의 질문은 그 질문을 영성체가 아닌 영성체 후 감사 침묵기도로 바꾸면 더 적당할 것 같다. 영성체 노래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지체인 우리들의 일치를 나타내는 성가(예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라)의 사용이 좋다고 생각할 때 성모 노래는 영성체 때에는 하지 않는 것이 옳다. 대신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영성체 후 침묵 시간에 사용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그 대답을 문헌에서 찾기는 힘들고 본인 기억으로는 전례 시기나 축일에 맞는 곡을 추천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마침 어제 주일(5월 2일) 이곳 본당 미사 때에 영성체 후 특송으로 “Regina coeli Laetare Alleluia”(천상의 모후여 기뻐하소서, 알렐루야)를 부르는 것을 들었는데 추측컨데 요즈음이 부활시기이고 성모 성월이라서 이 곡을 택하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곳 본당신부님은 신자들의 적극적인 전례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라틴말로 된 미사곡은 큰 축일에도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하시지만 봉헌 때와 영성체 후 만은 라틴말 모텟을 허용하고 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이 두 곳에서 설령 신자들이 전체 가사는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면서 찬미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무리가 없다고 대답하셨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 한가지. 교회에서는 이곳에서 사용하는 노래의 가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지침을 주지 않았기에 창의력을 발휘할 여유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미국 주교회의 문헌, Music in Catholic Worship 72항). 답변이 시원찮지만 제가 더 합당한 이유를 찾을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 주시길 ….
22. ‘퇴장 노래’ 부르는 법
중세기 때의 미사 경본에는 사제가 퇴장할 때에 부르는 여러 가지 전례문들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다니엘서 3:5-7 그리고 시편 150 등을 신자들이 외우도록 하였다. 이런 전례문들은 결코 미사 예식의 필수적인 부분은 될 수 없었고 퇴장노래는 한번도 미사예식의 공식적인 부분으로 여겨진 적이 없었다(Music in Catholic Worship, 73항). 다만 신자들의 개인 신심마냥 미사 후에 감사의 기도로 미사 경본에 삽입되었을 뿐이다. 로마 교회 역시 동방교회와 마찬가지로 결코 성가로써 미사를 끝마치지 않았다. 그러나 예식의 전례적이고 음악적인 일치를 위해 가끔 성가대가 관습적으로 노래불렀으며 또 신자들도 사제가 제단을 출발하면 가끔 노래를 불렀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미사 통상문 역시 옛날의 전통을 따르면서 사제의 퇴장을 위해 음악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많은 본당에서는 신자들이나 혹은 성가대에 의해 퇴장노래가 불려지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성음악 훈령’(1967. 3, 5., 36항)은 “비록 성찬전례의 노래가 되기에는 넉넉지 못하더라도 경축하고 있는 축일의 신비를 반드시 반영하는 노래”를 퇴장노래로 사용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달리 말하면 특별히 이 노래는 신자들이 성당에서 바깥 세상으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르는 노래가 될 것임으로 미사 끝에 아무 노래나 부르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때의 노래는 공동체의 찬미와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거나 그날의 축일이나 전례적 계절의 성격을 나타내는 노래를 선택하도록 하자.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즐거운 마지막 분위기를 제공해 줄 수 있으며 특별히 속죄의 성격을 띄는 사순절이나 대림절에는 침묵 역시 바람직하다.
장엄한 전례에는 노래부르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간주되며 퇴장노래를 부르는 것은 전례거행의 축제적인 성격을 연장시키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러한 마지막 노래는 일반적으로 모든 신자들이 잘 알고 있으며 짧은 단순한 후렴이나 환호송의 형태 혹은 유절 가요 형식(지금 우리 성가집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찬미가의 형식)을 가진 짧은 것이어 바람직하겠다. 또 이 노래는 찬미의 성격이나 영성체 후의 감사를 나타내는 성가여서는 안 된다. 가끔 미사에 어떤 전례적이고 음악적인 일치감을 주기 위해 입당송을 다시 한번 반복하는 것도 좋을 수 있다. 이 경우 무엇보다도 이 노래는 그 날의 축제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 신비를 잘 표현하는 것이어야 하겠다(예를 들면, 한국 순교자 축일에 283 순교자 찬가를 입당과 퇴장 때에 부른다).
많은 사람들은 마지막 퇴장 노래가 끝난 후에도 공동체가 성당에 계속 남아서 다른 기도를 바치는 것은 전례적으로 모순된 것이라고 말한다. 동감이다. 이런 저런 기도를 함으로써 중요한 미사의 의미가 상실되고 미사에 대한 존경심을 잃기 쉽다. 어떤 본당에서 아침 주일미사가 끝난 후 ‘삼종기도’와 ‘아침기도’를 바치는 것을 보고 이유를 물었더니 신자들이 너무 아침 기도를 안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일주일 분을 한꺼번에 바쳐야 옳을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 아침기도의 중요성을 신자들에게 가르쳐야지 미사가 끝난 후 다시 자리에 앉아 아침기도를 바치는 등은 지양하여야겠다.
