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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Jacques-Louis David

P a o l o 2007. 6. 20. 14:49

 

 

 

 

Jacques-Louis David

 

Image:David Self Portrait.jpg
Self-Portrait (1794)

 

신고전주의의 창시자
"자끄 루이 다비드 David, Jacques Louis 1748.8.30~1825.12.29" 

자신의 예술을 혁명의 도구로 인식했던 다비드,

문화적 영웅으로 떠받들어 주는 분위기에 도취되어 그는 46세라는 중년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뺨의 종양으로 인해 혀가 굳고 얼굴이 틀어지는 증상을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20대 초반의 멋쟁이 청년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흐트러진 머리칼과 유순해 보이는 갈색 눈동자를 가진 홍안의 청년,

수줍어하는 표정을 가진 이 청년(?) 다비드에게서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저에게는 독선적이고 기회주의적이었던 한 예술가의 덧없는 몽상과 허망한 꿈이 엿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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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isarius Receiving Alms, 1781 (2)

 

 

다비드는 나폴레옹을 위해 자신의 모든 재능을 바쳤습니다.

늘 자신의 작품에 예술성과 더불어 중요한 정치적 의도를 숨겨 놓고 있었지만

  사실,그림이 보여주는 눈부신 아름다움 만큼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고대 조각에서 느껴지는 질서와 우아함, 세련된 형태미가 그의 그림에서 그대로 부활합니다.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이 섬세한 묘사와 색채감이 바로, 다비드를 고전주의 미술의 대표자로 만들었습니다.

 

Image:David - Oath of the Horatii.JPG

The Oath of the Horatii (1784)

 

 

 

 

Image:Jeanbon St. André 1795 portrait by Jacques-Louis David.jpeg

Portrait Jeanbon St. André (1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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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ath of Socrates (1787)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려는 순간, 그의 제자는

“사부님이 부당하게 돌아가셔서 슬프다”며 눈물을 흘립니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생의 마지막 농담을 던집니다.


“그대는 내가 부당하게 죽지 않고 정당하게 죽기를 바라는가?”


다비드는 소크라테스의 자기 희생과 박애 정신을 통해

프랑스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갈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얼굴은 철저한 고증에 의한 재현입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상을 모델로 그려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물들은 엄격한 해부학을 토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Image:Jacques-Louis David- Andromache Mourning Hector.JPG

Andromache grieves the loss of Hector

 

 

 

 

Image:David - Portrait of Monsieur Lavoisier and His Wife.jpg

Portrait of Monsieur Lavoisier and his Wife (1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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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and Helen (1788)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나의 정사는 호메로스의 시편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파리스가 헬레나를 납치함으로써 트로이 전쟁이 촉발됐고,

 두 사람의 이야기는 화가들에게 좋은 소재가 되었습니다.

자끄 루이 다비드의 1788년작 <파리스와 헬레나>

두 사람이 처음 연인으로 맺어지는 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파리스는 벌거벗은 몸이지만 잘 때 쓰는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헬레나는 옷을 입고 있지만 몽롱한 분위기를 풍기며 파리스를 유혹합니다.

 이것은 파리스가 잠자고 있는 사이 헬레나가 그의 침실로 들어온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파리스도 헬레나의 유혹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더 뜨겁게 유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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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licteurs rapportant à Brutus les corps de ses fils, (1789)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789년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정치적 선동도구의 목적으로 제작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혁명 정신으로 무장시키기 위한 계몽의 의도가 농후한 회화로 보여집니다. 


브루투스는 타르퀸 왕의 부패를 뿌리뽑기 위해 로마에 공화정을 세웠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들들이 자신이 세운 공화국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이 그림은 브루투스의 관리들이 처형된 아들들의 시체를 가져오는 가운데

가족들이 슬퍼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자식들을 죽이라고 명한 비정한 아버지는 화면 왼쪽 그늘에 가려져 있습니다.

한 팔을 괸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죄의식에 괴로워하는 감정의 일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위의 <호라티우스의 맹세>와 여러 면에서 유사합니다.

고대 로마 풍의 건축양식, 주제가 펼쳐지는 왼쪽, 비탄에 잠긴 오른쪽의 여인들,

빛과 색채를 통한 인물과 사물의 입체감 있는 재현, 그리고 영웅주의의 찬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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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ath of Marat (1793)

 

 

1792년 9월 21일, 새로 선출된 국민공회의 회의가 개최됨으로서

프랑스 혁명은 급진적인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다비드는 마라, 당통, 로베스 피에르와 더불어 자코뱅당에 가입합니다.

군주제는 폐지되었고 프랑스는 공화국임을 천명하며,

12월엔 '카페 왕조의 시인'으로 불렸던 루이 16세에 대한 공개 재판이 열립니다.

1973년 1월 19일 로베스 피에르는 왕의 처형을 제안하고 이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다비드는 대변인들 중 한 명이었으니 당연히 찬성표를 던졌을 것입니다.

루이 16세의 처형 후, 유럽 권력들 간의 선전포고가 뒤따랐고 전쟁에서의 패배,

기근과 궁핍, 사회적 불안 등이 혁명을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샤를로트라는 여인은 마라를 암살하기 위해 1793년 7월 11일 파리에 옵니다.

