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가곡

[스크랩] catari/tenor:Framco Corelli

P a o l o 2007. 8. 7. 12:15
프랑코 코렐리 1921 - 2003
Cardillo
Core 'ngrato (Catari)
Franco Corelli, tenor
1. 훌륭한 목소리와 빼어난 용모를 지녔던 테너
잘 생긴 외모와 큰 키, 게다가 우렁차고 힘있는 음성을 지녔던 테너 프랑코 코렐리는 1921년 이탈리아의 안코나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본명은 다리오 코렐리이다. 그의 아버지는 항구 도시 안코나에서 이탈리아 해군의 엔지니어로 근무했고 코렐리는 처음에 아버지의 뒤를 이으려고 엔지니어링을 공부했다. 노래는 그냥 즐겼을 뿐 직업적으로 부를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가 23세 때 한 친구의 권유로 페사로 음악학교에 들어갔는데 고음이 나오지 않아 석달 만에 쫓겨나고 말았다. 실망한 코렐리는 성악을 포기하려 했으나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카루소, 질리, 라울리-볼피 등의 레코딩을 들으며 혼자 연습을 한 끝에 훌륭한 고음을 내게 되었다.
 
코렐리는 1951년에 우연히 그의 친구와 함께 플로렌스에 갔다가 마지오 뮤지칼레 성악 콩쿠르에 나갔는데 놀랍게도 일등상을 수상하여 주목받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의 노래를 들었던 로마 오페라 극장의 연출가 산 파올리는 스폴레토 극장의 성악경연에 나가 보라고 권했고 코렐리는 역시 우승을 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스폴레토에서 <카르멘>의 돈 호세 역으로 성공적인 오페라 데뷔를 했다. 이 성공으로 이탈리아의 여러 극장으로부터 계약을 맺자는 요청이 들어왔고, 1954년에는 스폰티니의 <라 베스틸레>에서 칼라스의 상대역으로 라 스칼라좌에 입성했다.  1955년에는 아파서 공연을 할 수 없게 된 마리오 델 모나코의 대역으로 나폴리 극장에서 <아이다>로 시즌을 열었고, 다음 해에는 <안드레아 쉐니에>로 나폴리 극장의 시즌을 열었으며 1957년에는 헨델의 <줄리어서 시저>로 로마 오페라 극장의 시즌을 열었고 같은 해에 <노르마>로 코벤트 가든에 데뷔했는데 그때의 상대역은 칼라스였다. 1958년에는 칼라스와 함께 <노르마>로 로마 오페라 극장의 시즌을 열었으며 후에 이 오페라를 칼라스와 함께  EMI에서 녹음했다. 그러다가 1961년에 <일 트로바토레>로 레온타인 프라이스와 함께 메트로폴리탄에 데뷔했다. 미국인들은 그가 출연한 <토스카>영화를 통해 이미 그를 알았기에 그의 데뷔를 기다렸던 차였다. 프라이스와 함께 다음 해에 역시 <일 트로바토레>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도 데뷔했다.
라 스칼라에서 주목할 만한 성공은 서덜랜드와 함께 공연한 마이어베어의 였다. 그리고 칼라스와 함께 공연한 도니제티의 <폴리우토>역시 격찬을 받았다. 코렐리는 자신이 칼라스의 영향으로 벨리니나 도니제티의 정통 벨칸토 레퍼토리에 몰두하게 되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곧 그는 <투란도트>의 칼라프 역을 레퍼토리에 포함시켜 메트로폴리탄에서 바르기트 닐손과 함께 공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코벤트 가든에서도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게 되어 파리, 뮌헨, 베를린, 빈, 호주, 뉴질랜드, 러시아, 남아메리카 등 모든 곳에서 노래를 불렀고 많은 팬을 확보했다.