23. 퇴장후의 가요 부르기
아직 복음성가 내지 생활성가의 분석이 끝나지 않아, 우선 퇴장 후에 여러 본당(193번의 탁선생님의 경우만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에서 대중 가요 내지 민중 가요 등을 부르는 문제에 대해 제 생각을 간략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퇴장 후에는 전통적으로 오르간 음악이 사용되었으며(이를 postlude라 함), 지금도 Pipe organ이 있는 서구 교회에서는 미사가 끝난 후 혹은 퇴장 행렬 시에 오르간 음악을 연주합니다. Folk song style의 음악 더 나아가서는 생활성가(생활성가는 복음성가라는 개신교의 표현을 가톨릭적으로 바꾼 것임)의 등장은 1960년대 후반, 비틀즈의 영향이라고 미국 가톨릭 교회음악사는 시대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 어떻게 되어 퇴장 성가 후에 가요를 노래하는 이런 관습이 생겼는지??? 이런 관습은 아주 최근에 생긴 것으로 생각되며, 복음성가 내지는 생활성가의 등장이 이런 그릇된 연주가 생기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전례와 전례 음악에 관한 개념들이 복음성가 내지 생활성가들의 범람으로 퇴색되었고, 무엇이 전례이며 어떤 것이 전례음악인지 구별하기 곤란할 정도로 많은 신자들을 혼돈으로 몰고 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속음악에서만 사용하는 형태의 음악이든 개인의 감정을 노래한 것이든, 음악적인 완성도에 개의치 않고 사용해도 괜찮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 것 같습니다.
- 이들 생활성가 작곡가들의 이론을 들어보면 과연 이분들이 전례나 전례음악의 정의를 알고 계시는지 의아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원래 이들 노래들의 목적대로 신자들의 단체 모임, 기도 모임, 친교 모임 혹은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 사용되는 것에 대해서는 저는 크게 반대하지 않습니다. 비록 음악성이 떨어지고(좋은 곡도 조금 있겠지만 … 대개는 … 그렇다고 가톨릭 성가집의 음악이 모두 훌륭한 것이라고도 하지 않겠습니다), 노래부르기가 어렵고(그분들은 전통 성가보다 쉽다고 하지만 … 선율의 도약 진행 및 리듬의 다양함 등이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도 초견으로 부르기에 아주 어렵습니다. 그나마 신자들이 노래를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이끌어주는 가수가 있고, 음반을 통해 익숙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악보대로 제대로 노래부르는 사람은 극히 드물겁니다), 또 가사의 내용이 신자들의 공동체적인 신앙을 표현하기 보다 한 개인이 느끼는 감정을 자주 표현한다 치더라도 말입니다.
- 문제는 생활성가 작곡가들이 이런 곡들을 전례 안에 사용하기를 주장하게 되고, 실제로 대중가요에 친숙한 젊은이들이 참여하는 미사에서는 이런 음악들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전례는 인간들의 친교 모임이 아니며, 전례음악 역시 인간의 친교, 감정을 나누기 위한 음악이 아닙니다. 비록 소수의 복음성가들이 전례를 목적으로 작곡되어 하느님을 찬양하는데 사용된다고 하더라도, 많은 노래들이 1) 가사 2) 음악의 형식 및 형태 3) 창법의 문제 때문에 전례 때에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저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이런 음악이 유행하게 되는 데에는 상업적인 이유도 다분히 작용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청소년 성가집’에도 성가곡과 일반곡(젊은이의 노래)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성가곡에 있는 곡들 중 너무나 많은 곡들이 일반곡으로 분류되어야 할 만큼 그 한계가 막연하고 불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분류와는 전혀 상관없이 많은 곡들이 청소년들의 미사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민중가요는 “여러 모임에서 즐겨 부르는 노래”를 모은 젊은이의 노래에 분류되어 있기에 미사에서는 사용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용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목자, 교리 교사, 청소년, 청년들 많은 사람이 무엇이 전례이며, 이 전례를 위한 음악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잊은 것 같습니다.
- 하느님이란 단어와 사랑이란 단어만 들어간다고 해서 모두가 성가는 아닙니다. 문제는 성가라는 단어에 교회 전체가 두리뭉실 넘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한국 교회는 성당 근처에서 사용하는 노래까지도 모두 성가라 하는 것 같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전례문을 음악으로 만든 것 이외에는 성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따라서 입당, 봉헌, 영성체, 퇴장 때의 노래는 Hymn(찬미가 혹은 찬송가)이라 해야 올바른 겁니다. 이 찬미가들 역시 노래의 대상은 하느님이어야 하며, 그 내용은 찬미가 되어야 하며, 각 노래는 그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이제껏 쓴 제 기사들을 참조하십시오).
- 인정이 넘치는 전례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편법들이 사용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제사를 인간들의 모임, 친교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찬미가 우선적인 것이 되기 보다, 찬미하는 우리 자신들이 흥을 낼 수 있고 신이 나는 음악을 사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대중가요도 등장하고 민중 가요도 등장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미사 시작 전에 사제가 하는 “Good morning? 안녕하십니까?” 미사 끝에 하는 “Have a nice day? 안녕히 가십시오” 등의 인간적이고 정에 넘치는 인사말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 혹은 잔치를 인간적인 만남, 모임, 여흥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혹은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인사보다 더 아름다운 인사가 있을까요? 그러나 이제 신자들은 이런 사제의 전례적이고도 신앙적인 인사말 보다, 인간적인 인사말이 더욱 훌륭한 것으로 느끼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전례 안의 인사말은 그냥 해보는 형식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겠고요.
- 저는 퇴장 후의 가요부르는 것을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합니다. 우리의 전례는 인간의 친교의 장이 아니며, 전례음악 즉 성가는 우리의 흥을 돋우고 나의 개인적인 신앙을 고백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만나 그분을 찬미하며 우리 공동체의 믿음을 고백하는 장소이며 기도입니다.
- 제발 부탁컨대 저의 글을 보시는 성가대원들 만이라도 미사가 끝난 후 대중가요나 민중가요 부르기에 앞장서지 말아 주십시오. 답이 너무 늦은 것 같아 우선 간단하게 글 올립니다. 좀 더 정리를 해서 다시 한번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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