그녀는 옛 귀족 출신이었지만, 군주제에 공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화주의자이기도 하였으나 자코뱅당의 급진주의 또한 혐오했습니다.

그녀는 마라를 그 우두머리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7월 13일 아침, 그녀는 범행에 사용할 식칼을 구입하여

그날 저녁 마라를 면회하게 되는 데 욕조에서 이 혁명가를 만나게 됩니다.

마라는 심한 피부병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욕조에서 업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의 몸을 여러번 찌릅니다.

공범자들이 마라를 침대 위로 옮겼고, 잠시 뒤에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샤를로트는 재판에 회부 되어 7월 17일 처형되었습니다.

 

Image:Death of Marat by David (detail).jpg

The Death of Marat (detail) (1793)

 

다비드는 시각 선동에 대해서라면 거의 전문가였습니다.

이런 혼란의 시기에서 이상적인 혁명가나 순교자가

가장 큰 힘의 요체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라의 시신은 전시되었고 팡테옹으로의 영접이 요구되었으며,

 다비드는 이 그림의 주문을 받습니다.

7월 말에 임시적으로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그 속에는 마라의 유품들인 욕조, 탁자, 필기도구들이 갖추어졌 있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성자 숭배와 의도적으로 연관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장 폴 마라를 혁명을 위해 희생한 순교자로 묘사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었습니다.


다비드는 마치 죽기 전날 마라를 만났던 것처럼,

그를 욕조에서 '민중의 행복을 위해 무언가를 쓰고 있는' 모습으로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욕조는 그림 평면과 평행하게 놓여 있습니다.

그의 몸과 머리는 관찰자가 있는 쪽을 향해 옆으로 기울어져 있고

오른팔은 욕조 밖으로 걸쳐진 상태며 두 눈을 감고 있습니다.

프랑스 제1공화국의 지폐와 나무 탁자에 있는 마라의 쪽지는

민중을 위한 그의 배려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재는 마라가 왼손에 쥐고 있는 샤를로트의 편지 속에서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부탁이 있어서 찾아온 것처럼 가장했음을 암시하는 겁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쪽지 속에서 영원히 살고 있는 것입니다.

 

 

Image:1799-Verninac-David.jpg

Portrait of Mme. Verninac, 1799

 

 

 

 

Image:Madame Récamier painted by Jacques-Louis David in 1800.jpg

Madame Récamier (1800)

 

 이 작품은 수직과 수평의 구도가 사물들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독특한 구조입니다.

이 그림은 그의 다른 작품들 <포토키 백작>, <라보아지에의 초상>과 더불어

다비드 회화의 주요한 특징과 화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정작 주문자였던 레카미에 부인은 이 작품에 불만을 느껴

2년 후 제라르에게 다시 초상화를 주문하였다고 합니다.

화가는 화가대로 모델이 차분히 앉아 있질 않아 몹시 기분이 상했으며

 이 작품은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


나폴레옹 집권 당시 그려진 이 작품의 모델,

쥘리에트 레카미에는 자기 생애에 걸쳐 사회의 유명세를 즐겼던 여자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상류 사회의 숱한 남자들이 그녀에게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받는 것 없이 그저 베푸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The coronation of Joséphine, detail

 

1804년 12월, 황제의 공식 화가로 임명된 다비드는

대관식의 의식을 기념하는 대작 네 개를 맡게 됩니다.

이 중 두 작품만이 실제로 그려졌는데,

다른 한 작품은 현재 베르사이유 궁전의 미술관에 있습니다.


대관식 의식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고, 

다비드는 이를 상세하게 묘사했습니다


대관식 의식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고, 

다비드는 이를 상세하게 묘사했습니다. 

다비드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참석자들을 모두 찾아다니며 만나서 

밀랍 인형을 만들고 옷을 입히고 그것을 크로키한 자신의 화첩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로마 교황에게 황제의 관을 받아 스스로 썼다고 합니다,

다비드는 이 장면 대신 이미 황제의 관을 쓴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왕비의 관을 씌어주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나폴레옹과 사이가 좋지 않던 영국 대사는

그림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화면 정면 별실로 만들어진 장소에는

이 행사에 불참한 나폴레옹 어머니와 가족들이 보입니다.

나폴레옹 부탁으로 이 그림에 참석시킨 것이었습니다.

 

 

Image:Jacques-Louis David 019.jpg

Napoleon krönt Kaiserin Joséphine

 

<나폴레옹의 대관식>의 세밀한 장면들은

나폴레옹의 정치적 야망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대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복장뿐만 아니라,

모든 실내 장식도 자신의 구미에 맞게 요구합니다.

프랑스 왕실 의전에 따르면, 대관식은 대성당에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프랑스의 어떤 대성당도 그림과 같은 고대 신전 같은 곳은 없습니다. 

나폴레옹은 대관식을 위해 수도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실내 장식을 바꾸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다비드의 그림 속에서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모든 특징들이 지워져 버렸고,

다만 그림의 우측 상단에 보이는 부조 조각들만이 대관식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려줄 뿐입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세로 621cm, 가로 979cm의 거대한 크기를 자랑합니다.