그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을 흥분시키고 몰입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영웅적이고 우렁차며 풍부한 성량으로 힘있게 고음을 처리했다. 성량이 큰 델 모나코와 그가 다른 점은, 델 모나코는 강성 일변도라면 코렐리는 부드럽고 따사로운 소리도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격정적인 면의 표현에서는 델 모나코를 넘어서는 면도 있었다. 이런 음색 때문에 델 모나코와는 달리 나폴리 민요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스테파노보다 한 수 아래이지만 우렁차고 격정적인 음색에 정열을 담뿍 담아 부르는 나폴리 민요는 스테파노와는 또다른 매력이 있다.
그의 인기에는 훤칠한 외모가 또한 한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작은 키에 배가 볼록한 전형적인 이태리 테너의 유형과는 거리가 멀었던 큰 키와 영화배우 뺨치는 잘 생긴 외모는 무대 위에서 진가를 발휘했으며 특히 타이즈가 잘 어울렸다고 한다.
훌륭한 외모와 타고난 목소리도 좋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하는 테너였다. 언젠가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자면서도 노래를 부릅니다. 꿈 속에서도 음표를 보죠. 나는 항상 자신을 좀 더 향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휴식이란 없습니다. 만일 내가 완전히 자유로운 석 달 간의 휴가를 가진다면, 나는 그 기간에 내 목소리의 테크닉을 향상시키는데 쓸거예요. 이런 면이 없다면 전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이겠죠."
타고난 목소리, 훌륭한 외모,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가 있었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테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My Review
코렐리는 내가 베르곤지 다음으로 좋아하는 성악가이다. 처음 들었던 그의 노래는 '10대 테너가수의 10대 아리아'에 실려 있는 <토스카> 중 '별은 빛나건만'이었다. 그 당시는 오페라를 듣던 초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뛰어난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호소하는 듯한 격정과 너무도 시원하고 힘있게 올라가는 고음은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그 때는 코렐리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는데, 우연히 도밍고 테잎에 '코렐리의 대역으로 데뷔했다'는 대목을 읽고 그 코렐리가 이 코렐리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나는 지금도 그가 부르는 '별은 빛나건만'을 들으면 가슴이 설렌다. 아마 이 노래는 감미로운 메짜 보체로 좋은 대조를 이루는 베냐미노 질리의 노래와 코렐리의 노래가 가장 훌륭하지 않을까 싶다. 코렐리의 독집도 될 수 있는데로 다 수집했는데 이 페이지에 실려있는 7종이 그것들이며 오페라 전곡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팔리아치>, <토스카>, <로미오와 줄리엣>, <일 트로바토레>, <투란도트>을 가지고 있다. <노르마>와 <안드레아 쉐니에> 등도 살 예정이다.
동료 성악가들에 의하면 그는 신경이 매우 날카롭고 괴팍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닐손에 의하면 그는 덩치 큰 어린아이 같아 팬들이 관심을 조금이라도 다른 성악가에게 돌리면 토라지고 격분하곤 했으며 자주 화를 냈다고 한다. 또한 뛰어난 외모에 반해 연기력은 엉성했다는 평이 있다. 그가 연기에 미숙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너무도 긴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훌륭한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공연을 위해 무대에 오르기 직전 거의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지나치게 긴장하고 예민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 상태에서 무대에 오르니 보는 관객들조차도 불편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공연이 시작되고 얼마 후 자기의 소리가 괜찮게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긴장을 풀고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그리고 도밍고의 자서전에 보면, 그가 도밍고를 방해하기 위해 약간의 음모를 꾸민 듯한 인상을 주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도밍고가 메트에 데뷔하기 나흘 전에 코렐리가 갑자기 출연을 취소해서 도밍고로 하여금 준비없이 대역으로 출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전세계 오페라 팬들의 주목을 받던 신예 도밍고의 성공에 심기가 뒤틀려 메트 데뷔를 엉망으로 만들기 위해 고의로 그랬는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명백히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어쨌든 1967년의 그 일을 좀 더 상세히 얘기하자면, 도밍고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세 시간 동안 <투란도트>연습을 하고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코렐리가 결정적인 순간인 저녁 7시 30분에 출연을 취소했고, 루돌프 빙은 도밍고에게 전화를 걸어 무조건 빨리와서 대역으로 데뷔하라고 한 것이다. 