이 작품의 규모가 이렇게 큰 것은 그림 속의 중요 인물들을 부각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대관식을 주관하는 사제들, 의자에 앉아 있는 교황, 프랑스 제국의 고관 대작들과 황실의 왕자들,

제국 군대의 대원수들이 모두 참석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옆에는 나폴레옹 황실의 여인들이 있고,

제단 뒤에 있는 몇 명의 인물들 중 다비드 자신의 얼굴도 들어있습니다.

교묘하게 연출된 대관식을 통하여, 나폴레옹과 프랑스 제국의 역사적 운명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정치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신성한 일면까지도 화폭에 담으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Le combat de Mars et de Minerve, (1771),


이 그림 속 미네르바는 강한 여인상의 표본인 듯합니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는 자기를 연모하지만,

 폭력과 유혈을 좋아하는 전쟁의 신 마르스에 맞서서 곧잘 싸웠다고 합니다.

 

Image:David napoleon.jpg

Napoleon crosses the Saint-Bernard (1800) (alternate version)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이상화 시킨 영웅의 초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실제 그의 모습은 키도 작고 그다지 볼품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 그림에서 처럼 백마의 갈기를 휘날리며 군대와 함께

그 험한 알프스의 생 베르나르산을 넘지는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말이 아니라 노새를 타고 산을 넘었으며,

부대가 먼저 넘어가고 며칠뒤 따로 안전하게 넘어갔엇습니다.

따라서 이 초상화는 철저한 허구입니다.

다비드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웅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형상화 한 것일 뿐입니다.

이 그림은 예술이 정치적 선전수단으로 얼마나 대단한 기능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첫 사례이기도 합니다.

 

 

Image:Zenaide and Charlotte Bonaparte p1000603.jpg

Zenaide and Charlotte Bonaparte (1821)

 

 

 

 

Image:Jacques-Louis David 004.jpg

Leonidas at Thermopylae (1814)

 

뚜렷한 정치 성향을 지닌 작가,

프랑스 대혁명을 맞이한 격변의 시기를 대표하는 화가,

 자코뱅당 당원으로서 프랑스 혁명 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으며,

나폴레옹의 선전작가이자
신고전주의의 구체적 실현을 이루었던 예술가,

19세기 초 프랑스 화단에 군림하였던 사람,
자끄 루이 다비드. 그는 앵그르와 더불어 신고전주의의 대표작가입니다.

 

 

Image:Serment du jeu de paume.jpg

Tennis Court Oath

 

 

 

 

Image:Sabine women.jpg

The Intervention of the Sabine Women

 

 

이 작품의 배경은 고대 로마의 건국에 대한 전설입니다.

로마를 건국한 왕이 사비니의 여인들을 납치하고,

사비니의 군대가 로마로 쳐들어오지만 이 싸움을 말리는 사람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비니의 여인들입니다.

여인들은 사비니의 군대에 있는 아버지와 오빠를 향해 부부의 연을 맺고 있는

로마의 병사들과 다투지 말 것을 애원합니다.

이 비극적인 주제는 다비드가 프랑스 혁명을 통한

동족 상잔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Image:David Potocki.jpg

Equestrian portrait of Stanisław Kostka Potocki

 

당시의 다비드는 그림 실력으로도 인정을 받았지만,

국민공회 의원으로도 활동을 하면서 시민혁명에도 깊숙이 개입했습니다.

그는 “붓을 든 로베스 피에로” 라고 불릴 정도로 예술계의 독재자 노릇을 했습니다.

로베스 피에로가 단두대로 간 후에 정치인 화가 다비드도 감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감옥에 있는 다비드를 나폴레옹이 꺼내줍니다.

평범한 군인이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여론의 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미디어 역할을 했던 계층이 화가였고,

나폴레옹은 자신의 우상화를 위해 뛰어난 화가, 다비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Image:David - Portrait.JPG

Portrait d'Anne-Marie-Louise Thélusson Comtesse de Sorcy

 

 

 

 

 

나폴레옹의 유배 후 브뤼셀로 망명한 다비드는

인생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의 정서에 대해서도 다시 느끼게 된 다비드는

그의 말년에 이렇게 로맨틱한 작품을 그리게 됩니다.

사랑을 나누는 젊은 연인들의 모습은 관능적이지만,

고전주의의 엄격함 또한 동일하게 묻어나고 있습니다.

 

Mars désarmé par Vénus, (1824),

 

 

 

1814년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하였으며,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동맹군들은 파리로 진격을 합니다.

이로 인한 나폴레옹의 실각은 추종무리들의 몰락을 불러왔습니다.

1816년 다비드도 브뤼셀로 망명을 하였으나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림에 대한 설명이  상세히 잘 되어 있어

"가람 가구학교 커뮤니티"에서 글을 잠시 가져 왔읍니다.

 

 

Miracles - Paul Cardall

 

krishna" 님의 음악도 함께 감상하세요..^^

 

  

 

2007.6.20.Carlas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carla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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