그는 막이 오르기 3분 전에 도착해서 15분간 분장하고 의상을 입고 무대로 올라갔다고 한다. 책에 보면 도밍고는 루돌프 빙과의 통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생각에는 코렐리가 고의로 최소한 것 같아요. 지난 72시간 동안 오페라 세 편을 불러서 제가 피곤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하지만 저는 기분이 아주 좋아요. 결국 그가 후회할 걸요!"
도밍고는 이렇게 말했던 부분을 인용해 놓고 마지막 부분에 와서 '진짜 이유는 모르며, 마지막 순간에 어떤 이유에선지 그가 무대에 설 수 없다고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고 적었지만 어쨌든 처음에는 코렐리의 의도를 의심했었음을 알 수 있다.
언젠가 박종호 선생님도 말했듯이 코렐리의 성품이 아무리 신경질적이고 거만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노래를 들으면 정말 모든 게 용서되고도 남을 듯 하다. 한 인간에게서 어떻게 저런 엄청난 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 들으면서도 늘 감탄한다. 얼마 전 코렐리가 부른 성가곡과 나폴리 민요가 담겨 있는 2장짜리 CD를 샀는데, 그가 부른 성가곡은 처음 듣는 터라 참 감동적이었다. 세세하게 예술적 가치를 따지기 이전에 그가 부르는 어떠한 노래도 모두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아리아 중 그의 매력이 돋보이는 곡은 <안드레아 쉐니에> 중 '즉흥곡', '5월의 아름다운 날처럼', <롬 바르디아인> 중 '내 기쁨으로 그녀를 감싸고 싶소', <마농 레스코> 중 '일찌기 보지 못한 미인' <일 트로바토레> 중 '아, 그대는 내 사랑', <투란도트> 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가 있다.
나폴리 민요 중에서는 '돌아오라(torna)'와 '열정' 등이 인상에 남는다.
코렐리는 1970년대에 테발디와 함께 우리 나라에 와서 공연을 한 일이 있었다. 영화 <서편제>로 유명한 김명곤씨는 국악을 공부하기 전인 청소년 시절에 못말리는 성악광이었는데, 코렐리의 공연표를 미쳐 구하지 못해 밖에서 옥상으로 타넘어 들어가 그의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칼라스와 스테파노의 공연이 그랬듯이 그들의 공연도 전성기를 지나서인지 호평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코렐리의 공연을 영상을 통해 본 일이 있었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2장과 몇몇 아리아 및 나폴리 민요였는데, 흐릿한 흑백이었지만 무대에 등장하여 멋있게 '건배의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은 너무도 멋있었다. 그리고 별 힘 안들이고 '안녕, 어머니'를 사무치게 부르는 그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 보았다. 나폴리 민요도 우렁차고 훌륭했다. 또한 <투란도트>의 1막처럼 꾸민 무대에서 칼라프의 복장을 하고 나와 '울지마라, 류'를 너무도 멋있게 부르는 영상물도 보았다. 거침없는 고음과 류에 대한 따스한 목소리가 어우러진 명창이었다. 예전에 'VAI 클래식'이란 레이블에서 나온 코렐리의 비디오 테잎이 수입된다는 광고를 본 적이 있었는데, 광고를 낸 신나라 레코드에 문의해 본 결과 수입되지 않는다고 해서 아쉬워했던 적이 있다. 기회만 되면 그의 영상물을 꼭 사고 싶다.
코렐리는 베르곤지와 더불어 나에게 오페라라는 분야에 흥미를 느끼게 만든 테너였다. 나는 베르곤지와 코렐리의 개성있는 노래를 듣지 못했다면 아마도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에 심취했을 것이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인간의 소리가 어디까지 매력적일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기에 오페라 전곡 녹음을 살 때면 그들이 녹음한 것을 위주로 살 때가 많다. 요즘도 시내의 음반점을 들리면 꼭 코렐리의 레코딩이 새로 들어왔는지 부지런히 확인한다. 내가 최근의 성악가들에게 매력을 못 느끼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코렐리나 베르곤지만큼 멋있는 소리를 가진 사람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코렐리의 노래는 내 취향의 폭을 좁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내게 그는 베르곤지와 더불어 내가 가장 아끼는 위대한 성악가이다. 출처:박태영의 오페라 리뷰


 

출처 : 길송의 집
글쓴이 : 길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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